인조, 명군이 되다 284화
호격이 동북쪽으로 기수를 향하자, 뒤따르던 주보상인 중 하나가 따라붙었다.
“육로로 가시렵니까?”
평범한 상인들 사이에 숨어든 음험한 조선의 눈과 귀이자, 비상한 지혜를 보유했으면서도 아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자였다.
그 간사함은 호격조차 짐짓 소극적으로 만들 정도지만, 냉정하게 득실을 따져보자면 딱히 밑진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냥 꺼릴 수도 없었다.
배후에 조선이 있음은 배제하더라도 말이다.
“…육로로 가고자 한다.”
“산해관을 넘으시겠다는 뜻이로군요. 알겠습니다. 한께서 무사 귀환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따라오지 않는 건가?”
“자칭 황제마저 수도를 버리고 도망쳐, 포로만 잔뜩 생긴 마당에 산해관을 지키는 한 줌 순나라 군대가 의리를 지키리란 생각은 안 드는군요.”
“흠, 그것도 그렇군.”
아무리 황제를 참칭하고 제국을 자칭하여도, 근본이 없으니 본질은 도적 떼로 그칠 뿐이다.
그런 나라의 군대가 죽기를 각오하고서 싸운다는 것도 어불성설.
“알았다.”
호격은 미련 없이 간사한 상인을 돌려보냈고, 그 역시 미련 없이 떠났다.
한의 이름으로 약조한 게 있기는 하나, 그라면 당장 자신을 뒤집어 걸어놓아도 금 반 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터.
호격은 가볍게 박차를 가하며 말했다.
“서두르자. 시간 끌어봐야, 자칫 교전이 벌어졌을 때 산해관 앞에 쌓아놓을 시체만 줄어드니까.”
호격은 사로잡은 포로들에게 최소한의 대우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군사보다 배의 배의 배는 많은 포로를 어떻게 필요한 만큼 먹이고 재우겠는가.
가는 길에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본토로 옮기거나, 혹 길이 막히기라도 한다면 산해관 앞에 쌓아야 했다.
이견이 있을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호격의 수하들은 군사와 포로들을 채근했다.
지친 얼굴들과 초췌한 낯짝들이 장대한 대열을 이루고서 나아갔다.
여전히 말미에는 부스러기를 고대하는 상인들이 뒤를 쫓고 있었다. 호격은 돌아가겠다던 간사한 상인의 말에는 신빙성을 굳이 따져보지 않기로 했다.
* * *
“호격이 마침내 북경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예의 바르게 된 예조판서, 남이공의 보고에 좌의정 박홍구가 물었다.
“예조에서 원호를 해주었는가?”
“호격의 군대가 거듭된 전투로 지치고 손상되어, 단독으로 북경성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했다는 현장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오랑캐가 기댈 자리를 잘 알아봐서 과분한 덕을 입었군.”
“염치가 없지는 않았는지, 소소한 설득에 응하여 백 하고도 열 관의 금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흐음. 그건 마음에 드는구려.”
“소관 또한 그렇습니다.”
자잘한 문답이 일단락하고, 좌의정 박홍구는 용상을 향해 발끝을 돌렸다.
“전하. 이로써 아조가 북직예의 해안과 발해를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얻었으니, 실로 온 나라의 홍복이옵니다.”
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호격이 북경을 태워버렸다는 점일까.
발해의 가치는 그것이 북직예와 요동, 조선을 한꺼번에 연결해주는 내해內海라는 데 있었다.
북직예는 광대한 땅이고 수백 년 간 명나라의 중심지였던 만큼 호격이 분탕 한 번 쳤다고 바로 황폐해지지는 않겠지만,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북경이 아예 불살라진 건 후유증이 컸다.
품을 크게 들이지 않고 조선만의 바다를 성취해냈다는 데서는 딱히 손해 본 건 없지만 말이다.
혼란하고 망가진 북직예와 요동의 사정은 세월과 질서가 차차 치유할 터이므로, 중요한 건 이 순간보다 발해의 패권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였다.
“요동에서도 발해로 통하는 해안가를 완전히 가져온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요…….”
그래야 발해를 더더욱 온전히 조선만의 것으로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남이공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미리 구상해두고 진행 중인 계획이 있다면 모를까, 호격에게서 나머지 해안을 받아내는 건 당장은 무리한 일이옵니다.”
“어떻게 미리 계획을 세워둘 수 있었겠습니까. 금나라가 북직예를 먹는 걸 허락할지, 안 할지도 뒤늦게 정해졌는데요.”
왕은 여유롭게 일렀다.
“금나라가 북직예를 정복한 건, 배보다 배꼽을 더 크게 만드는 일입니다. 잘 통제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크고, 또 필요하다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지요.”
“….”
“호격을 곤란한 처지로 몰아가다 보면, 발해와 맞닿은 해안을 우리가 값싸게 가져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남이공이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자, 왕은 용상의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 내려왔다.
흔치 않은 광경이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입을 닫은 채 집중했고, 용상을 내려온 왕은 주변의 이목은 도외시한 채 가까이에 선 영의정 이원익에게로 향했다.
“영상 대감.”
“전하….”
왕은 이원익의 앙상하게 마른 손을 붙잡았다.
“내가 영의정을 처음 불러 국사를 논의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세월이라는 게 참으로 가혹합니다.”
“흐르는 물과 세월은 막을 수가 없지요. 신은, 나라가 다시 반석에 서는 것을 보았으니 지나간 세월이 조금도 아쉽지 않사옵니다.”
“내가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이원익이 언제 다시 복귀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이전 역사에서는 이원익이 정말로 나라 꼴이 불안해 눈을 감지 못했던건지, 이번 역사에서는 사정이 훨씬 나아졌는데도 이르게 건강이 안 좋아졌다.
무리해서 여생을 붙잡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그러니 이전 역사와 비교하면 여명이 남아 있더라도 복귀를 장담할 수 없었고, 어쩌면 지금이 정전에서 이원익을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랐다.
“영상만 괜찮다면, 조선이 아예 중원을 다 정복하는 것도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노신이 이생에서는 이미 과분한 복록과 은혜를 입었으니 이쯤으로 족하옵니다.”
왕은 농담에 아쉬움을 담아 전하고, 이원익은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후일 이 순간을 다시 돌이켜보았을 때 서로 민망해질 수 있게, 영상께서는 몸조리 잘하십시오.”
“예에.”
왕은 이원익의 작고 가늘어진 손등을 몇 번 두들기고는, 아쉬운 기색으로 다시 용상에 올랐다.
이원익의 은퇴는 전쟁이 수습되는 대로 이행되리라 이미 약조한바.
왕은 만년 도승지 이덕형을 불러 인사의 변화를 고지했고, 이에 남이공은 입을 가렸으며, 호조판서 김신국은 고개를 돌렸다.
* * *
다사다난했던 겨울을 지나 새해가 왔고, 새해가 지나서 봄이 되었으며, 이어서 산천초목이 만개하는 여름이 왔다.
조선은 지난 반년간 내치에 집중해왔다.
혼란한 와중 새로운 영토를 확보했고, 새로운 백성을 구했으며, 새로운 인재를 얻었다.
그 모든 것을 안정적인 상태로 조율하는 건 반년으로도 부족했다.
조선은 가을을 앞두고도 내치에 집중했으며, 가을이 지나서도 내치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러던 와중.
예정된 상황이 발생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방문했습니다.”
청주와 내주로 이루어진 조선령 산동은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청래도가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은 그 청래도의 변경에 이르러 입국과 함께 바다를 건너게 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우리가 금나라와 함께 북직예를 나눠 가진 것을 항의하러 온 것이겠지요?”
왕의 반응에 영의정 박홍구가 답했다.
“대조선이 사냥개를 앞세워 사나운 도적 떼를 물리쳤는데, 그 도적을 다스리지 못해 강 너머로 도망친 명나라가 무슨 염치로 항의하겠사옵니까?”
이에 좌의정 이상의가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한 의사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없다면, 어째서 이 시점에 아조를 방문하겠습니까.”
박홍구는 실소를 머금고서 답했다.
“명나라인들이, 나라가 망한 충격으로 남의 집에서 짖어대는 버릇이 생겨서일지도 모르지요.”
“허허…….”
이상의가 멋쩍어 웃었으나, 어전에서는 달리 지적하는 인물도 없었다.
그야 명나라가 수도와 북직예를 잃어버린 건 순나라의 발호와 그들의 침입을 막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조선의 잘못은 아니잖은가?
혹여 이를 질책하거나 조선이 어렵게 얻은 땅을 되돌려달라 억지를 부린다면, 그거야말로 물에서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진광부의 반란을 진압해 주고, 이자성과 순나라를 북경과 북직예에서 쫓아낸 건 아조가 베풀어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외다!”
박홍구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 몰아가려는 자가 있다면, 나서서라도 저지해야지요. 이것은 대조선의 국익과 체면에 직결된 문제이외다!”
시립한 중신들이 공감했다.
위협을 없애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 아닌가.
보따리까지 달라고 할 발상으로 조선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그저 애꿎은 옆집에 찾아와 짖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에, 우의정 남이공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명나라가 억지를 부리고자 하건, 못 먹는 감 찔러보자는 생각이건, 저들을 적으로 여기는 건 상책이 아닙니다.”
“우상께서는 어찌하기를 바라시오?”
박홍구가 고압적으로 질문했다.
남이공이 우의정에 오른 지도 반년째이건만, 박홍구는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세운 공로가 분명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원익을 대체할 정도로 유능하고 적절한 인사인가, 하고 자문해보면 회의적인 생각만 드는 것이다.
남이공이라고 이러한 기류를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정으로서 입지를 굳히려면 당당해져야 했다.
“명나라든 금나라든 아조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적으로 여기고 호전적으로 대한다면 그들 역시 두렵고 경계하는 마음이 강해져 장차 조선과 대적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남이공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답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지요. 걸맞은 이익 없이 저들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건, 진정 지혜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이에 어전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여러 사람이 남이공을 주시했고, 조금 민망해진 남이공은 약하게 헛기침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은근슬쩍 박홍구의 눈치도 봤는데, 강하게 맞선 것 치곤 영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용상에서 말했다.
“우의정이 말이 옳습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한 저의가 설사 우려한 대로라 해도, 얻을 것 없이 적만 만들어서는 지혜로운 행동이라 하진 못하겠지요.”
“…망극하옵니다.”
남이공이 허리를 숙였다.
“어디 한 번 봅시다. 과연 사신이 어떠한 소리를 하는지, 우리에게 인내심을 길러주고자 방문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왕의 의지가 이러했으므로 명나라와 그들의 사신을 업신여기는 박홍구도 마다할 순 없었다.
“받들겠사옵니다, 전하.”
그렇게 어전의 회의가 일단락되고 소소한 논의가 한참 이어지다가 파해지자, 볕으로 나온 남이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의정이 되고 나선 성질이 더 독해졌다는 박홍구를 상대로 큰소리를 쳤더니 늙은 심장이 좀처럼 진정하지를 못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뒤따라 나온 중신들과 인사를 나누던 남이공의 곁으로 좌의정 이상의가 다가왔다.
“우상 대감.”
“좌의정 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