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85화
“좌의정 대감…….”
우의정 남이공은 이상의가 다가오자 당혹했다.
어째서 자신보다 먼저 나간 사람이, 다른 당상들은 다 빠져나간 지금 다시 나타나서 말을 걸어오는가?
어전에서의 일 때문인가 싶었던 남이공은 금세 허리를 세우고서 답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명색의 의정이다.
삼의정 안에서 서열이 없지는 않지만, 품계도 다 똑같은데 겁을 내자니 민망했다.
“영상이 우의정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직접 전하기 곤란한 상황이라 내게 대신 부탁하였습니다.”
“아…….”
영의정 박홍구가 거론되자 남이공이 짧게 탄식했다.
설마, 이 나이 먹고 건물 뒤편으로 불려가 싸대기라도 맞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던 참이었으므로, 이상의가 팔뚝에 손을 대자 남이공이 흠칫했다.
그런 남이공에게 이상의가 웃으며 말했다.
“잘 해주셨소이다.”
“…예?”
“어전에서 영상 대감께 맞서서 반대하는 의견을 내지 않으셨습니까?”
“예에…… 그게.”
왜 잘한 거라는 말인가.
의문에 이상의가 답했다.
“어전에서는 삼의정이 다 똑같은 소리를 하면 안 되지요.”
“…….”
남이공이 이해가 안 되어 주저하자 이상의가 재차 미소 지으면서 답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건 전하신데, 우리가 다 똑같은 소리만 하면 그대로 하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직접 의견을 물어보시기 전까지는, 성격 나쁜 사람은 나쁜 대로 말하고, 성격 좋은 사람은 좋은 대로 말하고, 머리 돌아가는 사람은 머리 돌아가는 대로 말을 해줘야……. 전하께서 고민해보시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은 의정이 처음이신데도, 영상께서 여전히 오리梧里 대감을 아쉬워하시는지라 대우가 좀 각박한 감이 있어요. 개의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 아닙니다….”
남이공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서 답했다.
“이제 의정이 된 새파란 신래新來인데 어떻게 오리 대감과 비교하겠습니까. 정진하겠습니다.”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남이공은 재차 허리를 숙였고, 이상의는 그런 남이공의 팔뚝을 툭툭 치고는 돌아갔다.
그렇게 정전 앞뜰이 비워지자 남이공은 푹 한숨을 토해냈다.
심려가 담긴 한숨은 아니었다.
이제야 의정으로 인정받은 듯해, 안도감에서 오는 한숨이었다.
* * *
“정진하겠습니다.”
의정부 정본당에서.
삼의정이 함께 배석한 가운데 남이공이 박홍구를 향해 입을 열자, 박홍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남이공이 아닌 이상의였다.
“좌상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신 겝니까?”
“약간의 응원하는 말씀을 드렸지요.”
“……일합시다.”
박홍구가 다시 고개를 숙였고, 이상의도 희미하게 웃고는 자신의 일감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남이공도 어쩔 수 없이 자신 앞에 놓인 권자를 펼쳤다.
그리고 두 시진쯤 지났을까.
박홍구가 입을 열었다.
“우의정 대감.”
“아.”
남이공이 화들짝 놀라서 답했다.
“예, 말씀하시지요.”
“좌의정 대감께는 어떠한 말씀을 들으셨소?”
“세 의정이 모두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남이공은 이걸 고자질이라 여겨야 하나, 하고 생각해 슬쩍 이상의의 안색을 살폈으나 그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옳은 말이외다. 설사, 우리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같더라도 어전에서는 그렇게 말해선 아니 되는 법이요. 전하께서 편전에 부르셨을 때면 모를까.”
박홍구의 말에 남이공은 몇 번 입맛을 다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영의정 대감께서도 부러 강경한 발언을 해오신 것입니까?”
“아니 그랬겠소? 머리 좋은 역할은 오리 대감이 이미 맡았고, 순진한 소리는 좌의정 대감이 하고 있으니, 나라도 독하게 해야지.”
“아…….”
그간 눈치채지 못했던 남이공이었다. 그가 감탄 반, 탄식 반으로 숨을 토해내자 박홍구가 쓰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리되어버린 이 사람 잘못도 있긴 하외다.”
“어떤…?”
“나는 대왕의 은혜를 입어 죽을 뻔한 목숨을 겨우 건진 신세요.”
남이공은 쉬이 긍정하지 못했으나, 박홍구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대왕은 죄질 적은 북인은 살리고자 부던히 노력했고 박홍구는 가장 크게 수혜 입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지내다 보니, 대왕께서 이따금 진심을 시원하게 개진하지 못하고 답답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겸 겸사겸사 명줄도 연장해 보고자 가려워하시는 곳을 대신 긁어드렸소.”
그러다 보니 강경한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굳혀졌다는 소리였다.
“그럼, 그 모든 게 연기였다는 말입니까?”
“전부 다 연기라기보다는…… 반쯤은 진심이 섞였다고 해야겠구려. 오랑캐고 명나라고 하는 짓거리가 시건방지다는 건 우상도 똑같이 생각하는 바 아니요?”
“…그렇습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있으니, 우상까지 그렇게 할 수가 없을 뿐이지.”
“예.”
박홍구는 장계에서 눈을 떼고, 등받이에 늘어진 채로 미소지었다.
“재미는 있소이다.”
“…….”
“일부러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게.”
남이공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어전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터놓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좋은 역할은 영의정인 박홍구가 가져갔다. 남이공은 시키는 대로 머리 좋은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김신국 이놈 들어오면 떠넘겨야지…….’
* * *
명나라의 사신은, 일전에도 조선을 방문한 경력이 있었다.
사가법.
본디 그는 남경예부상서의 관직을 맡았으나, 오늘날에는 북경의 함락으로 앞의 두 글자를 뗀 예부상서로서 방문하게 됐다.
‘산동에 발을 들이는 데는 물론, 이젠 바다를 건너는 것마저 조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사가법은 진정으로 말세를 느꼈다.
꼭 세상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야만 말세겠는가.
지난 수백 년간 중원을 다스리고 천하의 질서를 조율해온 대명이, 이제는 하찮은 농민 반란군과 오랑캐들에게 중원을 다 빼앗기고, 한때는 구해주었던 변방의 소국에 구해지며, 옛 제국의 땅을 지나가는 데 허락이 필요한 이 지경이야말로 진정 말세였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대국의 중신이자 죽지 못하는 게 죄여서, 그저 부단히 대명의 재건을 위해 힘쓸 수밖에 없었다.
“대인.”
사신의 숙소로 내주부사가 방문했다.
사가법은 곧장 일어나서 맞이했고, 내주부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양에 방문을 요청하고서 제법 기다려온 사가법이다.
그동안 내주부사가 곧장 숙소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는데, 이례적으로 방문한 걸 보아 결과를 전해 들을 법했다.
“윤허 받았습니다.”
“아!”
내주부사의 답에 사가법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양새가 좋지 않아, 기고만장한 조선이라면 거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다 부사께서 힘 써주신 덕입니다!”
“이 사람이 한 게 뭐가 있겠습니가. 대명에서 귀한 손님이 온다니, 반갑게 맞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요.”
사가법은 내심 과연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출발은 언제 하겠습니까?”
“이미 아전을 시켜 배편을 구하게 했습니다. 본토와 청래도를 오가는 배는 많으니, 이번에는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때가 되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그동안은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예.”
내주부사는 짧게 인사하고는 숙소를 나섰고, 사가법은 대문까지 나가 내주부사를 배웅한 다음 돌아와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이튿날 아전이 숙소를 방문해 배편을 구해주었고, 사가법은 고마움을 표한 뒤 짐과 얼마 없는 수행원들을 수습해 항구가 있는 진평부로 떠났다.
진평부는 무척이나 발전한 고을이었다.
산동과 그 너머 중원에서 갖가지 귀물을 값싸게 들여오고, 또 식량을 비싸게 반출하는 길목이었으니 당연했다.
과거 홍태주가 벌인 방화와 파괴의 악명은 높았으나, 정작 그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벌써 한양에 도착한 기분이로군.”
조선이 파괴된 등주를 청주로 재건하는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것은 교화였다.
중원과는 이질적인 본토의 문화와 풍속을 이식하여, 훗날 청래도가 쉽게 본토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원했으니까.
그 과업은 진평부사 김경여에 의해 치밀하고 세심하게 진행되어, 오늘날의 등주는 본토의 여느 번화한 거읍과도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흔적이라곤 등주 시절의 옛 성곽뿐.
“명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사가법에게 대뜸 말을 걸어오는 이 역시,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네만.”
사가법은 일면식도 없이 다가온 조선인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물었다.
“누구인가?”
“밖에서 오신 분이시니, 길을 헷갈릴 수 있어 안내하라는 관찰사의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관청에서 온 분이셨군.”
사가법은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관찰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대신 응대하다니.
예전 같았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관찰사께서는 공무로 워낙 바쁘신지라, 직접 시간을 내지는 못하셨습니다.”
“뭐…. 괜찮소. 나랏일하는 사람 바쁜 거야 나도 아는 일이요. 어차피 진평부는 거쳐만 가는 곳이기도 하고.”
“양해해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사가법은 사내의 주변을 둘러보곤 물었다.
“그런데, 안내하는 사람은 자네뿐인가?”
“예.”
“이건 조금 놀랍군.”
아무리 그래도 안내역이 단 한 사람이라니. 대명이 확실히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취급이 너무한 게 아닌가?
이에 사내가 답했다.
“부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관찰사께서 대리인으로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의입니다.”
“어디를 봐서 말인가?”
“이것을 봐주시지요.”
사내가 손을 들어 손뼉을 가볍게 쳤다.
대수롭지 않은 광경에 사가법은 이게 무슨 수작인가 싶어 어처구니가 없어지려는 찰나.
주변에서 빼곡히 오가는 행인 중 과반이 우뚝 서서 사가법을 돌아보았다.
그 기이한 광경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사내가 다시 손뼉을 치자 행인들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분주히 지나쳐갔다.
“…….”
사가법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사내가 말했다.
“안내는 소인 혼자 하는 게 맞씁니다만, 대명에서 방문해주신 귀인의 안전은 여러 사람이 맡고 있지요.”
사가법은 압도될 따름이었다.
* * *
사가법과 수행원들은 범선을 타고 단숨에 조선 본토에 도착했다.
범선은 다른 경유지 없이 다시 청래도로 돌아가는데, 만석이었던 배에서는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진평부에서 사가법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었던 사람들이 그대로 승객으로 위장해 동승한 것이다.
“….”
사가법은 배 위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사내에게 고개를 숙여주고는, 가까운 부두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 한양과 직결하는 마포麻浦로 향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는 사가법의 배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수백 척의 배가 드넓은 강폭을 점유하고서 바쁘게 강을 오르내렸는데, 그 번성함이 과거 장강의 하류를 보는 듯했다.
덕분에 바닷내음은 강 상류인 마포에서도 진하게 전해져왔다.
마포는 일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반 배는 커져 있었다.
부두 한쪽 구석에서는 어염魚鹽을 내려놓았고, 반대편에는 나무 상자로 잘 포장된 화물들이 켜켜이 쌓였다.
안에는 무엇이 든 것일까.
그 주변으로 모여든 조선인 상인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었는데, 개중에 간혹 머리 붉은 사람과 난쟁이도 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