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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6화 (28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6화

한양 도성.

그 내부도 사가법이 과거 방문했을 때보다 사뭇 달라졌다.

이전에는 복층의 기와집부터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까지 섞여 있었다면, 이제는 태반이 기와집이었는데 수도 전체가 부촌으로 변모한 듯했다.

대로를 따라 복층의 초가집이 늘어져 있었고, 좁은 골목길 너머로도 기와지붕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허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조선에서는 세월이 유난히 빠른 듯했다.

사가법은 내심 변화에 감명받으면서도, 반대로 빠르게 쇠락해 버린 대명을 돌이켜 생각해 보곤 침울해졌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기운 달은 다시 차는 법이지.”

그래도 대명은 중원 역사 전체와 비교해서는 운이 좋았다.

부활을 시도조차 못 하고 그대로 세월에 지워진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장강의 이남을 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길을 걸었을 즈음.

사가법은 익숙한 장소에 다다랐고, 부두에서부터 사가법을 안내해온 관리가 말했다.

“이곳이 사신께서 묵으실 숙소입니다.”

“고맙소.”

“…….

안내역의 관리가 물러나고, 사가법은 오래간만에 방문한 숙소 앞에 서서 정문을 쓸어내렸다.

“관리는 잘해놓았군.”

예전에 보았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게 없었다.

사가법은 조선의 왕과 신하들 역시도 예전보다 더 달라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 * *

의정부 정본당.

“명나라 사신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사인舍人 여이징이 보고와 함께 빨간색 권자들을 내려놓았다.

“알았네.”

영의정 박홍구는 짧게 답하였고, 여이징은 예를 올리고서 물러났다.

사신의 도착은 화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일이었고, 상의도 충분히 이뤄지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간색 권자들.

이는 예조를 통해 올라오는 실방사의 장계를 의미했다.

당상관들조차 대부분은 열람이 허용되지 않으며, 일부는 취급조차도 불허되는 기밀.

포장의 개방이 가능한 공간마저도 지정되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삼의정의 업무 공간인 의정부 정본당이었다.

박홍구는 묶어놓은 끈을 봉인한 밀랍부터 제거한 뒤 권자를 펼쳤다.

예조에서 한 차례 해독되어 재작성된 수본手本에는 실방사가 금나라에서 핵심 사업을 보고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좌의정 이상의가 물어왔다.

“전하께서 발해를 온전히 아조의 바다로 만들고자 하시는 건 두 분께서도 아실 거요.”

“잘 알지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니.

그 목적으로 착수한 사업이 요동의 곡물 가격을 올리는 것이었다.

식량 원조를 대가로 금나라의 해안지역을 양도받겠다는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호격이 승전과 함께 수십 만에 달하는 북경의 주민들과 여타 포로를 요동으로 데려온 것은 실방사가 공작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다.

포로의 대대적인 유입을 선전하고, 그로 인한 식량 가격의 폭등을 예고하며, 백성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했다.

또한, 압록강 국경에서 수입되는 쌀을 그대로 다시 조선으로 보내버렸다.

덕분에 금나라는 막대한 양의 쌀을 수입하고, 국경에서는 분명 여유분의 식량이 있는데, 내지에서는 곡물 가격이 폭등한다는 이상한 상황에 처했다.

실방사는 이 틈을 타 폭등한 가격에 식량을 조금씩 처분하여 부가수입을 올리는 한편, 유입을 만회하고자 대농장과 관창 주변의 굶주린 백성과 순나라 노예들을 선동해 시설을 파괴하고 식량을 불태웠다.

그 결과…….

“요동에서 곡물의 가격이 예년보다 세 배까지 올랐소.”

일견 폭등치고는 극적이지 않은 상승세였으나, 요동은 오래된 전화戰火로 이미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 놓여 있었다.

홍태주와 호격이 재차 전쟁을 일으키며 인명을 손상시키고 국외에서 부와 식량을 충당하려 한 건 그 때문.

이미 폭등한 가격에서 세 배까지 오른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추수가 시작되어 곡물가가 다시 빠질 위험이 있다는군.”

“그 전에 금나라와 공식적으로 접촉해 영토의 할양을 제안해야겠습니다.”

남이공의 주장에 박홍구가 끄덕였고, 이어서 두 번째 빨간색 권자를 확인했다.

내용은 실방사의 일원들이 명나라 사신을 추적하며 보고 들은 것들이었다.

“예부상서가 한이 많은 듯합니다.”

시종 조선의 영화와 명나라의 몰락을 비교하며 우울해했다니, 명나라의 대신으로서 그리 놀랍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예부상서는 저번에도 아조를 방문한 적이 있으니, 아조의 발전상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크게 와닿았겠지요.”

좌의정 이상의가 말했고, 남이공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예부상서가 어떠한 저의로 조선을 방문했다고는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없구려.”

방문의사야 대강은 짐작하였으나, 드러나지 않은 건 아쉬운 일.

어쨌거나 빨간색 권자의 내용이 각기 이러했으므로 사신의 방문 소식 자체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박홍구와 이상의, 남이공 세 정승은 금나라를 어떻게 구슬려 해안을 뜯어낼지 한참을 논의했고, 창 밖에 어둑해져 퇴청 시간이 다가올 즈음 사신을 상대할 사람을 꼽았다.

“사신은 대체로 예조판서가 상대해왔으니, 전례에 따라 이번에도 예조판서가 상대함이 어떻겠습니까?”

남이공이 강권했다.

구관이 명관이랍시고 의정이 되어서도 사신 접대를 떠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

이에 박홍구가 수긍했다.

“우의정께서 후임 예조판서를 좋은 사람으로 추천해주셨는데, 어디 그에게 사신을 구슬리는 재주도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 * *

예조판서가 예부상서와 만난 건 그 직후였다.

의정부에서 권유를 받아, 숙소를 방문한 것이다.

“아!”

사가법이 대문까지 나아가 맞이하자, 문간 너머에서 인사했다.

“예조판서 구굉이라 합니다.”

현 왕의 외숙으로 한성부 판윤만을 연임해온 사람이다.

왕의 외척이라면 기고만장하여 횡포를 부릴 법한데도 묵묵히 자기 일만 맡아왔으며, 판윤으로서 실방사와의 연계도 있었던 만큼 전임 예조판서 남이공은 그 점을 높게 샀다.

기밀을 취급하고 실방사를 부리는 예조판서가 겸손한 사람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으니까.

“안으로 듭시지요.”

“감사합니다.”

사가법은 계단을 올라오는 구굉에게 괜히 손을 뻗었고, 구굉은 그 뻗은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올라섰다.

두 사람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짧게 담소를 나눴다.

“대명의 예부상서를 뵙게 되어, 이렇게 나란히 걷기까지 하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라니요. 민망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예부상서를 직접 뵙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늘, 당연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작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나 사가법은 이제야 대접다운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예부의 상서를 이렇게 찬밥 취급해주는 데가 얼마나 있겠는가.

숙소로 들어선 사가법은 수행원에게 다과를 내어오게 하고서, 구굉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예조판서께서는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혹 실망시켜드리진 않았을까 모르겠군요. 소관은 조신의 입장으로서 특별히 전달해드릴 게 있어 방문한 게 아니라, 그저 예부상서를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구굉은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덧붙였다.

“실례가 되었을지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가법은 두 손을 내저었다.

구굉은 그가 이 땅에서 만난 가장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처신도 조심스럽고 예의 또한 갖추었으니, 어떻게 만남이 싫을 수 있을까.

“꼭 일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예조판서와 인사하게 되어 나 또한 반가울 따름입니다.”

“양해해 주시니 지극히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곧 수행원이 다과를 내왔고, 사가법은 구굉과 함께 목을 축인 뒤 물었다.

“일전에 뵌 예조판서와는 다른데, 새로 제수되셨습니까?”

“예. 과분하게도 성상의 은혜를 입어 예판의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전 판서분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우의정으로 제수되었습니다.”

“아하….”

사가법은 얕게 탄식했다.

남이공은 대명에 오래전부터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악명이 매우 높았는데, 의정이 되었다니 괴로운 소식이었다.

“예조판서의 일은 어떻습니까? 적응할만하신지요.”

“소관이 오래도록 예조와는 연이 없었는데, 갑자기 판서로 임명되어서 적응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닙니다. 물론, 대명의 예부와 비교하자면 아이 놀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럴 리가요.”

사가법은 손을 내젓고는, 화제를 살짝 바꿨다.

“그렇다면 원래 하시던 일은 무엇입니까? 연이 없으시던 분께서 갑자기 장관을 맡게 되셨다면 낮은 위치에 계시지는 않으셨을 테지요.”

“이전까지는 한성부 판윤을 맡았습니다.”

“아하. 그럼 내가 일전에 방문했을 때도 판윤을……?”

“예.”

“이런. 안타깝습니다. 미리 판윤과 뵐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소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뵈게 되었으니 다행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사가법은 흔쾌히 답하면서도, 주어진 정보에서 쓸만한 단서를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질문을 거듭 건네어도 썩 와닿는 정보는 없었다.

유일하게 거둔 소득이라면, 악명 높은 남이공은 의정이 되었다는 축하해 주지 못할 소식뿐.

“예부의 일은 어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조와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황상을 모시는 신하로서 보다 넓은 업무 범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아하. 예를 들자면……?”

사가법은 함께 앉은 자리를 가리켰다.

“이렇게 천하에 둘밖에 없는 문명국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방문한다든지요.”

“그래도 폐하를 모시는 대명의 대신이신데, 소방을 친히 방문해주시니 민망합니다.”

구굉의 겸양에 사가법이 실소했다.

“조선이 어딜 보아서 소방입니까? 흉악한 노추를 쓰러뜨리고, 홍태주를 굴복시켜 목줄을 채웠지요. 그리고 반역한 도적의 무리를 북경에서 쫓아내었는데, 이런 나라를 소방으로 부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거야, 다 대명이 떠받쳐온 질서에서 평화를 구가해 온 조선으로서는 당연한 보은이지요.”

“온 천하가 대인처럼 생각해 준다면, 나는 여한이 없겠습니다!”

순나라와 서나라의 협공에 패퇴하여 장강 이남으로 물러나자, 주변의 털 붉은 오랑캐와 키 작은 오랑캐는 더더욱 안하무인이 되었다.

조선은 차라리 저들 땅으로 발해를 가둬놓기라도 하고서 거들먹거리지, 홍모이와 왜는 이역만리에서 배를 보내 대명의 해안에서 선박과 수부를 납치해갔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입항해서는 식량을 사가고, 응하지 않으면 난동을 피우며, 다시 바다로 나가서는 또 양민을 잡아다가 이국에 팔아버리는 것이다.

“하…….”

사가법은 탄식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마음에 이어 몸까지 금세 피곤해져서는, 등받이에 늘어졌다.

“…조선에서는 대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국입니다. 황제를 모시고 천하를 경영하는 나라지요.”

“대명이 예전만 못한 지금에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시운이 아닐 뿐이라 생각합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대국이 지난 수백 년 간 한 번도 아니 흘렸던 간 아니잖습니까?”

황제가 무리해서 친정에 나섰다가 포로로 전락한 토목의변土木之變이라던가.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지요. 하지만, 기운 달은 다시 차는 법입니다.”

“나 역시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후우우.”

사가법은 탄식을 토해내고는 힘없이 말했다.

“대인이 그렇게 말해주니 나로서는 감사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과분하게나마 이해가 됩니다만, 부끄럽다니요?”

“대국의 대신이 되어서도 대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다 세상이 망한 얼굴을 하고서 하루하루 폐하를 실망시킬 따름이지요.”

“하지만 대인께서는 아니잖습니까?”

“으음…….”

“충신이야 어느 때라도 귀중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귀중하지요. 황상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하.”

사가법은 짧게 웃고는 일렀다.

“조선에도 대인과 같은 분이 있는데…….”

사가법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전부 풀어내기엔 민감한 주제였으니까.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산동에 아예 말뚝을 박아버린 데 이어, 영토를 점차 확장시켜나갈 뿐 아니라 금나라의 군사들에게 바다를 건너게 해주어 북직예를 함락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발해를 저들의 바다로 만들고자 맞닿는 해안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으니, 명나라로서는 복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시지요.”

구굉이 이르자, 사가법은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대명의 신하들도 다 대인 같았더라면, 명나라에 어찌하여 오늘날의 고난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제를 돌린 것이지만, 이는 사가법의 진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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