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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7화 (287/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7화

“소방의 배신이 대국의 너무 내밀한 사정을 듣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구굉이 눈치를 보자, 사가법이 고개를 저었다.

“내밀한 사정이라니요. 대명에 사는 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사실입니다. 대인께서는 부디 부담 갖지 말아주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예. 당연히 들어도 되는 말이니 해드리는 것이지요.”

“하하. 그것도 그렇겠습니다.”

사가법은 구굉에게 조선의 사정을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질문은 많이 했고 담소도 길었다.

그새 해가 졌는지 주변도 어두워졌으므로 사가법은 화제를 바꿨다.

“벌써 날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군요.”

“허어, 참.”

구굉은 탄식하고는 답했다.

“소관 역시 그렇습니다. 잠깐 인사만 드린다는 것이, 좋은 분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금칠을 다 하십니다.”

“소관이 마음 같아서는 대인과 더 담소를 나눠보고 싶지만, 내일 또 등청해야 하는 몸인지라 염치 불구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내가 공무로 바쁘신 분을 어떻게 잡아둘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눴고, 사가법은 문 너머까지 구굉을 배웅했다.

“살펴가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두 사람은 미련을 드러내며 헤어졌고, 사가법은 구굉이 골목을 돌아 떠나는 모습을 다 지켜본 다음에야 돌아섰다.

“…지치는군.”

사가법은 그간 구굉과 오간 대화를 복기하며 혹 과도하게 민감한 말을 하지는 않았나, 구굉의 발언에서 쓸만한 정보는 없었나 검토했다.

다행히 큰 실수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건 구굉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쉽게 되었으나 사가법은 개의치 않았다.

구굉의 기세를 보아 또 방문할 듯했고, 그때 다시 질의를 건네며 조금씩 떠보면 될 따름이었다.

* * *

사가법이 숙소에서 고심하는 동안.

구굉은 골목을 몇 번 돌다가 예조로 향했다.

퇴청했던 판서가 갑자기 나타나자 졸면서 번을 서던 하급 관리들과 아전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구굉은 입술에 검지만 대고서는 다시 뒷짐을 쥔 채 본청으로 향했다.

실방사를 속사로 둔 예조다.

이따금 시급한 보고가 곧장 궐로 향하기도 하나, 대개는 예조를 먼저 거쳤다.

그리고 본청에는 보고들을 두고두고 참고하기 위해 가공하고 취합한 자료가 있었다.

구굉이 본청을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가법과의 만남에서 말미에 나눈 대화가 조금 의심스러웠으므로, 그간 실방사를 통해 확인된 명나라의 내부 사정을 다시금 참고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책장에서 몇 가지 책을 빼낸 구굉은 자신의 자리에 촛불을 하나 켜놓고 자료를 펼쳤다.

* * *

다음 날 아침.

침침한 눈으로 밤새 책을 뒤적인 구굉은 초췌한 얼굴로 여명을 맞이했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장관과 함께 숙직 선 하급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입궐할 준비를 마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차가운 물로 얼굴과 잠기운을 거듭 씻어내는 구굉의 곁에서 세안수를 가져온 관리가 물었다.

구굉은 몇 번 더 얼굴을 적신 뒤 손을 털어내면서 답했다.

“조회에 참석만 하고 오늘은 일찍 퇴청할까 하네.”

“그러시지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늙은이가 밤을 새웠으니 그건 당연하지.”

구굉은 실소와 함께 의복을 정제하고는 예조를 나섰다.

마침 바람이 쌀쌀하였으므로 다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여전한 잠기운을 날려주었다.

구굉이 입궐하고 잠시 후, 왕이 등장해 용상에 앉았으며 의례와 가벼운 보고로 조회가 시작했다.

구굉은 밤을 새운지라 피곤한 편이었으므로, 빨리 긴장을 놓을 수 있도록 일찍 나서기로 했다.

“전하.”

“예조판서…….”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물었다.

“눈이 토끼 눈이 되셨습니다. 혹시, 밤이라도 새셨는지요?”

“그러하옵니다.”

“예부상서를 만난 일 때문인가 보군요.”

“예.”

“말씀하세요.”

구굉은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신이 알아본바, 예부상서가 겉으로 드러낼 방문 사유는 중요하지 않을 줄로 사료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날 명나라는 퇴락과 몰락을 반복하여, 조신 중 아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은데 근자의 일로 힘을 얻었사옵니다.”

그 근자의 일이란, 조선이 금나라를 부려 북직예에서 순나라를 쫓아내고 해안을 장악한 것을 뜻했다.

“예부상서가 진정 조선을 방문한 이유는 억지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비되는 신세와 가중되는 불안감에 아조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옵니다.”

이에 영의정 박홍구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유순한 말로 사신을 상대해 준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들어주는 억지가 없다면 저들은 아조가 변심했다고 생각하여 오해를 품지 않겠는가?”

“결과가 뻔하니 교분도 헛되다 하여, 사신을 강압적으로 대한다면 되려 지지 않아도 될 원한까지 살 것입니다.”

“이놈들은 물에서 건져줘도 지…, 앙탈이군.”

박홍구가 ‘지랄’이랍시고 말하려던 것을 최대한 순화해서 말하자, 여러 사람이 미소를 머금었고 우의정 남이공은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약간의 부산스러움이 지나가고서 좌의정 이상의가 말했다.

“예조판서의 추측이 이 사람의 사리에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데, 그렇다면 억지를 부릴지언정 잘 구슬릴 수밖에 없고, 둘째로는 사신을 잘 납득시켜 억지에 불응한 것을 이해하게 만들어야 하외다.”

이에 남이공이 발언했다.

“첫 번째는 달성하기 매우 쉬우나, 두 번째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사신이 부릴 억지라고는 십 중에 팔구가 산동이나 북직예의 일일 텐데, 그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단 하는 말을 잘 들어보고, 조리 있게 답해주는 수밖에 없지요.”

“……음.”

남이공이 침음했다. 마음 같아서는 박홍구처럼 시원하게 지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의견이 분분히 오갔고, 그것이 진정될 즈음 용상에서 말했다.

“논의의 더 유의미한 진전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사신을 들어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겠습니다. 만에 하나겠으나 대신들의 의견과 다른 주장을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요.”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사신을 청해 그의 발언을 들어봅시다. 마침 조회를 위해 대신들도 모두 모였으니.”

곧, 내시가 왕명을 받들어 예부상서 사가법을 호출하러 떠났다.

그동안 짧게 논의가 더 이어졌다가, 이내 정문 너머가 부산스러워지자 다들 입을 닫았다.

“전하.”

예조판서 사가법은 공손히 손을 모은 채로 입시하여,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신께서는 일전에도 조선을 방문하셨지요?”

“그러하옵니다.”

“어렵게 바다 건너의 소국을 다시 내방해주니,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천하에 문명의 질서를 떠받치는 곳은 오직 대명 아니면 조선뿐이니, 어떻게 바다가 있다 하여 양국의 교린을 늦추겠습니까. 반겨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있고서 왕이 본론을 꺼냈다.

“사신은 어인 일로 조선을 방문해 주셨습니까? 혹, 조서라도 가지고 오셨는지요?”

“송구하옵게도 조서는 가지고 오지 않았으나, 폐하의 명으로 전하께 청코자 하여 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먼저, 폐하께서는 조선이 거둔 승리를 축하드리며 또한 거듭 상찬賞讚하셨사옵니다. 천하가 혼란한 시대를 맞아 오랑캐와 도적이 각지에서 난립하는데, 조선이 앞장서서 진화해 주니 양국의 우호가 오늘날보다 더한 때가 없다고 교하셨지요.”

“망극한 일입니다.”

사가법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마저 말했다.

“다만, 폐하의 이 같은 하교에도 몇몇 사람은 불령한 소리를 일삼았는데, 도적이 북직예에서 패퇴하였다고는 하나 되려 북경이 불타버렸고, 사나운 오랑캐들이 백성을 잡아 먼 곳으로 데려가버렸으므로, 도적이 소탕된 보람이 없고 조선은 다만 해안가만을 진정시켜 망망대해만을 구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령한 소리입니다. 내가 해안을 틀어막고 바다를 철통같이 수비하는 건 사나운 오랑캐들이 물을 건너 중원을 재침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예요.”

“하오나, 사나운 오랑캐들은 요동에 이어 북직예까지 점거하고서 육로로 왕래하며 중원을 유린하고 있사옵니다.”

“내가 이미 오랑캐와 도적이 발호하는 곳곳에 쐐기를 박고서 모진 세파가 더는 대명을 범하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고는 있으나, 북직예와 요동은 방대한 뭍으로 연결되어 힘이 닿지 않습니다.”

왕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었다.

만약 조선이 힘이 넘쳐서 요동과 북직예의 연결을 의사대로 차단할 수 있다면, 진즉 금나라를 남겨두지도 않았으며 북직예를 넘겨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조선은 작은 나라였다.

단순히 겸양을 떠나서, 인명이 발에 채이는 중원과 달리 조선의 인구는 고작 이천 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개중 절반은 노비의 신분으로 구속되어 백성으로 쓸 수도 없었다.

“내가 황상께서 에둘러 표현하시는 바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아조가 충분히 강성하였다면 어째서 홍태주를 굴복시킨 뒤 요동을 정토하고 대명에 되돌려주지 못하였겠습니까.”

왕은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조는 약소한 나라이며, 단지 몇 곳에 벅찬 힘으로 쐐기만을 겨우 박아놓았을 뿐, 사나운 오랑캐를 다잡는 건 아조의 미약한 힘으로는 흐르는 물살을 손가락으로 가두는 것과 같아 막연하고 곤란하기만 합니다.”

“…….

“예부상서.”

“예, 전하.”

“황상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가까스로 마련해둔 산동과 해안의 흙 한 줌이야 얼마든지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녕 대명에 이로운 일입니까?”

“…….”

사가법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준다고 넙죽 받아먹으려 드는 것도 대책 없는 짓이긴 하였으나, 막상 되돌려받더라도 문제였다.

당장 대명에는 그 땅을 지킬 힘이 없으니까.

“황상께서 염려하시고, 대명의 신하들이 근심하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대국이 되어서 그 일원들이 소방의 의사를 의심하며 전전긍긍한다는 말입니까?”

명나라가 퇴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이 나서서 노아합적과 홍태주, 진광부와 이자성을 물리쳐주지 않았다면 망해버렸을 정도로 말이다.

“당장 조선이 힘쓰는 건 오직 그간 천하를 떠받쳐온 황상과 대국의 은혜를 되갚는 것뿐이며, 그러한 저의를 의심한다는 건 일견 이해되면서도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송구하옵니다.”

“내가 백날을 설파하여도 대국에서 먼저 제 힘을 찾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해답은 오직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서는 소방만을 의식하니,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사가법은 유구무언이라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고, 용상 좌우로 시립한 중신들은 전례 없는 능변에 한 대씩 맞은 얼굴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예부상서께서는 더 많은 말이 필요하십니까? 나로서는, 여기에 백 마디를 더해도 공허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아니옵니다. 전하의 뜻은 잘 이해했습니다.”

“부디 예부상서께서 모자란 신하의 말을 황상과 조신들에게 잘 전달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에.”

왕은 분위기를 바꾸어 일렀다.

“사신이 먼데서 오셨는데 환대가 늦어서 미안합니다. 내가 공사가 다망하여 예법과 격식을 잊어, 신하들도 많이 배려하고 있는데 그만 사신에게까지 결례를 끼쳤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는 나라의 일로 매우 바쁘신 분이며, 이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 어찌 허례허식을 위하여 경중을 농단하겠습니까.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가법이 재차 고개를 숙이자 왕이 부드럽게 웃었다.

“갑자기 불러내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신께서는 더 전할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예……. 소관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삼가 살펴 가시기를 바랍니다.”

왕은 사가법을 안내해온 내시에게 대신 숙소까지 배웅해줄 것을 맡겼고, 사가법은 예를 올린 뒤 내시와 함께 어전을 빠져나갔다.

왕은 당황한 얼굴들 사이에서 일렀다.

“혹자가 이르기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수십만 냥을 들여 힘겹게 얻은 땅을 구하고자 애써 변설하였을 뿐입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박홍구가 답했다.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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