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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8화 (28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8화

막 사가법이 물러난 뒤.

경청하던 우의정 남이공이 말했다.

“전하께서 명나라의 근심과 우려를 쫓아내었으나, 하교대로 저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미봉책으로 그칠 것이옵니다.”

과거 청래도에서 유지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남이공은 이전의 예조판서로서 반란의 배후에 명나라의 첩보기관인 동창이 있음을 파악했다.

설사 명나라의 저의에 대단한 적의가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경계하는 마음뿐일지라도, 그 결과로서 해를 끼쳐댄다면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에 좌의정 이상의가 말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였으니, 당장 결판을 낼 각오는 하지 맙시다.”

“저 혼자 궁지에 몰렸다고 착각하여 계속 물어댈까 우려하는 것뿐입니다.”

두 의정의 의견이 대치하자, 영의정 박홍구가 나섰다.

“명나라의 처분을 두고 이렇게 왈가왈부가 이뤄진다는 것은, 놈들이 실제로는 머릿니와 같아 지극히 귀찮게 하지만 일일이 잡아 죽이기는 어려운 것과 같소이다.”

박홍구의 비유에 어전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기야, 명나라가 진정으로 위협이 되었다면 이렇게 놀림감이 되지도 않았을 터.

저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지만 당장 그들의 세력은 미약해 건사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달리 말하면, 당장 크나큰 해악은 아니라는 뜻이니 일의 경중을 헤아려 봅시다.”

중신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의정 남이공이었다.

“예조판서, 금나라에 양곡을 주고 해변을 얻는 일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이에 예조판서 구굉이 허리 숙였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중대한 사안이니 호격도 가볍게 응하지는 않을 테지요.”

“예. 호격은 이번 협상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단순히 중대사라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투였다.

금나라는 오래전부터 갖은 술책에 당해왔다. 처신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를 기울인다고 아조의 영향을 외면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전임 예조판서를 지낸 남이공이다.

금나라에 조선이 얼마나 침투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예품과 사치품은 요동이 혼란하던 시절 싼값에 모조리 사들인 지 오래고, 그나마 안정된 지금은 갖은 특혜를 업고서 헐값에 긁어모으는 중이고, 심지어는 목숨줄인 식량마저 통제 중이다.

조선이 이렇게 밑바닥부터 꽉 잡고 있는데 금나라가 어떻게 항거하겠는가.

“주의를 아무리 기울인들 단지 시간만 쓸데없이 끌며,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할 뿐입니다.”

남이공이 여유롭게 말했다.

금나라에 관해서만은, 제 손바닥 보듯 보는 그였으니까.

“호격이라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고분고분 끌려다니기에는 여느 사나운 짐승들이 다 그렇듯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것일 테지요.”

“딱 그것입니다.”

전임과 현임 예조판서의 대담으로 협상의 진전 상태를 확인한 박홍구가 일렀다.

“사나운 짐승들이 또한 그렇듯, 언제 줄을 끊고 난동을 부릴지 모르니 안심도 방심도 금물이외다. 이국의 주시는 잘 이루어지고 있소?”

“순나라는 북경과 북직예 주변에 파견한 실방사를 통해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이자성이 가까운 수하들과 함께 재물만 들고 서쪽으로 도망친 뒤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찮은 작태로군.”

구굉이 고개를 숙이고는 마저 보고했다.

“서남쪽에서는 장헌충張獻忠이 세운 서나라가 나전왕 안방언과 대량왕 사숭명 등과 함께 난립하여서 서로 다투기 바쁘다고만 전해졌을 뿐, 상세한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에는 사정이 정해지지 않았겠나?”

“실방사는 주로 남경과 남직예에서 파견되어 활동하는 데 반해, 사천은 서쪽의 거의 끝자락이므로 소식이 잘 닿지 않습니다.”

유민들부터가 중원을 가로질러서 남직예에 정착하기보단 그저 더 남쪽으로 피난할 뿐이니까.

소식을 전해줄 입이 닿지 않으면 소문 또한 닿지 않을 수밖에 없다.

“포도아葡萄牙와 화란和蘭의 사정은 어떠한가?”

“포도아는 오래전부터 명나라의 남쪽 끝자락에 터를 잡고서 중원에 기생해왔는데, 화란이 분열을 일으켜 해역을 어지럽히고, 또 안에서는 실방사와 상인들이 혼란을 틈타 재물을 두고 경쟁하므로, 노선을 바꾸어 명나라와 친교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화란은?”

“남부의 수령들 말에 따르면 머리 붉은 오랑캐들이 잇따라 올라와 통교와 무역을 제안하므로, 대강은 물리치고 있는데 이따금 한둘이 깊게 들어와 마포를 방문하고는 합니다.”

“포도아와 화란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대명이 포도아와 친교를 다진다면 화란은 우리와 친교를 다지고자 할 것이다.”

“그러한 일환으로 여겨지옵니다. 아니면, 단순히 명나라를 대체할 무역 상대를 찾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흐음.”

박홍구가 침음과 함께 질답을 대강 갈무리하자, 용상에서 물었다.

“왜의 동향은 어떠한가?”

중신들에게는 꺼림칙한 언급이었다.

조선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국강병을 이룩했더라도 아직은 세가 많이 미약했다.

진정 부국에 강병이라면 요동을 직접 다스리고 중원도 거침없이 정토했을 테니까.

더욱이 정예한 군사의 수는 고작 수만에 불과하여, 삼 만여 명쯤을 제하고는 상시 유지하지 못하여 필요에 맞춰 소집과 해제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대로 왜족은 어떠한가.

지난 전쟁만 하더라도 족히 십만여 명을 이끌고 팔도를 동시에 침공했다.

조정의 중신들은 이 같은 참화를 대체로 겪어본 자들이었고, 그렇지 못했더라도 나라가 후유증으로 다 죽어가는 지경만은 똑똑히 경험해 보았으므로 왜란 거론조차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상에서 하문하였는데 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왜는 족속이 왜소하고 용모는 빠그라져 아조의 사람이 쉽게 섞일 수 없는지라, 열도는 차치해두고 동래부에 눈과 귀를 두었는데 왜족이 아조가 중원까지 진출한 소식을 어떻게 전해 듣고는 방문이 부쩍 늘었습니다.”

“지난 전쟁처럼 해를 일으킬 동향은 보이지 않던가?”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열도를 통일하고 난 다음에는 풍신豊臣(도요토미)의 잔당을 몰아내느라 바빴고, 그 뒤를 이은 덕천수충?川秀忠(도쿠가와 히데타다) 또한 열도에서 일족의 힘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여 국외로는 난동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의정 남이공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수충은 유구국의 불쌍한 왕을 잡아다가 자신에게 인사시키지 않았던가?”

“그것은 수충이 지시한 바가 아니라, 도진충항島津忠恒(시마즈 타다쓰네)이 사로잡아 수충에게 바친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

남이공의 질문에 답한 구굉은 다시 용상으로 몸을 돌린 채 허리를 숙였다. 이것을 끝으로 달리 고할 말은 없다는 뜻이었다.

“조선이 이처럼 성세를 얻어도 천하는 여전히 혼란하고, 오랑캐들은 강성하구나.”

“성상께서 요순과 같은 치세를 펼쳐, 아조가 성한 것이 오늘날 같은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근심을 드러내시옵니까.”

“전왕이나 광해군처럼 못난 종자들이 아예 드러눕지만 않았어도 내가 뛰면서 날지를 못함을 한탄할 일은 없었으리라 탄식하는 것이다.”

신하 된 신분으로 가벼이 응답할 탄식은 아니었으므로, 구굉과 여타 중신들은 그저 허리만 숙였다.

“예조판서는 계속 수고해 주기를 바랍니다.”

“삼가 왕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 *

압록강 북쪽 너머에서.

금나라의 수도 요양에 거의 상주하게 된 최명길은, 호격에게 양해를 받아 숙소를 나서 자신만의 처소를 꾸렸다.

그곳 사랑방에서 최명길은 면식이 있는 상인과 마주했다.

상인이 먼저 물었다.

“오늘도 별고 없으신지요?”

“무탈하네.”

최명길이 짤막한 대답을 돌려주자, 상인은 품에서 두꺼운 종이로 봉인된 편지를 꺼냈다.

“이것은 상부의 서찰입니다.”

“수고하였네.”

상인은 그저 서찰 한 통만 전해주고는, 최명길과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시간만 축이다가 일어났다.

“살펴 가시게.”

“이만 돌아갑니다.”

상인이 사랑방의 문을 열고 나서자, 방대한 마당과 그 위에 세워진 갖은 별채들, 그 너머로 주변을 에워싼 행랑들이 펼쳐졌다.

최명길의 처소는 조선유상 상인들의 쾌척을 빙자한 본국의 지원으로 일대 장원들을 능가했다.

담장을 대신해 사방으로 행랑을 세웠고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창고와 하인들의 숙소, 식객과 손님들을 위한 별채를 겸했다.

그만큼 기거하는 사람도 많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개중에는 처소의 마련에 큰 도움을 준 조선유상 상인들이 많았는데, 당연히 실방사의 일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 상인을 떠나보낸 최명길은 봉투의 봉인을 풀고 낙서처럼 쓰인 서찰을 펼쳤다.

내용은 얼핏 보면 마구잡이로 붓을 휘둘러놓은 듯했다.

심지어는 아이가 장난친 것을 잘못 보낸 듯하기도 하였으니, 다만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필체 자체가 오해를 사기 쉬운 종류였다.

초서체草書體.

필자가 편한 대로 휘날려 쓰는 필체로, 특유의 생동감에 명필이라면 알아주지만, 십중팔구라면 필자 본인도 나중에는 못 알아본다는 악명 또한 존재했다.

이러한 초서체 서찰을 상인이 전달한 건 그저 농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다른 사람은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는 뜻.

최명길과 실방사는 그저 휘날려 쓴 듯한 초서체에도 나름의 규칙을 정립해두었고, 이에 유의한다면 드러내어도 남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전언이 가능했다.

“……으음.”

해석에 상당한 시간이 들어가는 건 여전했지만.

상부의 지시가 확인되고, 최명길은 서찰을 화로에 불사른 다음 잘게 부쉈다.

그리고 서안에 문방사우를 준비한 다음 호격에게 보낼 편지를 준비했다.

* * *

호격을 방문한 최명길은 금나라의 신하들 앞에서 섰다.

몇몇 이들은 군림하는 조선의 수족을 편치 못한 시선으로 마주했으며, 누군가는 적대적이기까지 하였으나 최명길은 당당하게 말했다.

“한께서는 쉬운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시고 오래 고민하시니, 소관이 심려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자 방문하였습니다.”

이에 곧바로 누군가가 나섰다.

“한께서 고민하고 심려를 얻으신 건 전적으로 그대가 제안했기 때문인데, 어째서 남의 일처럼 거론하시는 게요?”

“나라 사이의 중대사를 어떻게 소관 한 사람이 제안하겠습니까? 이는 아조의 일이니 공公을 수행하였을 뿐이고, 이번에 찾아뵌 것은 한께 오랜 후의를 입은 몸으로서 사私를 다하기 위함입니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어떻게 보증하겠소?”

“소관이 무엇으로 보증하겠습니까? 다만 영명하신 한께서 간언을 들어주시고, 가려 판단하시면 될 뿐입니다.”

부정하지 못할 정론이었다.

금나라의 신하들은 쓰게 침음하며 호격을 바라보았다.

“…귀빈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또한, 그를 무작정 의심하는 건 귀빈 한 사람에게만 결례인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낸 조선에도 예의가 아니다.”

이 역시 정론이었으므로, 금나라의 신하들은 다만 침묵할 따름이었다.

최명길은 그러한 광경을 보며 일이 이미 성사되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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