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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9화 (289/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9화

호격과 금나라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기회를 주었으니, 그대는 말해 보라.”

이로써 진언을 허락받은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

“금나라는 현재 한의 성공적인 원정과 정복으로, 밖으로는 중원과 통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안으로는 나라의 내실을 다질 인력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렇다.”

“이는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것과 같아, 이제는 날아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만 대금이 당장 문제를 직면하였으니 이는 여러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렇다.”

호격이 팔짱을 꼈고, 최명길이 마저 고했다.

“호랑이가 날개를 얻더라도 당장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여 굶주린다면, 어떻게 장차 중원을 더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조선이 원하는 건 오롯이 바다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인데 금나라는 바다에서 취하는 게 많지 않으며 중원과는 이미 육로로 연결되었으니 잃을 게 딱히 없습니다.”

“……흐음.”

“이는 서로가 크게 유리한 거래여서 상생하는 지름길인데, 소관으로서는 어찌하여 한께서 고민이 길어지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명길이 진언을 마무리했고, 금나라 신하들의 이목은 다시금 호격에게 향했다.

호격은 고민했다.

그는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과연 조선이 순순히 상부상조의 의도로 제안한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백날을 고민하여도 최명길의 말에 틀린 점은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호격과 금나라는 이미 거래 이전 단계에서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포로가 엄청난 수로 유입되면서 식량의 가격이 올라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방사가 여론을 호도하고 수입량을 속여서 상승세를 더욱 부추기고 식량 가격을 더욱 극단적으로 올려왔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니, 상부상조라 하여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러나 호격이 본능적인 감각과 무수한 사례로 흔쾌히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최명길이 질린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한께서는 최근 조선에 명나라의 사신이 방문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예. 명나라 또한 장강 이북의 상실한 영토에서 무수히 많은 난민이 내려와 식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양국의 오래된 우호를 거론하며 양곡을 내어줄 것을 간청하므로, 당장 응하지 않는다면 아조에서는 제안을 회수할 것입니다.”

“……!”

최명길의 말에 호격은 깜짝 놀라 신하들을 돌아보았으나, 신하들이라고 확답해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이역만리 요동에 있기는 호격이나 신하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조선에 명나라의 사신이 왔는지 갔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호격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귀인은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장담할 수 있는가?”

“친히 알아보신다면 금방 드러날 일입니다. 소관이 어찌하여 뻔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호격은 그새 말라버린 입술을 핥고는,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는 신하들을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오직 귀인을 신용하여, 조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한께서 뭇 사람의 우려에도 소관을 과감하게 믿어주시니, 오늘날의 이 선택은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을 감히 확언하겠습니다.”

후회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를 테니까.

* * *

“훗날, 아조가 금나라를 다룬 방식을 두고 왈가왈부가 생기지는 않을까 저어되옵니다.”

예조판서 구굉이 답했다.

그는 막, 왕에게 호격이 제안에 응했다는 치보를 전달한 참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요동에서도 바다와 인접한 100리里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조선이 제공해주는 것은, 실방사를 통해 요동에서 진행하던 몇 가지 공작을 중단하고 다시 양곡의 수출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출은 예전부터 계속 지속하는 중이나 잠시 실방사에 의해 재반출하던 것을 되돌려놓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재상 중에 적지 않았다.

이로써 얻는 국익이 워낙 분명하였으므로, 다들 쉬쉬할 따름이나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 같은 공작행위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공맹과 다른 성현들께서 계속 강조해온 도리가 있다.

유학자들은 한평생 이러한 도리를 배우고 익히며 외우고 실천하는데, 조선이 금나라에 행하는 행위들은 이러한 도리와 거리가 멀었다.

구굉은 그 점을 염려했다.

혹여 대왕의 성업에 소소한 누로써 남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에 왕이 답했다.

“예조판서께서는 사람이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

“금나라는 내가 즉위하기 전부터 아조를 침탈하고 정복하기를 바라왔습니다. 내가 유능한 장수와 뭇 백성들에게 힘을 빌려 가까스로 그들을 제압하였는데, 과연 여러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고 사직마저 멸망시키려던 원한을 가볍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왕은 구굉이 건넨 장계를 내려놓고서 말했다.

“만약 내가 더 재주가 뛰어났고, 나라에 힘이 있었다면 금나라를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오늘날까지 존속하여 죗값을 치르는 것은 오직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 내가 짐승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이해하였습니다.”

“장계는 의정부에 전달해주세요. 삼의정과 백관이 다 기뻐할 것입니다.”

“예.”

구굉은 왕이 건네는 과자를 받아먹은 뒤, 장계 또한 조심스럽게 건네받아 품에 넣었다.

“신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예조판서.”

왕의 치하에 구굉은 물러나는 예를 올린 뒤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가 가져온 소식에 왕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금나라는 뿌리부터 조선의 손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시간이 끌리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에는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심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나 이는 왕 혼자에게 달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만약을 염두에 둔 채 흐름을 지켜볼 따름이다.

금나라는 예상대로 움직여주었다.

이외에도 왕이 신경 써야 할 구석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앙법이 경기도에서 확산하며 조선에서 식량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의외의 부작용을 낳았다.

내수사는 대출 사업을 은행에 넘겨준 뒤 오롯이 왕가의 토지에서 얻는 수입으로 재정을 꾸려왔다.

그런데 식량 가격이 내려갔으니, 내수사의 수입 또한 줄어들었다.

내수사가 공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착취를 당해왔다.

은행을 설립할 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선혜법 시행을 위한 기반시설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원정을 일으켜 나라의 위상을 드높이고 중원과 이어지는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비축해둔 식량과 얼마 안 되는 다른 재물들을 끊임없이 빼앗겨왔다.

그러고도 아직 내수사가 몰락하지 않은 비결은 면세 혜택이 있는 대토지에서 해마다 거두는 막대한 곡식에 있었다.

그런데 이 밑천인 곡식의 값이 빠진다면 거듭 착취를 당해와 취약해진 내수사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국가의 대사와 공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곶감 빼먹듯 마음대로 써먹을 쌈짓돈이 있어야 하는데, 내수사가 무너지면 안 되지…….’

내수사의 효용은 이미 조선이 걸어온 길과 결과물로 입증된 바다.

애초에 국가의 재정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막대한 대기금의 효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위중함을 알고 옳은 곳에만 쓴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나라를 구할 전가의 보도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마침 왕에게는 안배해둔 수단이 있었다.

실현 가능성이 크면서 이익 또한 매우 큰 수단.

이는 고래古來 많이 시도되었으나, 여러 현실적인 한계에 부닥쳐 소소한 성과와 흔적만을 남겨왔을 뿐 크게 성취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는 두 세기도 더 전에 개발되어 오늘날에는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이용되는 것이기도 했다.

“밖에 아무나 있습니까?”

왕의 부름에 문 너머에서 편전내시가 답했다.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최 상선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예에. 바로 불러오겠사옵니다.”

* * *

그로부터 반 각도 안 되어, 최 상선이 부름을 받고 나타났다.

최근 최 상선은 내수사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은퇴와 함께 내정된 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인생을 펼칠까 고민하고 있었다.

다만 대왕을 즉위와 함께 오랫동안 모셔왔고, 대우와 사람이 좋아 미련이 많은 상태였다.

“부르셨사옵니까.”

최 상선이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고, 왕은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일렀다.

“편하게 앉으세요. 오늘은 드릴 논의가 있습니다.”

“예에.”

최 상선은 방석에 무릎을 꿇었다가, 재차 왕의 강권을 받고서 마지 못하는 척 편하게 앉았다.

이러한 경우가 이미 수 년 째라 이제는 의례적인 절차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왕이 권했다고 곧장 편하게 앉을 수는 없는 노릇.

재차 강권해주는 대왕의 은혜가 망극할 따름인데 맞은편에서 왕이 일렀다.

“예전부터 내수사에서는 나와 사직을 위해 희생한 게 많아 오늘날에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는데, 내가 내수사를 소생할 방법이 있으니 상선께서는 들어보기를 바랍니다.”

“경청하겠사옵니다.”

“상선께서는 활자와 인쇄기를 알고 계시는지요?”

“예에.”

“내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도입하여 내수사를 소생할까 합니다.”

서양과 비교해서는 이미 두 세기나 늦어버린 시기이나, 실상 금속활자와 인쇄기술은 동양에서 먼저 개발되었다.

후대까지 현존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인데 제작 시기가 유럽보다 두 세기나 빨랐다.

그런데도 동양, 특히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대대적으로 확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언어에 있었다.

유럽의 언어는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최소한의 종류만으로 활자를 다 구성할 수 있으나 한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외에도 상업의 발전이 상당히 미진했던 점, 동양의 닥종이는 서양의 종이보다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 또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왕에게 아무런 장애가 아니었다.

가장 중대한 맹점인 언어 또한 세종대왕께서 언문을 개발하여 한문보다 훨씬 활자판을 갖추기 쉬운 여건이 마련된 상황이었다.

“한문을 대신해 언문을 이용한다면 활자의 주조와 이용에 수고로움을 극도로 덜 수 있으며, 종이 또한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방대한 토지 중 품질이 떨어지는 땅에 닥나무를 심는다면 어렵지 않게 조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닥나무를 종이로 가공하는 노고는 일단 차치한다면 말이다.

“일단 인쇄만 할 수 있게 되면 내수사의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당장 아조는 인쇄기술이 미진하여 책의 제작을 거의 필사에 의존하니, 책의 가치가 저택에 필적하지 않습니까?”

분량이 적어 미래에서는 200장짜리 한 권으로 묶이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오늘날 조선에서 구하려면 각기 양민의 수년 치 수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 금속활자와 인쇄기가 가진 잠재력의 명백한 증거였다.

서양에서는 인쇄술의 발전에 불을 붙인 서적으로 성경이 있다면 동양에는 사서삼경이 있는 것이다.

“학문과 출세를 바라는 자는 무수히 많은데, 십중팔구는 자신만의 책을 마련하지 못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또 때로는 돌려가며 익히므로 여러 학생學生이 난처할뿐더러 국가적으로도 인재의 육성이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개발하고, 내수사에 도입하여 독점케 한다면 무궁무진한 부를 창출하면서도 국익 또한 실현하는 셈이었다.

“더욱이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장인들은 이미 다 갖춰진 상태이지 않습니까?”

“아……!”

최 상선은 곧바로 납득하며 탄복했다.

서양에서 인쇄기를 개발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부친이 조폐국의 관리로 화폐를 주조하는 기술자였다.

구텐베르크는 그러한 부친에게서 야금기술을 물려받아 금속활자를 제작하고 인쇄기를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마침 주조소를 설치하고 상평통보를 유통하고 있으므로, 쇠로써 밥반찬도 만들어 먹을 뛰어난 야장이 많았다.

“성상께오서 내수사가 난처한 때를 맞아 공명孔明의 주머니를 풀 듯이 비상한 계책을 하교해주시니, 신은 매우 놀라우면서도 거듭 탄복할 따름이옵나이다. 이 일은 내수사에 즉각 전달하여 실행하겠사옵니다.”

이에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상선께서는 호들갑이 심하십니다. 금속활자와 인쇄기의 도입을 거론한 건 최 상선에게 지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현과 실익이 모두 가능할지를 문의하기 위함이니, 그 점부터 고려해보시지요.”

“경청하면서 이는 반드시 성사할 수 있는 대업이라고 확신하였으므로 거듭 탄복한 것이옵나이다. 성상께서는 부디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렇다면 상선께 믿고 맡기겠습니다.”

최 상선은 기쁜 얼굴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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