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0화
내수사를 소생하기 위한 대업이 착수하자, 왕은 세자를 불렀다.
“아바마마.”
세자는 근래 들어 부왕이 대해주는 것에 부담을 느껴, 서궐에 반쯤 칩거하다시피 근신하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를 불러낸 왕이 일렀다.
“세자 왔구나. 편하게 앉아라.”
“소자가 어찌 감히 아바마마 앞에서 편하게 앉겠사옵니까.”
“허. 세자는 두 번째 사춘기라도 맞았느냐?”
“…….”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그게 외려 더 이상해 보이는 법이다. 이 아비는 세자를 편하게 대하고 싶으니, 세자는 편하게 앉아라. 신하들도 내게 두 번 권하게 하지는 않는다.”
“예, 아바마마.”
세자가 자세를 고쳐 앉자 왕이 일렀다.
“세자는 내수사의 세력이 예전만 못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최 상선을 불러 내수사를 소생할 방법을 의논하였는데, 합의한 바가 있어 세자에게도 도움을 구하고자 한다.”
“소자가 무슨 재주로 아바마마의 대업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맡겨만 주신다면 반드시 성취해내겠사옵니다.”
“든든하구나.”
왕은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일렀다.
“내가 최 상선과 합의한 내수사 소생의 방법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도입하는 것이다. 활자는 주조사의 야장들이 만들 수 있고, 인쇄에 필요한 종이는 내수사의 토지에서 닥나무를 길러 수급하면 되는데, 유일한 걸림돌이 바로 인쇄기다.”
조선에서는 이따금 목판으로 책을 인쇄했는데, 과정이 매우 번잡하고 수고스러워 작업 속도 또한 느렸다.
그 방법이란 책을 모두 해체하여, 쪽수에 맞춰 미리 준비해둔 반듯한 목판에 부착해두고 각자장이 글자를 따라 일일이 깎아낸 것을, 먹을 묻히고 종이를 깔아 세심하게 문질러서 완성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목판의 재질이 나무라서 물기에 매우 취약한데 인쇄를 위해 거듭 먹물을 묻힌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인쇄를 마친 다음에는 목판이 뒤틀리고 상해서 재활용이 불가능해지는데, 금속활자는 이러한 한계를 대체할 수 있었다.
“금속활자를 사용하게 되면 활자만 아니라, 이를 고정할 활자판과 인쇄기가 정교해야 한다. 활자판과 활자가 정교하지 못해 아귀가 맞지 않으면 인쇄할 때마다 활자가 흔들리고 이동할 테니까.”
활자가 흔들리고 이동하게 된다. 이를 재배열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활자판과 활자가 정교하여 잘 고정되면, 기계를 이용해 단순한 작업으로 빠르게 인쇄할 수 있다.”
금속활자는 목판과 다르게 내구성이 뛰어나므로, 마찬가지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쇄기를 동원하더라도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활자와 활자판을 어떻게 만들어 정교하게 고정할 것이며, 인쇄기 또한 장치를 어떻게 설계해야 최대한 적고 단순한 품으로 인쇄할 수 있을지 구상해야 한다.”
세자는 그것이 자신이 맡게 될 일임을 깨달았다.
“이 아비는 당장 공사다망하여 활자와 인쇄기의 개발에는 힘을 쏟기 어려운데, 신하들에게 맡긴다면 내수사가 소생하는 효험을 잃게 될 수 있으니, 세자에게 맡기고자 한다. 괜찮겠느냐?”
“아바마마의 성업에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소자는 오히려 기쁘옵니다.”
“마침 세자가 거동을 줄이고, 형제 중 머리가 좋은 녀석이 있으니 함께 협력하여서 우애도 다지고 업적도 남기도록 해라.”
물론, 머리 좋은 녀석이란 천문대에 상주하며 밤하늘을 연구하는 막내 인평대군을 뜻했다.
이미 인평대군은 전임 영의정인 이원익과 협력하여 천문경과 천문판이라는 정교한 장치를 개발해냈는데, 이때 이원익에게 과한 도움을 받았다며 자존심이 꽤 상한 채이므로 적극적으로 나서주리라.
그리고 세자는 장차 왕이 되어 내수사의 주인 될 사람으로, 인쇄술을 도입해 공익을 달성하며 동시에 내수사도 부활시킨다면 궁궐 안팎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질 터였다.
이러한 왕의 복안은 세자도 능히 짚어낼 수 있었다.
지난번 총검을 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왕은 이미 속으로 생각해둔 게 있지만, 자식의 장래를 위해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업적을 양보해주니 세자로서는 망극하고 또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심정을 드러내는 건 부왕이 원치 않는바.
세자는 머리를 조아리고서 답했다.
“예, 아바마마.”
* * *
금속활자와 인쇄기의 도입이 대업의 첫 단추라면 출판과 판매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오히려 쉬운 문제들이었다.
기술의 실현은 권력자인 왕이 바라고, 막강한 재력을 가진 내수사가 사활을 걸었으며, 때마침 유능한 장인들도 충분했다.
책의 매각은 사서삼경의 수요가 하늘을 찌르니 다양화나 판매전략의 구상에 공을 기울이지 않아도 불티나게 팔릴 예정이었다.
진정한 문제는 중간 지점에 있었다.
기술을 실현해도, 책을 살 사람이 줄을 섰어도 막상 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다 소용이 없다.
그리고 책을 대대적으로 출판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종이가 필요했다.
이러한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는 내수사의 대토지를 활용해 대량 재배하기로 되었으나, 이를 종이로 가공하는 건 별개였다.
그저 나무껍질에 불과한 닥나무의 껍질을 종이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수고스러운 작업을 거쳐야 했다.
닥나무를 종이로 만들려면 베고 껍질을 벗겨내, 이를 말리고 삶은 뒤 이물질을 걸러내고 잘게 찧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닥풀과 함께 물에 풀어서 고생스럽게 잘 뒤섞은 뒤에 대나무 발을 늘어뜨려 물을 떴다가 흘리기를 한참 반복해 발에 섬유를 켜켜이 안착시키면, 비로소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졌다.
이 중에 수고롭지 않은 과정이란 하나도 없다.
보통 고된 일이 아니므로 조선에서는 오래전부터 제지製紙하는 고생을 전국의 사찰에 전가해왔다.
관영 조지서造紙署를 태종 때부터 설치했고 경京 내외의 장인들을 배속시켰지만, 원료 부족에 더불어 장인들의 공역公役에 대한 반감으로 종이의 생산량과 품질이 모두 떨어지는 탓이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고자 한들 마음처럼 되기가 쉽지 않은 참이었는데 때마침 맞물리는 게 있었다.
“전하.”
최 상선이 말했다.
“이앙법 확산에 발맞춰 족답식 탈곡기가 도입된 뒤 백성들이 탈곡하는 고생을 크게 덜었는데, 이제는 백성들이 도정하는 고생을 덜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모름지기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지요.”
“그러하옵니다.”
“한데, 상선은 어찌하여 그것이 내수사를 위한 사업과 연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왕의 하문에 최 상선은 그나마 공다운 공을 세우는 듯해, 기쁜 얼굴로 답했다.
“백성들의 도정하는 고생은 물레방아의 방아질을 이용해 크게 덜어줄 수 있는데, 이것이 마침 나무의 껍질을 가공하는 과정 중 가장 수고스러운, 껍질을 잘게 찧는 것과 상통하옵나이다.”
그동안에는 지장紙匠이 닥나무 껍질을 일일이 두들겨서 찧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질기디질긴 나무껍질이 방망이질 몇 번 한다고 찢기겠는가.
종이 만드는 여느 절차들과 비교하여도 유난히 사람 잡는 과정일 수밖에 없는데, 무한히 제공되는 수력을 이용해 방아질을 한다면 껍질을 매우 쉽게 찧을 수 있었다.
곡식 도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틈틈이 섞어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수력이 다 해줄 테니까.
“이런!”
왕은 감탄하고는 일렀다.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상선이 상책을 내어주니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습니다. 상선이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첫 단추만 끼우고 다 나아가지 못해 전전긍긍할 뻔했어요.”
왕이 두텁게 칭찬해주니, 상선은 좋은 기분으로 겸양했다.
“이는 전하께옵서 공익을 위해 비책을 강구하시니 사세가 자연히 부응한 것인데, 어찌 소관이 나선 덕이겠사옵니까? 오롯이 전하의 홍복일 따름이옵니다.”
“나 한 사람에게 홍복이라 일컬어질 운수가 있다면, 최 상선이 가까이 있어 나를 틈틈이 도와주는 것이지요. 상선은 민망한 겸양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상께서 하교하시거늘 어찌 두말을 하겠습니까. 명령은 공손한 마음으로 받들어 대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완수해내겠사옵니다.”
최 상선은 왕이 건네주는 과자를 받아먹은 뒤 뿌듯한 감정으로 편전을 나섰다.
* * *
오곡五穀과 백과百果가 여물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 왔다.
한 해의 흐름이 왕성해진 끝에 완숙하여 날이 차갑게 변하니, 백성들은 여름이 물러나고 수확을 앞둔 데 기뻐했다.
그러나, 모두가 백성과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했다.
여름 무더위 때부터 기력을 잃고 수척해지기 시작한 대비大妃가 가을이 되어서는 낙엽을 맞이한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지니, 왕이 심상이 편치 않아 궁궐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이었다.
경운궁 석어당.
대비는 거의 한평생을 기거해온 곳에서, 마침내는 병석까지 깔아놓은 채로 생의 황혼을 보내고 있었다.
“주상은 막중한 나랏일이 많을 텐데도, 이렇게 차치하고서 곧 죽을 나를 지키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대비가 병석에서 눈을 감은채로 말했다.
여느 사람이 보통 말할 때와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그저 바람만 새는 듯했다. 누가 보더라도 곧 죽겠다는 말에는 한치의 과장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이 답했다.
“나랏일은 이미 세자와 신하들에게 다 맡겨놓았으니, 제게 남은 막중한 일은 이렇게 대비마마의 곁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세상의 일이란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귀를 열어두고 오가는 사람은 막지 않으며, 국사가 시급하면 개의치 말고 즉시 정무를 보도록 하시오.”
대비는 몇 번 숨을 헐떡이고는 덧붙였다.
“내가 이러고 있어도 일의 경중輕重마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혼미하지는 않소. 열성께서 물려주신 대업이 있는데 곧 죽을 사람을 위해 망쳐서는 내가 저승에서 조상을 뵐 낯이 없을 것이오.”
“새겨두겠습니다.”
왕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고, 대비는 안도한 듯 깊게 숨을 뱉어냈다.
“공주 부부와 손주들은 정녕 부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족의 병문안은 이미 질릴 정도로 받았고, 지금은 주상이 곁을 지켜주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소. 또한, 곧 죽을 사람의 탁기濁氣가 어린 손주들에게 옮는 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알겠습니다.”
대비는 재차 깊게 숨을 토해내고는 조용해졌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다.
대비는 눈을 감은 그대로 조용했고, 왕은 조심스럽게 손끝을 뻗어 대비의 호흡을 확인했다.
왕은 손끝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미약한 호흡을 느끼고는 내심 안도하며 자세를 다시 공손히 고쳐 앉았다.
사방이 계속 고요했다.
* * *
조용히 방문한 내시가 왕에게 속삭였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 끌리는 소리를 주의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극도로 세심한 내시의 손길로 열리는 방문을 지나 석어당을 나섰다.
석어당의 뜰에는 삼의정이 다 모여 있었다.
“전하…….”
삼의정은 조회를 앞두고 여느 중신들처럼 미리 입시하고서 궐의 소식을 알아보았는데, 대왕은 여전히 석어당에서 대비의 곁을 지키는 중이라 하므로 이렇게 세 사람이 찾아온 것이었다.
예를 올리는 삼의정 너머로 박명이 밝았다.
그 광경에 왕이 일렀다.
“바깥이 어두워 아직 밤인 줄 알았는데 시각이 벌써 이렇게 되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에 영의정 박홍구가 조용히 말했다.
“신들이 성상의 거동에 훼방을 놓았으니 송구스러울 뿐이옵니다. 분부만 내려주신다면 정전에 모인 관리들을 해산시키겠사옵니다.”
“…공사公私의 경중은 분명하지만, 모후母后의 용태容態가 위중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박홍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들은 물리겠사옵니다.”
“아닙니다. 당분간은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기겠으니, 경들은 국사를 세자와 함께 논의하여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
삼의정은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실권을 후계자에게 임시로 맡겨보는 것으로, 본래 후계자를 교육하고 시험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선위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후계자와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엎드려 절 받아 구차하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흔히 남용됐다.
물론, 왕의 평소 인품과 세자를 대하는 방식, 주변의 상황이 모두 대리청정의 거론에 복심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과거에 선조라는 부끄럽고 민망한 전례가 있으니 삼의정이라고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혹여 대리청정을 지시한 것으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절대 살려놓지 않을 것이니, 삼의정께서는 부디 받들어 조용히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진지하게 거듭 이르며 확언과 함께 엄히 경고하니, 박홍구는 이하 이상의와 남이공과 함께 예를 올린 뒤 말없이 물러났다.
그렇게 뜰이 비워지자, 왕 역시 말없이 다시 석어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