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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91화 (291/380)

인조, 명군이 되다 291화

신하들이 조회를 위해 시립한 가운데.

세자가 용상 앞 임시로 설치해둔 의자에 앉고서 말했다.

“부왕께서 대리청정을 맡겨주셨는데, 나는 단지 자리만 지킬 따름이지 국사를 번거롭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신하들도 바라는 바였다.

현 왕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전왕과는 다르게, 누구도 세자가 이르게 왕위를 물려받는 건 원치 않았다.

영의정 박홍구가 답했다.

“다행히 나라는 당장 시급하고 위중한 장애를 직면하지는 않았는데, 다만 가을을 맞이하고서 추수를 앞둬 말단에서는 여염부터 관청까지 한참 번잡한 상황이옵니다.”

“조정에서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요.”

“지금은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나는 부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용상의 앞을 지키며 사세를 주시하겠습니다. 각 관청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전대로 일해주기를 바랍니다.”

“예에.”

이어진 조회에서는 각 관청 장관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세자는 경청할 뿐 지시하지는 않았으며, 중신들 또한 분쟁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거론을 삼갔다.

서로가 눈치를 잘 보았으므로 세자의 첫 대리청정은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조회가 잘 마무리되자 세자는 회의를 파했고, 신하들은 예를 올린 뒤 해산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리고서 흩어지는데, 한 사람만은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공조판서 김류였다.

* * *

“영상께서는 보셨습니까?”

의정부 본청 정본당에서.

우의정 남이공이 운을 뗐다.

“무엇을 말이요?”

박홍구는 모른다는 듯 되물었고, 남이공은 재촉하듯 답했다.

“공조판서 말입니다.”

“공판이 어땠단 말이오.”

“전하께서 대리청정을 명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안색이 영 좋지 않았는데, 조회 때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흐음.”

박홍구는 구태여 의식하지는 않았던 부분이다.

김류와는 업무 외적으로 접점도 없거니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좋은 접점이 있을 관계도 아니었다.

반정 직후만 해도 김류는 서인의 영수이면서도, 반정공신들의 대장이었으니까.

박홍구는 반대로 대북의 원로로서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다.

독보적인 왕의 존재가 북인과 서인이라는 형태로 분열된 조정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왕이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니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조정은 도당과 정당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양분됐다.

이전부터 제약 따위는 없었던 왕의 거침없는 행보가 전왕을 공공연히 욕보이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자 이를 두고서 백관이 각기 다른 입장으로 양분된 것이다.

전왕의 시대를 겪어 금상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중신들은 대개 대왕을 지지하는 정당에 몸을 담았다.

박홍구는 의정으로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대놓고 당색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개인적으로는 확실하게 정당의 편이었다.

그리고 김류 또한 정당의 중진이었다.

“공조판서에게 무슨 복심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람은 크게 연연치 않으려 하오.”

“어째서 말입니까?”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과, 그중에서도 주역인 공신들이 언젠가부터 무용해진 게 누구 덕이겠소? 대왕을 제한다면 말이오.”

“……공조판서지요.”

김류는 서인과 반정공신들의 대장이면서도, 언젠가부터 왕의 행보를 고분고분 쫓아왔다.

박홍구가 일렀다.

“서인 중 일부 반역한 독종이 대왕의 성심에 맞서 간계를 획책하다 모조리 처분되어, 달리 응할 사람이 없는 탓도 있겠으나 공조판서의 본심부터 그들과는 부합하지 않았기에 조정이 재편되는 날까지 독종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요.”

“으음.”

“이 사람은, 과연 그랬던 인물이 대리청정을 두고 불만을 품은들 그게 나라에 해악이 있을까 싶소이다.”

박홍구의 대답에 남이공은 일견 공감하면서도, 예조판서 시절 얻은 버릇을 포기하진 못했다.

“그래도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옛말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지요. 해악이 없더라도, 복심으로 어떤 오해가 빚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남이공의 주장에, 맞은편에 앉은 좌의정 이상의도 끄덕였다.

“우의정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정녕 해악이 없다면 공조판서도 말하는 것을 크게 꺼리지는 않을 터이니 불러서 본심을 물어보시지요?”

“그게 다른 두 분의 의견이라면…….”

박홍구는 고개를 끄덕이곤, 밖을 향해 사람을 찾았다.

* * *

잠시 후 김류가 정본당을 찾아왔다.

세 의정이 모두 일어난 채로 맞아주자, 김류는 범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고서 물었다.

“삼공三公께서는 어인 일로 소관을 부르셨습니까?”

이에 박홍구가 답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공조판서를 불렀소이다.”

“하문하시지요.”

“공조판서께서는 조회에 참석하시는 와중에 기색이 꽤 편찮으신 듯했는데, 무슨 염려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신 게요?”

“큰일은 아닙니다.”

“사연이 있기는 하다는 말씀이구려.”

삼의정이 이어질 대답을 기대하자, 김류는 다소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이는 소관의 일이니 대신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겠소? 공조판서는 나라의 중신이고, 중임을 맡고 있으니 사소한 근심거리라도 덜기를 바라는 게 이 한 사람이 바라는 바요.”

“…….”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두 분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우리만 진솔한 대화를 나눠봅시다.”

박홍구가 좌우를 돌아보자, 이상의와 남이공 모두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났다.

그리곤 자리에서 빠져나가니, 회의실에는 오직 박홍구와 김류만이 남게 되었다.

박홍구는 빈 좌의정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음.”

김류는 선뜻 응하지 못하고 주저했으나, 박홍구가 좌의정 자리를 향한 팔을 거두지 않으니 김류는 마지 못하는 척 다가가서 앉았다.

“이제는 좀 말씀할 기분이 드시오?”

“이것은 전하와 소관 한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더더욱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박홍구가 재차 캐묻자 김류는 질린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개인적인 일인데, 대리청정으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고 이렇게 불려와 추궁까지 당해야 한단 말인가.

김류는 그 기분을 한껏 담아서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고 싶지만, 영의정 대감의 체면과 신용을 생각해 제의하겠습니다.”

박홍구가 문 것을 쉬이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자존심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박홍구는 당당했다.

“기탄없이 말씀하시오.”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소관의 진심을 곡해하지도 않으시겠다면 사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쪽도 당연한 일이요.”

김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답했다.

“영의정 대감께서는 우습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오래전 전하께서는 이 사람을 불러 나라에 잘 헌신해준다면 의정까지 제수하겠다는 약조를 해주셨습니다.”

“……으흠.”

꽤나 노골적인 속사정이었으므로, 박홍구는 어째서 김류가 대답을 회피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내내 이미 의정이라도 된 듯 거들먹거렸던 이유 또한 말이다.

김류는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이 사람이야, 본디 나라와 전하께 헌신할 생각이었으니 굳이 사양할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마다한다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공조판서의 말씀이 옳소이다.”

박홍구는 애써 김류를 달랬다.

“이 사람 또한, 전하께서 내려주신 과분한 은혜로 여명餘命을 보전하고 분수에 넘치는 중임을 맡았으니 판서께서는 거론한 데 연연치 마시오.”

“……크흠.”

“그러면, 저하가 대리청정하게 된 데 불편함을 느낀 건 대왕과의 약조가 이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소이까?”

“그렇습니다.”

“아직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일 때이시고, 저하 역시 복심이 있지 않은데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이오.”

이에 김류가 미간을 찌푸리며 따졌다.

“영상께서는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도 바보는 아닙니다. 전하께서 언제 선위를 하시더라도 이상치 않은 분위기 아닙니까?”

“…음.”

김류의 추궁에 박홍구가 입맛을 다셨다.

가까운 시일에 선위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류가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원래 공사의 구분을 엄격히 하시는 분이지요. 대비께서 편찮으신 것이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회를 거르고 세자에게 대리청정까지 맡기실 분은 아닙니다.”

그게 이유가 조금은 될 수 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곁가지일 뿐이다.

김류는 왕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치세 초반에는 본인부터가 왕의 의사에 휘말려 여러 사람과 함께 대비를 압박하는 데 쓰였고, 가장 앞장섰던 김자점을 토사구팽하는 일까지 떠맡았으니까.

그리고 그 일을 오래지 않아 왕명으로 세자에게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오롯이 대비의 편찮은 용태로 공무를 마다한다는 건 김류가 생각하는 왕으로선 불가능했다.

이는 박홍구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내부의 근심거리인 이괄을 먼저 바깥으로 휘둘러, 조세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지방 관리들을 압박한 뒤 독살해버림으로써 일거양득을 얻었다.

우환도 제거하고, 살얼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개혁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이괄의 아들 이전까지 이용해 흥안군을 치게 함으로써, 독살의 배후를 왕족으로 몰아 전왕 시대 종친들에게 내려진 특권을 회수하기까지 했다.

취할 이익이 있다면 골수까지 빨아먹는 게 바로 대왕인 것이다.

당장 조정의 중신들이 이러했던 시절을 간과하는 건, 대왕이 오래전부터 그러한 힘을 내부가 아닌 바깥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김류가 말했다.

“성상의 복심이 무엇이건, 갑자기 세자가 선위라도 받게 되면 이 사람은 참으로 당혹스럽지 않겠습니까?”

“……혹여, 약조가 이뤄지지 않게 된다면 판서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크흠……, 뭐.”

김류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별수 있겠습니까? 실망만 하고 말겠지요.”

세자는 이미 왕의 단호한 교육으로 온갖 부정한 수단을 몸에 익힌 채였다.

본의는 그러한 수단에 의존하지 않기를 바란다 치더라도, 선택지가 그것밖에 남지 않는다면 강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읍참마속泣斬馬謖을 행할 터.

그렇게 준비되고 잘 배운 왕을 상대로 계략을 시도한다는 건 야망의 실현 자해에 가까웠다.

이에 박홍구가 답했다.

“성상의 복심이 무엇이고, 또 어떠한 미래를 그리시건 간에…….”

박홍구는 말끝을 한참이나 늘어뜨리다가, 김류의 눈빛에 의문이 감돌 즈음 겨우 덧붙였다.

“이 사람은 성상께서 신용을 잃는 건 바라지 않소이다. 어떻게든 판서의 기대를 실현할 수 있도록 힘써 보겠소.”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소관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고 증명할 증좌도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여러 사람과 마찬가지로, 판서가 허투른 소리를 가볍게 할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음.”

김류는 짧게 침음하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영의정 대감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결과야 어떻든 감사할 따름입니다.”

박홍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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