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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92화 (29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92화

대비와 처음 마주했을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 같은 상황이었다.

과거 대비는 영창대군을 잃고 정명공주와 장대한 세월 갇혀 지낸 것에 독기가 가득했고, 어떻게든 광해군에게 복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독기라면 당시의 자신도 만만치 않았다.

비열한 인조 망령에게 보여주고 복수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이쪽도 호락호락 당해주지는 않겠다고 결심하고서 독기를 품었으니, 이독제독以毒制毒하는 형세가 되어 대비의 독기가 다스려지고 왕실이 안정됐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대비의 원하는 장대한 세월 켜켜이 쌓여왔으니까.

강대강으로 맞서 기세를 꺾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명공주의 행복을 최대한 도와준 게 다행히도 주효했다.

대비는 일찍이 영창대군을 잃었고, 그런 대비에게 자식과 자식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또한, 대비에게는 ‘가장 가까운 적’을 의미하게 되었을 가족의 개념을 원래대로 되돌린 것 또한 안정에 한몫했으리라.

과거의 대비는 자신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내세워 세자로 이미 책봉된 광해군과 후계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그 끝에 패배하여 지독한 응보를 당했으며, 막상 승리를 거둔 광해군 또한 저열한 아비와 치기 어린 양모, 못난 형에 의해 괴로워해야만 했다.

이때의 왕실은 정상적인 가정은 아니었다.

아무리 권력이 비정하고, 왕은 나라와 백성을 책임진다는 막중한 의무가 있다지만, 혈육들이 다 다른 혈육을 모조리 원수로 여김은 과하게 극단적이지 않은가.

나는 그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대비에게 보여주고자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타인의 정체성과 가족에 익숙해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끝내는 왕실의 식구들을 불러 함께 북악산에서 난로회煖爐會를 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비는 언젠가부터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기는 다 가신 채로, 사소한 소일거리와 일상에도 기뻐하게 된 것이다.

기실 대비는 주변의 여러 인물 중에서도 마음을 돌리는 데 가장 공을 들인 사람이었다.

그러니 인연에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가까이서 임종을 지킨다는 게 그다지 유쾌할 수는 없었다.

“주상.”

대비가 힘없이 말했다.

“내가 이제는 잠시도 더 살지 못할 듯하오.”

“…소자가 어떻게 해드려야겠습니까?”

“공주의 가족을 잘 대해주고, 세상에 홀로 남으실 늙은 나의 어머니를 보살펴준다면 여한은 없을 것이오.”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주상.”

대비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왕은 손끝을 뻗어 대비의 호흡을 확인했다.

난을 감고서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였으나 느껴지는 게 없었다. 그러나 왕은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왕이 석어당을 나선 건 그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난 뒤였다.

* * *

추수를 지나, 계절은 겨울의 절정에 이르렀다.

날씨는 지독한 한풍寒風과 대설大雪이 어우러져 실내의 사람조차 벌벌 떨 정도였는데, 그런데도 여막廬幕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전하.”

영의정 박홍구가 여막을 찾았다.

조심스러운 방문이었다.

왕대비가 승하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왕은 좀처럼 국정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동안은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아 공석을 메웠고 사안 또한 가볍지 않았으므로 섣불리 간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만 여막을 거두시고 다시 대전에 듭시옵소서. 옥체가 상할까 저어되옵니다.”

혹한의 날씨였다.

“영의정.”

“예, 전하.”

박홍구는 입술을 말고서 이어질 말을 각오했다.

왕이 답했다.

“그 말씀 따르지요.”

“……망극하옵니다.”

박홍구는 여막을 나선 왕을 뒤따랐다.

왕대비전에서 대전까지는 지척이었기에 두 사람은 금세 대전의 침소에 다다랐다.

문을 열자 따스한 온기가 화악 번졌다.

대전은 오랫동안 주인이 찾지 않았으나, 내관들이 왕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난방을 해왔다.

박홍구는 안도하고서 왕과 마주 섰다.

“음.”

왕은 맹추위에 빳빳하게 얼어버린 얼굴을 쓸어내리고서 말했다.

“세자는 어떻습니까? 나라의 운영은 잘하고 있습니까?”

“타고난 자질과 성상께서 잘 가르치신 덕으로 차질은 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오나, 어찌 성상만 하겠습니까.”

“나라가 가장 바쁠 때 탈이 없다면 중간은 한다는 뜻이로군요. 내가 아주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괜히 섬찟해진 박홍구가 말했다.

“신과 백관만 아니라 세자 역시 전하께옵서 하루속히 복귀해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사옵니다.”

“허어.”

“전하……. 신들의 간절한 여망輿望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박홍구가 간청하자 왕이 질색했다.

“내가 꼬박 석 달을 쉬고 나니 이제야 사람이 소생할 듯한데, 영의정은 복귀를 채근해 나를 다시 못 살게 만드시렵니까?”

“……예?”

박홍구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빈전 앞을 지킨 것을, 애도나 세자에게 선위하기 위한 밑바탕으로만 생각하셨습니까?”

“…예에.”

“그 두 가지도 이유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가장 큰 본의는 휴식을 가지고 싶어서였어요.”

다 망해가던 나라를 정상적으로 끌어올린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환경까지도 좋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조심스럽고 세심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하다면 극단적인 방법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치명적인 만큼, 잘못 풀렸을 때는 어떠한 역풍으로 닥쳐올지 모르니 내내 전전긍긍해야 했다.

관리와 감독이 필요한 건 조정만이 아니었다.

내수사를 비롯해 은행과 주조소를 설립하고, 총체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지켜보며 조율해야 했다.

나라가 부강해질수록, 어쭙잖은 방식으로는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우니 일의 규모도 갈수록 방대해졌다.

그렇다면, 과거의 개혁이 모두 완비되어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선혜법은 이제야 전라도에 절반쯤 도입되었을 따름이다. 기반시설의 확충은 거듭된 경험과 대대적인 투자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대신 세곡을 옮기기 위한 막대한 수운 수요가 발생했다.

이에 은행과 내수사를 통해 여러 상단과 연합하여 범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고 있으나, 여전히 수운의 공급은 부족했다.

이런 마당인데 전라도의 나머지 고을에서 선혜법을 시행하고, 이앙법까지 대대적으로 확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갈수록 사업이 쌓이고 늘어나니 의정부서사제를 재도입하고 내수사와 은행에 유능한 사람을 배치해두어도 좀처럼 수고가 줄지 않았다.

“이래서 왕이 단명하는구나……, 싶던 차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여막에 들어가고 나니, 이럴 수가. 다시 나오기 싫지 않겠습니까?”

왕의 솔직한 고백에 박홍구는 난처했다.

영의정에 오르고 나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도달한 건 잠깐 기쁠 뿐이고, 일은 배로 늘어나서 왕의 심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전하…….”

“말씀하세요.”

“신 역시, 성상의 노고와 피로를 모르지 않는데 복귀를 강권하였으니 낯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이에 왕이 실소했다.

“아닙니다. 나 역시, 이제는 과로가 아니라 얼어서 죽겠다 싶던 참이라서 영상이 청해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박홍구는 꾸벅 허리를 숙여 겸양하고는, 그 상태로 입술을 말았다.

사실, 그가 왕에게 제안하고 싶었던 건 간청을 없던 일로 할 테니 자신도 사직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왕이 신묘한 재주로 읽어낸 것일까?

그새 손바닥을 뒤집어서 권해주어 고맙다 답하니 박홍구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한 말이 영상의 기대와는 달랐나 봅니다?”

“아, 아니옵니다.”

“아닌 것 같은데…….”

“…크흠.”

“영의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내가 이미 짐작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왕이 자신하니 박홍구도 민망함을 애써 떨쳐내고서 응했다.

“실은, 신이 연로하고 병들어서 혼미한 육신으로 영의정의 직분을 감당한지라 일이 벅찬지 오래되었사옵니다.”

“사직을 바라십니까?”

“그러하옵니다.”

비단 직분이 벅차서만은 아니었다.

박홍구는 약조해둔 것이 있었다.

공조판서 김류가 오래전부터 왕에게 의정으로 삼아주겠다고 확언을 받아두었는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본디 박홍구와는 완전히 별개인 사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밀한 사정을 듣고도 마냥 모른 체할 수 없었으므로 김류에게 도와주겠다고 약조했던 것이다.

때마침 왕 또한 여막에 들게 된 사정을 이용해서 아예 석 달을 내리 놀았다고 하니, 박홍구로서는 부럽기도 하거니와 깨우친 바가 있어 똑같이 일거양득을 취하려는 것이었다.

김류를 의정으로 만드는 건 쉬웠다.

전임 영의정인 이원익이 사직하면서 공석이 될 우의정 자리에 직접 후보를 추천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김류를 추천하면 되는 것이다.

“영의정께서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신 지 오래지 않았는데, 벌써 사직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쉬운 마음은 신도 크지만, 이미 오래 헌신하였으므로 기력도 정신도 받쳐주지 않사옵니다. 그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과분한 성은에 누만 끼치고 있으니 사직을 윤허해주셨으면 합니다.”

“……영의정의 진심이 그렇다면야, 내가 억지로 붙들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나중에라도 마음이 달라진다면 다시 복귀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에.”

박홍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기대대로 물어주었다.

“신임 우의정으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김류가 좋을 것이옵니다.”

“김류요?”

“오래전부터 공조판서를 도맡아서 대왕의 성업聖業을 묵묵히 돕고 있으므로, 이 같은 사람을 의정으로 둔다면 마찬가지로 성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박홍구의 말에 왕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박홍구가 눈치를 볼 즈음이 되어서야, 왕이 말했다.

“김류가 영의정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나 봅니다. 그렇지요?”

박홍구는 민망해져서 몸을 꼬았다.

“나 역시 김류를 언젠가 의정으로 세워두고자 결심을 해두었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었다니 그 사람이 불안했나 봅니다.”

김류가 묵묵하게 나랏일을 맡아온 건 맡지만, 본성 자체가 묵묵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로지 의정에 내정된 것만 믿고서 거들먹거리며 얌전히 직무에 임해왔던 건데,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았고 왕은 복귀하지 않고 있으니 과연 불안해질 법도 했다.

“좋습니다. 영의정께서 크게 마음을 써주어 김류의 불안을 해소하고 나의 신용을 지켜주고자 하니,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영상은 편히 쉬다가, 내킬 때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왕의 배려에 박홍구가 예를 올렸다.

“망극하옵니다.”

“다만…….”

왕이 싱긋 웃었다.

“…하교하시옵소서.”

“내가 듣기로, 바쁘게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을 놓으면 확 늙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상에게 취미라도 하나 보태줄까 하는데…….”

박홍구가 완전히 공무에서 손 떼기 전에, 해두고 갈 일이 하나 있었다.

“…….”

* * *

새해를 앞둔 시점에 한양이 조금 떠들썩해졌다.

두 가지 소식이 있었다.

하나는 영의정 박홍구가 사직했다는 것이었다.

후임은 기존 좌의정인 의상의가 맡게 되었으며, 좌의정 자리는 다시 기존 우의정인 남이공이 맡았는데, 최종적으로 공석이 된 우의정은 공조판서 김류가 맡게 되었다.

김류가 본래 명성과 권위가 있었으나 말없이 일만 해온 지 오래되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내 수긍했다.

김류는 숙원이 이뤄진 데 안도하고 만족하여 여러 사람을 불러 담소를 나눴다.

본디 그의 마음 같아서는 성대한 연회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왕이 탈상脫喪한 지 오래지 않았으므로 후일을 기약했다.

두 번째 소식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이 인쇄본으로 발간되었다는 점이었다.

기술을 검증하고 장인들의 경험을 쌓고자 예행豫行하는 의의로 경전 중 분량이 작으면서도 주목받는 대학을 백여 권 남짓 찍어낸 것이었는데, 평가를 위해 당상관들에게 배부됐다.

이는 왕과 세자가 합심하여 내밀히 벌인 사업이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기대하고 들떴다.

그러나 막상 파급은 크지 않고 여러 사람이 시큰둥하여 여론이 썩 좋지는 못했다.

이에 몇몇 중신이 괜히 눈치를 보았지만, 왕에게는 이미 복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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