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3화
경운궁의 편전.
그 집무실에서, 최근 영의정 자리에 오른 이상의가 백관의 대표로서 말했다.
“신이 백관의 여론을 조심스럽게 탐문하여 보니, 다들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사옵니다.”
이상의는 진솔하게 보고하면서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번 인쇄 사업은 대왕과 세자가 합심하여 준비한 것이므로, 차마 냉정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들려주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고도 왕에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사업이 더 망가져 성업聖業에 치부로 남겨지지 않도록 직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왕이 답했다.
“내 짐작은 했습니다.”
“하오시면…….”
“반응이 좋지 않은 건, 역시 경전이 한문漢文이 아니라 언문諺文으로 쓰였기 때문이겠지요?”
“……!”
이상의는 깜짝 놀라 답했다.
“과연 백관의 불만이 다 그러했사옵니다.”
기존에 목판을 이용한 인쇄는 한 장의 종이를 붙여놓고 먹물을 쫓아 한문을 그대로 깎아내므로, 내용을 온전히 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목판처럼 깎아내기엔 과하게 수고스러울뿐더러, 활자를 조합해 인쇄하더라도 수천 개 한자를 일일이 필요한 개수만큼 구비한다는 건 매한가지로 지난至難했다.
그래서 왕이 인쇄 사업을 일으키고자 선택한 것이 언문이었다.
언문은 몇 안 되는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모든 음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인쇄에서는 매우 편리했다.
다만 맹점이 있었으니, 음만 표현하는 언문으로는 복잡하고 난해한 경전의 원서 그대로를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백관이 호소한 게 바로 그런 어려움이었다.
“언문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음으로만 유추할 수 있는 한문이 한둘이 아닌 데, 오직 언문으로만 인쇄하였으므로 지극히 혼란스러워 결국에는 한문으로 쓰인 책을 찾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야 언문으로 인쇄된 책을 구비하는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상의가 이러한 여론을 전달하니 왕이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본디 경전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여서, 한문 그대로 전래하였음에도 학자들은 주해注解 또한 찾아서 공부했습니다.”
“예에…….”
난해한 책만 가지고는 성현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해도 필요하고, 스승은 더더욱 필요했다.
학자들 사이에서 학파學派와 학맥學脈이 중시되는 건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성한 학자여도 성현에게 세월을 넘어서서 직접 뜻을 물어보지는 못한다. 그러니 사람마다 해석이 갈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어떠한 해석을 정통正統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학문에 있어 근본과 사문난적 또한 갈라지게 된다.
“아조에는 때마침 대성하고 유능한 학자들이 많은데, 다들 몸이 하나라서 여러 제자를 거느리지 못하고, 반대로 무수한 학자들이 좋은 스승을 모시지 못해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족히 대현大賢이라 불릴 만한 사람을 시켜 주해를 쓰도록 한다면, 달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언문으로 쓰더라도 능히 이해시키고 깨우치게 할 것이며, 또한 인쇄의 효용으로 전국의 무수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할 수 있으므로 공공의 이익을 크게 성취할 것입니다.”
명성 있고 검증된 학자에게서 배우고픈 학자는 끝이 없다.
학파와 학맥이 중요한 세상이었다.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전수하였느냐에 따라 이미 명성 있고 성취한 이들에게서 동류인 정통으로 여겨지느냐, 시정잡배의 학문을 배운 사문난적으로 여겨지느냐가 갈라지니까.
그리고 사람이라면 응당 큰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은 법.
그것이 단순히 대세만이 아니라, 정론이고 정통이라는 만인의 인정까지 받는다면 더더욱 큰 흐름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현大賢이 직접 집필한 언문 주해는 반드시 잘 나갈 수밖에 없다.
언문 주해를 언문 경전과 짝을 맞춘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여러 사람이 호소하는 언문 경전의 맹점을 주해가 메워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주해 또한 인쇄본으로 여러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그 수량에 맞춰 모두가 한문 경전을 구비할 수가 없는 만큼, 대개는 값싸고 시중에 많이 풀릴 언문 경전에 의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문 경전과 언문 주해가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두 전임 영의정에게 간곡히 양해를 구하여 언문으로 주해를 쓰도록 했습니다. 다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도달한 현인이니 응당 배우고픈 사람이 많겠지요?”
이원익과 박홍구가 학문적으로 명성이 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남인의 뭇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었고 박홍구는 북인의 뭇 스승인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다. 각기 배움에 근본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이상의는 왕의 복안을 알게 되자 마음이 정반대로 급해져서는 간언했다.
“두 전임 영의정이 주해를 써서 낸다면 언문 인쇄본의 맹점은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슬러 올라가면 각기 동인의 학맥을 이은 사람들인데 주해의 파급을 생각해보면 반대로 서인의 학맥을 이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이상의가 생각해보니 언문 주해만은 확실히 전국 각지에 퍼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 온 세상 선비들이 모조리 동인의 학문을 배우게 되는 셈이니, 오늘날에는 동인과 서인이 다 쓸모가 없어졌다지만 학문의 뿌리를 서인에 둔 이들은 한결같이 불만을 품게 될 터였다.
이에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균형을 맞출 사람으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김집金集이 성혼과 김장생의 문인으로 서인의 두 대유大儒의 학문을 수학하였으므로 좋겠습니다.”
“지금 김집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연산連山에 백신白身으로 있습니다.”
“일개 학생을 두 영의정과 같은 반열에 둔다면 반대로 여러 사람이 공분을 느끼지 않을까요?”
“김집은 어려서부터 예禮를 깨우쳤으며, 오늘날에도 예禮를 강조하여 오롯이 자신의 거울로 삼아 수신修身한다 하므로 두 영의정과 함께 일하더라도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영의정이 나 대신 두 전임 영의정에게 양해를 구해주세요. 두 사람이 응해준다면, 내가 김집에게도 대사를 맡기겠습니다.”
“받들겠사옵니다.”
* * *
이원익과 박홍구는 이상의의 부탁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다들 생의 황혼에 이른지라, 당장 주해를 작성하더라도 미완의 역작이 될 공산이 컸다.
그래서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 저들의 역작을 완성해줄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김집은 학문을 잘 배웠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젊기도 했으므로 대업을 마무리 지을 사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이원익과 박홍구의 동의를 얻어낸 이상의는 즉각 왕에게 찾아가 알렸다.
“두 전임 영의정이 기꺼이 응해주었사옵니다.”
“그래요?”
“다들 언제 천명이 다할지 몰라 대업이 완수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으므로, 때마침 김집을 추천하니 매우 기뻐했습니다.”
“으음.”
왕이 얕게 침음을 흘리자 이상의가 공손하게 말했다.
“성상께서는 인재를 중용하고 매우 아끼시므로 나라의 성세가 오늘날까지 이른 줄로 아옵니다. 하오나,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거절하면 되지요.”
이에 이상의가 쑥스럽게 웃었다.
“신이 왕명을 받들 의지만은 분명 비할 데가 없겠으나, 그래도 천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줄로 알 뿐이옵니다.”
“내가 오래전에 영상의 건강을 걱정하며 해준 말을 그새 잊었다는 말입니까?”
“뼈와 폐부에 새겨두고 오늘날에도 받들고 있사옵니다.”
이상의가 순시를 빙자하여 매일 한양을 쏘다니는 건 그때 운동하라는 왕명을 아직도 받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은 지금 본인이 천명을 얼마나 거슬렀는지 알지 못하십니다.”
이에 이상의는 농으로만 알고서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대왕께서는 신에게 천명을 회피할 비결을 알려주셨으니 정녕 하늘의 명령도 능히 거스르시는 분이옵니다.”
“영상이 장수하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하늘의 뜻을 거슬러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애써보겠습니다.”
그러자 이상의는 면면에 웃음기를 품고서 손을 모아 쥐었다.
“신의 생명이 오롯이 성상께 달려 있으니, 부디 애처롭게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왕이 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김집에게는 내가 직접 서찰을 써서 부르겠습니다.”
“대왕께서 친히 권하시니 집이 난처해할까 우려스럽사옵니다.”
“사람이 이미 예를 깨우쳐서 오늘날에도 수신한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두 전임 영의정과 함께 주해를 쓰라고 한다면 그것대로도 난처해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렇겠사옵니다.”
“내가 직접 권한다면, 난처해하긴 마찬가지라도 예의상 마다하지 못할 터이니, 내가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꽉 잡아서 두 사람 앞에 앉혀두려고 친서를 내리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상책이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론이 대강 마무리된 것으로 여겨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이미 의례적인 일이었으므로 이상의는 기꺼이 하나를 집어 입속에 감춘 뒤, 예를 올리고서 물러났다.
* * *
며칠 뒤 어전에서.
우의정에 오른 김류가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신이 듣기로 김집이 왕명을 받들어 한양에 입성했다고 하니, 매우 감축드리옵니다.”
이에 어전 좌우에 선 중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소식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왕이 답했다.
“김집이 내가 시킨 것을 따라 한양에 입성했을 따름인데, 어찌 감축까지 한다는 말씀입니까?”
“김집은 성혼과 김장생의 문하였던 사람으로 학문을 깨우쳐서 과거 그가 폐주 시절 낙향하였을 때 여러 사람이 아쉬워했는데, 이렇게 성대한 치세를 맞아 다시 입성하였으니 어찌 감축드리지 않겠사옵니까.”
“우의정께서는 김집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현인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이제는 신이 의정으로서 나라의 반석을 떠받치게 되었으니, 더더욱이 좋아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가 의정이 되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도, 어전에서 의정의 반열에 선 채 재차 광고하는 김류였다.
왕은 그러려니 여겼다.
박홍구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김류가 의정의 자리를 고대해왔을 뿐만 아니라, 고작 세자가 잠깐 대리청정한 것만으로도 전전긍긍했다고 하니까.
숙원이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우의정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크고, 그래서 인재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건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김집이 왕명을 완수하는 대로, 그 공을 근거로 삼아 적절한 직분을 맡긴다면 대왕의 성업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내가 우의정의 말씀은 꼭 기억해두고 있겠습니다.”
이에 김류는 제가 이렇게나 왕의 치세에 힘쓴다는 듯 가슴을 내밀고 콧대를 세웠다.
그 광경에 여러 사람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직 왕만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길 뿐.
그리고 왕은 내심 생각했다.
사서삼경의 전체 분량이 꽤 되는지라, 이들의 주해를 모조리 언문으로 작성하려면 작업이 한두 해로는 그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과연 김집이 제때 관문에 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그 점을 지적해서 한참 으스대는 김류에게 굳이 찬물 뿌릴 필요는 없으리라.
한창 즐기고 있을 때 뿌려주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