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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94화 (294/380)

인조, 명군이 되다 294화

“두 전임 영의정이 언문 경전의 주해를 쓴다면, 옛 동인 사람들이 학문을 독점하고 전횡하겠다는 뜻 아닌가!”

한 선비가 대청에 앉아서 크게 탄식했다.

혹자가 이 선비를 두고 평하기를, 참선비라면 참선비고 미친놈이라면 미친놈이라고 했다.

과연 그러한지 소식을 듣자마자 분기탱천하여 자리에 찬물을 끼얹으니, 선비와 동문수학한 송준길이 다그쳤다.

“이 사람아. 아직 내 말은 끝나지도 않았어!”

그러거나 말거나 송시열은 만류하는 송준길의 손을 쳐내며 따졌다.

“자네는 이런 소식을 가져오면서 화가 나지도 않았단 말인가!”

“아니,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니까?!”

송준길은 억울함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분명 같은 집안에 나와서 함께 배운 사이인데도 이렇게 사람 속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녕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였으나 실상 송시열은 백치白癡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학문에서는 대성할 자질이 보였으므로, 사람마다 각기 잘난 데 있고 모난 데 있다는 척단촌장尺短寸長의 고사가 그냥 있지는 않음을 느낄 뿐.

송준길은 괜히 복잡해진 심경을 밀어내고서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 사람 말을 끊는다면….”

“이런 참담한 소식을 듣고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 자네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끊으면…….”

“자꾸 윗사람이라도 된 양 엄포를 둔단 말인가?!”

“…….”

“…….

“…….”

송준길이 입술을 꽉 깨물고서 침묵할 각오를 드러내자, 막상 조용해지는 송시열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송시열이 눈치를 보게 되자, 송준길은 재차 말이 끊긴다면 곧바로 술상을 엎어버리겠다 다짐하고서 말했다.

“현 영의정 대감께서 간언하여…….”

“…….

“…….”

“듣고 있네.”

“…현 영의정 대감이 간언하여 우리 스승님을 전임 두 영의정분과 함께 주해를 작성하게 했다고 하네.”

“허. 그래도 지금 영의정 하는 사람이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로구먼?”

“시건방진 사람 같으니. 덕분에 스승님께서 수상首相을 지낸 분들과 함께 학문을 팔도에 펼치게 되었으니 고맙게 여겨야지!”

“그야, 영의정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그렇지. 옛 동인 사람들만 주해를 쓰게 한다면 어디 우리들이 손 놓고만 있었겠나?”

송준길에게 소식을 듣기 무섭게, 즉각 목욕재계하고 상소 올릴 생각부터 들었던 송시열이었다.

이에 송준길이 눈이 가늘어져서 놀렸다.

“자네는 출사해봐야 나라만 어지럽힐 사람이야. 태평성대에 누 끼칠 생각은 그만하고 산속에 은거하면서 후학이나 양성하는 게 어떤가?”

“당치 않은 소리! 나처럼 왕업을 보좌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없는데, 동춘당同春堂은 나라에 해악을 끼칠 생각으로 내게 낙향을 권하시는가?”

송시열이 정색하며 묻자 송준길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자네의 그 못된 입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어렵게 출사하더라도 적만 잔뜩 만들어서 대업은 성취하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을걸?”

“하! 사내대장부로 나서 배운 사람이 되었거늘, 직설直說하고 직필直筆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지 않음만 못한데, 어렵게 출사하고도 남은 평생을 속된 선비俗儒로 썩을까!”

송시열은 송준길의 예지에 가까운 경고에도 코웃음만 쳤다.

“동춘당同春堂께서는 속된 선비로 남으시게! 나는 단명할지라도 대유大儒로서 살고자 하니!”

송시열이 호언장담하자 송준길은 질린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부디 이 못된 입버릇 때문에 문중이나 스승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동춘당!”

“왜 부르시는가?”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스승님께 축하하는 서찰이라도 써서 보내는 게 맞지 않겠나?”

“언제는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양 여기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잘난 자네 뜻대로 하세.”

“좋지!”

송시열은 노복을 불러 즉각 술상을 치우게 하고, 문방사우를 청했다.

* * *

뿌리를 서인에 둔 몇몇 사람이 기쁜 마음에 경거망동하니, 소문은 곧 한양과 일대에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두 전임 영의정과 서인의 정통 학맥을 이은 김집이 함께 주해를 쓴다는 소식은 세간의 뭇 선비들을 동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네는 그 말 들었는가!”

“언문 주해, 말이지? 당연히 들어보았네. 이 사람 귀도 장식은 아니지!”

“기대되지 않나?!”

“그거, 오늘 아침엔 해가 어느 방향에서 떴냐는 말처럼 쓸모없는 질문이로군!”

“하하! 하기야, 기대되지 않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겠나!”

두 영의정과 정통 학맥을 이은 사람이 함께 집필한다는 건, 주해가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검증되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이를 경서와 마찬가지로 달달 외워, 시험에서 논술의 근거로 삼는다면 과연 시험관들이 답안을 퇴짜놓을 수 있을까?

물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 같은 방법을 취할 터이므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의 학문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언문 주해를 구하지 못해 이를 바탕으로 삼지 못한 답안들은 일단 제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어디인가?

시험에 합격하여 관문에 입성하고, 나아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가문을 드높이려는 선비는 무수히 많았다.

고작 터럭만 한 차이로 시험의 등락이 결정되므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언문 주해는 이미 선비들에게 최우선으로 구비해야 할 서적이었다.

“그런데 언문 주해는 언제 나온다던가?”

“그건 나도 궁금하여서 백방으로 알아보았는데, 정확히 언제 나온다는 말은 어디서도 듣지 못하였네.”

“이런……. 당상들에게는 이미 언문으로 된 대학大學을 배부하였다는데 그게 이미 주해는 아니겠지?”

“다행이도 아닐 걸세. 얼핏 들은 이야기론 경전을 언문으로 옮긴 것뿐이라고 하였네.”

“으음! 나는 언문 주해를 대학과 마찬가지로 한 보따리만 찍어, 이미 대성한 사람들에게만 몰래 나눠주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

그러면 소수의 일가만 진귀하고 검증된 학문을 배워 대대로 관직을 물려받지 않겠는가?

식년시마다 몇 자리 안 되는 등용문을 두고 십수 만 명의 학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선비로선 두렵기까지 한 가능성이었다.

“게다가, 여염의 백성들조차 읽을 수 있는 언문 경전이 나돌기 시작하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터!”

언문 주해의 독점을 더더욱 용납하기 어려웠다.

“우리, 계속하여 언문 주해의 발행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되 알아낸 바가 있다면 숨기지 말고 지체없이 서로에게 알려주도록 하세. 알겠나?”

“그렇게 하세!”

두 선비는 결의 형제라도 하는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으나, 드러나지 않는 본심은 달랐다.

발행의 소식이 파다하게 퍼질 듯하면 알려주겠으나, 비밀스럽게 닿아 어렵사리 한 질 구할 듯하면 절대로 거론하지 않고 사랑방 방문에 이불을 걸어놓은 채 몰래 봐야겠다고 말이다.

* * *

경전의 주해를 쓰는 일로 동인과 서인의 망령이 잠시 부활할 뻔했으나, 그런 역사의 가능성은 완전히 묻혔다.

그리고 경전의 언문 인쇄본과 언문 주해가 모두 뒤따르는 소식 없이, 사업만이 조용히 진행되자 세간의 관심과 기대도 차차 식어갔다.

책을 출판하는 건 의향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일.

더욱이 경전과 주해는 대대적으로 동시에 발간하여 공익에도 이바지하겠다고 전제하였으므로, 충분한 종이가 마련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미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서찰 하나가 경운궁의 편전으로 날아들었다.

단단히 봉인된 권자卷子로, 그 두께마저 심상치 않았는데 짠내와 함께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태가 났다.

바다를 건너서 온 장계가 보통 이러했다.

왕은 봉인을 풀고서 권자를 펼쳤다.

-청래도 관찰사 김경여가 삼가 목욕재계하고서 글 올립니다.

신이 팔도에서 온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대왕께옵서 언문 활자를 이용해 책을 대대적으로 발행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러하다면 신이 감히 아뢰옵건대, 청래 사람들에게 언문을 교육할 책 또한 발간해주시기를 간청드리옵니다.

근래 청래에서는 언문에 무지한 백성들을 교육할 스승들이 나날이 귀국하여, 적은 사람이 과중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만약 교재를 발간해주신다면 언문 스승들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언문을 익힌 청래의 백성이 다른 무지한 사람을 깨우칠 수 있으므로 이는 실익이 매우 큽니다.

…….

왕은 장계를 일독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렇군.”

안 그래도 장인들이 할 일이 없어 놀고만 있었던 참이었다.

비축해둔 종이 또한, 경전과 주해를 넉넉히 발행하기에는 부족할지라도 바다 건너 이역만리에 전달할 한 줌 교재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흐음.”

왕은 교재의 집필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했다.

그러나, 일머리 뛰어나면서도 당장 쉬는 사람들은 이미 언문 주해의 작성에 투입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직접 나서자니 복귀의 후유증만으로도 몸살이 날 지경.

차마 새 일감을 떠안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왕은 곧 일감을 떠넘길 적임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동안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왕업을 익혔으나 부왕의 복귀로 다시 칩거하게 된 세자를 말이다.

‘세자에게 맡기긴 하되, 일을 도와줄 사람을 직접 선발하게 하면 더 좋겠군.’

세자라는 지위와 그리 오래지 않은 대리청정 기간이 이미 증명하지만, 세자는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어갈 존재였다.

이러한 안배를 본인 혼자만 생각하는 게 아님을 백관에게 새겨주고자 갖은 계기를 마련해왔다.

같은 의의로서, 일을 수발들어줄 자신만의 신하를 임시로나마 직접 갖추게 한다면 세자와 신하들 모두 각기 깨우치는 바가 있을 터.

‘좋다!’

* * *

새해를 지나 봄도 무르익은 시점에서.

세상이 다 조용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듯, 조정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북방에서 춘궁기春窮期를 맞이하여 식량이 귀해졌는데, 요동의 입은 당장 아조의 도움으로 구원되었으나 중원은 그렇지 못하므로 전역에서 도적이 난립한다고 하옵니다.”

영의정 이상의가 보고했다.

“북직예의 사정은 어떻답니까?”

“북직예는 그간 여러 도적의 손을 거쳐서 지극히 황량해졌는데, 사람은 여전히 많으므로 고난이 유난하여 마찬가지로 도적이 많이 횡행하옵니다.”

“그 도적들이 우리의 땅을 넘보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조선은 두 차례 금나라와의 거래로 발해를 온전히 자신의 바다로 삼았다.

덕분에, 혼란한 중원에서 진귀한 자원과 정교한 기물을 값싸게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었고 조선은 부유함을 누리게 됐다.

이러한 마당에, 바다와 소통하는 해안가에 도적이 들어차게 된다면 심히 곤란할 터.

문제는 바다를 에워싼 조선령이 100리里의 깊이에 불과했다.

마냥 좁다고 하긴 어려울지라도, 회랑이 바다와 맞닿은 해안을 타고 길게 늘어지므로 관리하기가 까다로운 상태.

이에, 병조판서 정충신이 나섰다.

“신에게 방법이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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