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5화
“신에게 방법이 있사옵니다.”
시립한 신하들 사이로 병조판서 정충신이 나섰다.
그는 본디 조선군의 도원수都元帥를 맡아, 전시 상황에 군령軍令을 전담해왔다.
그러면서 세운 공적이 작지 않았는데, 때마침 김류가 의정에 올라 육경六卿에 공석이 발생하자 병조판서로 제수된 것이었다.
출신을 생각해 보면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일부 조관朝官은 평생 칼만 휘둘러온 정충신이 육경의 중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도 드러냈으나, 이는 기우로 드러났다.
정충신은 과거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이항복을 스승으로 모시며 문하에서 수학해왔다.
학문의 성취가 여느 영재들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배움에 깊이가 있고 근본이 있으며, 애초에 도원수의 직책부터가 범부의 짧은 소양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병조의 사무가 정충신이 그간 맡아오고 접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적응 또한 매우 수월했다.
그리하여 정충신은 뭇 사람의 의심을 풀고 병조의 올바른 장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그가 미천한 출신에다 군문부터 몸을 담았다고 괄시하는 인물은 없었다.
“말씀하세요, 병조판서.”
용상에서 간언을 허락하자 정충신이 재차 입을 열었다.
“신이 사료한바, 새로 얻은 땅을 지키는 건 어렵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이미, 혼란한 중원에서 많은 피난민이 아조에 의탁하고자 조선령에 개미 떼처럼 넘어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공업功業을 이뤄내자는 말씀이십니까.”
“예에. 피난민들에게 정착을 용인하는 대가로 국경에 토벽과 목책을 세우게 한다면 저들은 각자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발 벗고 나설 터이니, 이로써 아조는 공들이지 않고 대업을 성취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에 좌의정 남이공이 찬동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서, 뒷간을 찾을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국경을 넘어 피난한 자들은 그 땅에 누대로 살아온 양, 새로이 피난해오는 자들을 원수처럼 여기지 않겠사옵니까?”
어제 굴러온 돌이, 막 굴러들어오는 돌에 뽑혀 나갈까 근심하는 것이다.
“병조판서의 방법을 취하되, 원래 살던 이들과 먼저 피난한 자들에게 호패를 발급하여 아조의 신민 된 자격을 부과한다면, 백성을 새로이 호적에 올려 국가의 공익을 또 하나 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호패가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쉬이 분간하게 되어, 호패를 확산하고 토벽을 세움에 있어 함께 효용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에 우의정 김류도 거들었다.
“좌상의 계책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이로써 일거양득을 취하게 되면, 나아가서는 토벽 안의 백성들이 바깥과 차단되고, 또 바깥을 꺼리게 될 터이므로 아조의 왕화王化에 더욱 진심으로 교화敎化될 터이니, 양득은 장차 삼득에도 이르게 될 것이옵니다.”
이에 남이공이 콧대를 세우고서 답했다.
“그 역시 이 사람이 의도한 바이나 장차의 일이라 거론을 삼갔는데, 즉각 포착하시는 우의정 대감의 안목이 날카로우십니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서로를 높여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각자 하는 말은 분명 예리했다.
이미 뒷간을 다녀온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갈라치기 하여 큰 힘 들이지 않고 이익을 거두자는 건, 과연 제국의 근본 있는 통치법이었다.
‘δια?ρει κα? βασ?λευε’, ‘Divide et Impera’, ‘Divide and rule’.
모두 ‘분열시켜 통치하라’라는 의미의 격언들이며, 이는 마케도니아 제국으로부터 시작해 로마 제국을 거쳐서 대영 제국까지 전해져왔다.
각기 세기를 향유한 대제국인데 세기를 불문하고 일관적으로 하나의 통치법을 바탕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러한 통치법은 비단 서양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중원의 제국들 역시 동북면의 기마 민족들을 일관적으로 이간질하고 분열시켜왔으니까.
제국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서양이 말하는 분할통치와는 다소 다르긴 하다.
그러나, 서로 이간하고 분열시켜 국가의 안녕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하게 동일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이 같은 발상을 궁리해냈다는 건, 방법 자체는 썩 유쾌하진 못하더라도 나라가 제국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방증이었다.
이에, 영의정 이상의가 나섰다.
“좌의정과 병조판서의 방식을 취하고자 하신다면, 관리와 군사들을 선발하고 새로 얻은 해안가에 파견해 관아와 진보를 설치해야 하옵니다.”
그간 조선은 새로 얻은 해안가를 방치해 왔다.
오늘날에도 재건되지 않은 폐사군廢四郡과 마찬가지로, 관아를 설치하고 정식으로 다스리는 데 들어가는 수고로움에 반해, 얻을 수 있는 공익이 지극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재상의 방법을 취하려면 선주善住 거주민과 피난민들을 정교하게 통치하고 통제해야 했다.
올바르게 지시하는 이 없이는 그저 뭉쳐있을 뿐인 군상들이 올바르게 일을 해내기 어려우니까.
통치와 통제에 있어 각기 관아와 진보 없이는 불가한 것이다.
그리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었다.
해안가의 영역과 사람들이 조선의 확고부동한 영토와 신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관아와 진보야 당연히 설치되어야 하니까.
“다만, 사람을 선발하는 것과 무지하고 사나운 무리를 계도하여 이끄는 건 하루아침에 성취될 일이 아니므로 두 사람의 해법을 취하시겠다면 속히 착수해야 하옵니다.”
보통의 관리와 군사들은 바다 건너 이역만리에 피난민이 들끓는 임지를 맡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이외에도 관리와 군사들이 부임한 직후 바로 대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정교한 설계와 치밀한 고민 또한 필요해다.
그리고, 이상의가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예조 속하의 실방사가 때맞춰 움직이기 위해서도 또한 미리 준비해야 할 점이 많았다.
왕은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니 마다할 여지가 없습니다. 즉시 착수하세요.”
이에 이상의가 즉각 답했다.
“삼가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 *
바다 건너, 청래도.
이름은 이래도 정작 청주부는 없고 대신 진평부가 있는 청래도에서, 관찰사 김경여는 느긋하게 업무를 소화해나갔다.
느긋하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내지의 고을들과 비교하면 거진 백 배는 바쁘다지만 그래도 지금이 어딘가.
북직예에서 금나라와 순나라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릴 때에는 청래도 안팎이 모두 시끄러웠으므로 관찰사인 김경여부터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죽하면 틈틈이 수면까지 걸러가며 업무를 봐야 했으니까.
식사만 틈틈이 걸러지는 정도로는 오히려 양호한 셈이다.
이러다가 뒤지겠다는 위기감만은 여전할지라도 말이다.
“영감?”
진평부의 아전이었다.
그가 문간 너머에서 부르자, 김경여는 더 많은 일감을 직감하고는 한숨부터 푹 내쉬고 답했다.
“들어오게.”
“예에.”
굽실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선 아전이 내민 건, 막상 일감이 아니었다.
“내지에서 온 조보입니다.”
“오, 아아!”
감탄과 함께 김경여는 얼굴이 확 펴진 채로 조보를 낚았다.
청래도와 내지를 오가는 상인이야 평소에도 많아 소식이 단절된 건 아니지만, 역시 조정의 분명한 근황을 아는 덴 조보만 한 게 없었다.
예전에는 배가 많이 없어 계절마다 한 번씩, 석 달 치 조보를 묶어 한꺼번에 가져왔는데 최근에는 사정이 많아 나아져 달포마다 왔다.
이게 또 어딘가.
“고맙네.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아전은 기뻐하는 관찰사를 보니 뿌듯했는지, 그 역시 뿌듯한 낯으로 인사 올리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경여의 눈은 이미 조보를 훑고 있었다.
“흐흠, 흐흠……. 아, 만운?雲 대감이 병조판서에 올랐구나. 하기야, 만운 대감이 아니라면 누가 병판 자리에 어울릴까!”
김경여는 청래도에 원정 온 정충신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직접 목도한 그는, 세간에서 악명이라도 되는 양 도는 출신에 대한 소문 따위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품있고 강단 있었다.
오죽하면 선비란 신분이 아닌 개인의 기품이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김경여는 사감私感을 갈무리하고 마저 조보를 읽어나갔다.
흥미로운 소식이 줄을 이었는데,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 김경여는 문득 섬찟해졌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그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발해의 해안가를, 산해관을 중심으로 북직예 쪽 서관도와 요동 쪽 동관도로 나누어 군현과 진보를 설치해 관리하겠다는 내용이었으니까.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아님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어째서일까.
“……으음.”
김경여가 침음을 흘리는 순간.
“영감?”
익숙한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막 조보를 가져다준 아전이었는데, 김경여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아직 안에 계십니까?”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고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
“아직 안에 있네. 무슨 일인가?”
“선전관이 방문했습니다.”
“……선전관?”
“예.”
김경여는 괜히 되물었으나 확답만이 돌아왔다.
과연 선전관이란 무엇인가?
무관으로서 다소간 군무軍務를 맡기도 하나, 그보다 주된 역할은 외부에 왕명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관리를 상대로 하여서, 외관에게 잘못이 있으면 파직을 전하거나 직접 사로잡아 한양까지 압송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지敎旨나 직첩職牒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경여는 하늘에 대고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음을 자신했다.
소소하게 미진했던 점은 있을지라도 선전관에게 나쁜 소식을 들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선전관이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김경여는 입술을 말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반갑지 않은 손님인 선전관은 감영 뜰에 수하들과 함께 서 있었다.
“관찰사 영감이십니까?”
선전관이 호쾌하게 물었다.
“그렇네만.”
“전하께서 교지敎旨를 내리셨습니다.”
“……그렇군.”
김경여는 버선발로 감영을 내려가, 대왕이 계실 동쪽을 향해 사배를 올렸다. 교지라는 왕명을 받들기 위한 의례이자 예법이었다.
이에 선전관이 교지를 펼치고서 낭독했다.
“왕이 이르노라. 청래도 관찰사 김경여를 서관도 관찰사로 제수하나니, 해관該官은 즉각 부임하라.”
“악!”
김경여는 직감이 들어맞은 데 기뻐할 새도 없이 비명부터 내질렀다.
청래도를 힘겹게 다스리며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든 지가, 과장 조금 보태서 엊그제였다.
그런데 또다시, 사납고 불령한 피난민들로 가득하고 옆집에는 불이 난 개척지에 수령으로서 부임해야 한단 말인가!
청래도 관찰사로 임기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귀국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늘…….
하지만, 혼란했던 청래도를 안정시키며 재주와 특기를 검증한 인재를 나라에서 아니 쓸 수도 없는 노릇.
덕분에 곧바로 재활용된 김경여는 땅바닥을 짚고서 오열했다.
“으아아!”
그 광경에 선전관은 깜짝 놀라서 김경여를 일으켜 세웠다.
“영감?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김경여는 사지를 휘둘러대면서 외쳤다.
“기뻐서 그러네! 기뻐서!”
“아니, 아무리 기쁘시더라도…….”
“으아아아아!”
짐승이 된 김경여가 기쁨으로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