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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96화 (29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96화

조정이 김경여를 착취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청래도의 미래를 위해 해도該道의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고, 왕에게 간청하여 언문 교육이 가능한 교재를 부탁했다.

이 점은 왕도 높이 샀던바.

그래서 언문 경전과 주해를 본격 출간하기 전, 언문 교재를 발간해냈다.

그리고 교재의 견본이 청래도 감영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임기가 다해 내심 귀국을 바랐던 김경여가 내지內地가 아닌 서관도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뒤였고 교재는 집무실과 함께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 * *

“청래도 감영에 언문 교재가 도착했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서관도 감영.

그곳에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김경여 앞에서 아전이 물었다.

김경여는 대답에 앞서 급조된 감영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돌담 대신 목책을 쌓아놓았고, 정문은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 대신 조잡한 나무문으로 대신해놓았다.

외관부터 이러한 지경이었으므로 내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려 일개 도의 감영인데도 내지의 여느 반가 저택만 못한 것이다.

관리와 군사들이 다 급하게 부임했으니 당연하다.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출 시간이나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그저, 때 되면 멀쩡한 건물로 새로 올리겠지 하고 속으로 기우제나 지낼 따름.

멀쩡한 건물이 다 올라왔을 때 본인이 현임일지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이런 마당에 교재를 가져와 무엇 한다는 말인가?”

“그건……, 그렇지요.”

아전도 부정하진 못했다.

“새롭게 부임한 관찰사가 제 몫을 다해주길 바라야지. 영, 신용은 가지 않는다마는.”

청래도의 후임 관찰사는 김경여와 다년간 면식을 쌓은 내주부사로 결정됐다.

그 역시 임기가 다하여 귀국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쥐뿔, 귀국은커녕 김경여와 마찬가지로 외지에서 한세월 또 썩게 되었다.

그게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일까.

신하를 학대하는 데 있어 일관성은 있으니 다행이었다. 내주부사만 홀라당 돌아갔다면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혼자서는 못 죽는 법이다.

“백성들의 여론은 어떤가? 알아는 보았나?”

김경여의 물음에 아전이 답했다.

“과연 이곳에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던 자들과 근래에 피난한 자들이 서로 꺼리고 배척하였는데, 이들도 새롭게 피난 올 자들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학을 떼었습니다.”

“조정의 예측이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군.”

“사람 사는 세상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김경여는 부정하지 않고 일렀다.

조정에서는 미리 계획해둔 바가 있었다.

전제해둔 조건이 마침 부합하였으므로, 남은 건 그 계획을 착수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아전과 군사들에게 일러 동리洞里마다 아조의 치세를 포고하고, 무단 입국자를 분별할 명목으로 호패의 발급을 권장하라.”

“예에.”

“……실방사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이에 아전으로 가장해온 실방사 일원이 공손하게 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 * *

실방사라는 이름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들으라는 데 있었다.

물론, 실방사는 그러한 역할도 맡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여론 조사 기관을 표방하고 있으나 이외에도 하는 일은 많았다.

이를테면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관계가 없는 업무를 행하는 건 아니었다.

여론 조사는 쉽게 여론선동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마련이고, 실방사의 본업 또한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이번에 신설한 서관도와 동관도에서 실방사가 맡을 일 또한 그러했다.

서관도의 어느 마을에서.

“자네, 혹시 집에서 사라진 기물은 없나?”

“……딱히 없는 것 같네만, 왜? 자네 집에 도둑이라도 든 겐가?!”

“저번에 큰 마을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들리는 말을 귀 기울여보니 요즘 도둑놈들이 보통 기승이 아니더라고!”

“하기야, 세월이 워낙 하수상하니…….”

“뻔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닐세! 바깥에서 온 놈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패거리를 꾸려서 우리들 살림을 훔친다니까?”

“바깥에서 온 놈들……?”

눈이 가늘어지는 건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내 맞은편에 선 이만이 아니었다.

시대의 혼란함에 반해 정보의 교류는 지극히 느렸으므로, 여러 사람이 소식에 목말라 있었는데 사내가 백주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거리의 여러 사람이 이목을 기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떠들 따름이었다.

“이것들이 일부러 호패는 아니 발급받고 쥐새끼처럼 곳곳에 숨어서 사람들 뒤통수를 치고 다닌단 말이야…….”

“호패는 왜?”

“호패를 발급받으면 호적에 등록되잖나! 그게 남으면 도둑질하다 잡히기 쉬우니까, 일부러 발급을 아니 받는다는 거지!”

“허어. 아주 약삭빠른 쥐새끼들일세?”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라고…… 거동 수상하고 호패도 아니 차서 외지인인 티를 내는 놈들을 말이야…… 그런 것들은 도적놈 패거리, 못해도 예비 패거리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겠군. 알려주어 고맙네.”

“우리 사이에 이 정도가 대수인가. 아무튼, 단단히 주의하게! 자네 말마따나 세월이 수상하니!”

“그러자고.”

두 사람의 조심성이라곤 하나 없는 잡담은 여러 사람에게 경각심을 안겨주었다.

그날로 마을에서는 몇몇 사람이 호패를 발급받으러 움직였고, 그렇지 않고서 허리가 허전한 사람들을 경계했다.

본디 외부인들은 잠재적인 위협이나 마찬가지인 시대.

하물며 북직예에서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들이라곤 하나같이 적수공권에 굶주린 피난민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는데, 때마침 도는 소문은 기름에 떨어진 불씨와 같았다.

“자네는 왜 호패가 없나?!”

“그야 없으니까 없지.”

“뭐? 무슨 배짱으로 허리춤을 비우고도 이렇게 당당해! 바깥의 놈들과 내통이라도 하는 거냐!”

“내, 내통이라니?! 세금 때문에 일부러 미뤄두는 것뿐이야!”

객인의 해명에 자경단 사내가 천지사방에 들으란 듯 외쳤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세금이 좋아서 발급받은 줄 알아?! 이놈이 더러운 외지인 티를 내면서 동네까지 우습게 여기는군! 꺼져! 대가리에서 국물 흐르는 꼴 보기 싫으면!”

자경단 사내가 위협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러대니, 호패 없는 객인은 기겁하며 달아났다.

그러한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몇 있었다.

자경단 사내는 구경꾼들을 무시하고서 곧장 마을 안쪽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동리에서 대대로 유지로 군림해온 방 진사의 장원이었다.

자경단 사내가 정문을 통과에 장원으로 들어서니, 마침 방 진사는 동녘의 복식을 한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

인기척을 느낀 방 진사가 손님과 함께 고개를 돌렸고, 자경단 사내는 곧장 보고했다.

“거리에서 호패를 차지 않은 불량한 종자를 발견해, 마을에 해를 입히기 전에 미리 쫓아냈습니다.”

“고생해주었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방 진사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턱을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내가 당장은 손님을 응대하고 있어서 말이야.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문제없습니다.”

방 진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손님을 상대로 무어라 말했다.

자경단 사내는 방 진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귀에 익은 느낌이라 그것이 동녘의 언어임을 알았다.

방 진사는 자신과 서관도의 안녕을 책임지는 새 주인에게 줄을 선 것이다.

또한, 서관도에는 동녘의 언어를 가르쳐줄 사람도 교재도 흔치 않았는데 방 진사가 배웠다는 것은 서관도에서 그를 충실한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기다리는 자경단 사내의 두 다리가 나무통처럼 굳어갈 즈음 겨우 해산할 분위기가 되었다.

잠시 후 손님은 마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방 진사는 화기애애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만류하다가, 마지 못하는 척 문간까지 나아가서 배웅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괜찮습니다.”

“앉으시게. 방금 손님이 앉았던 자리지만, 자네도 다리가 아플 터이니.”

“예.”

방 진사는 사람을 시켜 다과를 내오게 한 뒤, 조금 진지해져서 말했다.

“자네가 마침 찾아와 좋은 소식을 전해준 덕에 손님과 이야기가 잘 풀렸네.”

“무슨 이야기였는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 위와 아래가 잘 화합하여 이 마을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 도모하자는 것이었지. 그래서 마침 못된 외지인을 쫓아낸 자네의 성실함이 크게 도움되었다는 거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 아직 생각이 건전하지 못한 마을의 몇몇 사람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조금 더 강하게 설득해보겠습니다.”

방 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 할 말은 끝나지 않아, 재차 입을 열었다.

“관에서도 마침 마을을 보호할 방법을 새롭게 마련했다는데, 이게 성취되면 근본적으로 큰 도움이 될 걸세.”

“무엇입니까?”

“금나라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는 걸세.”

“그걸 관에서 다 지어주지는 않을 테지요?”

“당연하지.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야. 동녘에서 온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우리를 놀려두겠나? 하지만, 나야 오히려 바라는 일이지. 장벽을 세우면 저 너머에서 쥐새끼처럼 숨어드는 외지인들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마을 사람들이 호패를 발급받고, 나아가 자경단을 차출하고도 줄어들지 않았다.

“야만하고 비열한 외지인들은 항상 새로운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서 관과 우리를 기만해 왔네!”

호패를 발급받지 않고 기생하며, 때로는 누군가의 호패를 훔치며, 국경 안팎을 오가며 배신자들과 내통함으로서 말이다.

적어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방 진사가 확언했다.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일세. 그게 바로 장벽이지. 그러니 자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동리 사람들에게 장벽의 필요성을 알려주었으면 하네.”

“대인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소인 또한, 사람들에게 장벽에 대해 알리겠습니다.”

“그래.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가 철저하게 뭉쳐서 올바른 쪽으로 힘을 써야 모두가 안전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네.”

“명심하겠습니다.”

방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관에서 온 손님 또한, 자경단 역할에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하는 자네 모습을 꽤 마음 들어했네.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동녘에서 온 귀인들은 수가 많지 않아서 항상 사람이 모자라. 물론, 아무 사람이나 모자란 건 아니지.”

방 진사의 당부에 자경단 사내가 숨을 삼키고는 답했다.

“그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대인.”

“음!”

두 사람은 다과를 나누었고, 달리 보고할 게 없었던 자경단 사내는 금방 물러났다.

그렇게, 장원에 남게 된 방 진사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느긋하게 늘어졌다.

평생 학문을 닦아왔으나 끝내 관문에 이르진 못한 방 진사였다.

수차례 낙방하고 나니 자신의 재주는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그래서 원대한 꿈은 꿈으로만 남겨놓고서, 유유자적 살아온 게 지금까지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땅에는 새로운 주인이 들어섰으며, 그들은 버릇처럼 일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떨쳐내지 못해, 끝까지 미련으로 남았던 원대한 꿈이 다시 소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방 진사는 조선어를 배웠고 마을을 움직여서 점수를 쌓아왔다.

약간의 공로만 더 세우게 된다면…….

‘필경 관문에 이르게 되리라!’

방 진사는 강하게 확신하고는, 들뜬 마음을 식어버린 찻물로 달랬다.

서관도의 각 장원마다 흔히 보이는 야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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