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7화
“서관도와 동관도 모두 선전이 잘 이루어져, 백성들이 조금도 이반하지 않으며 도리어 나서서 장벽 건설에 임하고 있습니다.”
영의정 이상의가 보고했다.
“좋은 소식입니다. 백관이 힘써 논의하고, 또 공업에 힘써주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신하들이야 매양 진력하기 마련이옵니다. 이는 성상의 성도聖道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옵니다.”
왕이 신하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서로 치켜세워 준 뒤, 보다 냉정해진 어조로 물었다.
“서관도는 혼란한 북직예와 맞닿아 백성을 계도함에 부담이 덜한 줄로 아는데, 동관도는 어떻습니까?”
서관도의 백성들이야, 당장 옆집이 불타오르니 나서서 담장을 쌓는 건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관도는 금나라가 다스린 지 제법 된 요동 지역의 해안가로서, 왕이 보기엔 서관도처럼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유인이 없었다.
“동관도도 사정은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래요?”
“금나라의 치세는 아조와 달리 영화롭지 못하옵니다. 이미 굶주린 백성들을 핍박하고 수탈하며,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켜 사지로 내몰아내니, 민심이 돌아선 지 오래되었습니다.”
요동의 백성들은 금나라에 반감이 강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거주지가 조선령으로 할양되니, 금나라와의 연을 끊고자 기꺼이 장벽 건설에 자원했다.
“동관도의 백성들은 저들이 아조의 신민이 되었다는 소식에 만세를 외쳤다 하므로, 그들이 유순하게 복종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이상의의 첨언에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이 없어 여전히 미개하고 야만스런 금나라의 백성으로 남기보다야, 영화로운 아조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게 기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제후국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만세萬世의 칭송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는 점 역시, 신하들에게는 썩 마음이 드는 부분이었다.
“동관도의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니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금나라에서는 편치 못하게 생각하겠지요.”
조선이 환영받는 만큼 금나라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국경에서 난잡하게 퍼진 소문으로 요동의 백성들은 저들이 조선에 복속되니 마니 다투었을 것이며,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다면 고향마저 저버리고서 넘어왔으리라.
그리고 많은 마을이 국경에 걸쳐 있을 텐데, 죄 조선령에 편입해 달라고 호소한다면 그 목소리 또한 작지 않을 터였다.
백성들의 절박하고 필사적인 이민 및 이탈은, 그들을 착취하여 유지되는 금나라로서는 절대로 반가울 수 없었다.
이에 이상의가 답했다.
“금나라의 여론 또한 주시하고 있으나, 그들이 백성들에겐 불만을 품더라도 아조에 불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요동 쪽 해안이 할양된 건 강탈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금나라가 부족한 식량을 수입하고자 대금으로서 지불한 만큼, 이젠 배가 부르다고 무를 순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리와 상식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
좌의정 남이공이 반대했다.
“금나라는 최근 북직예를 점령했고, 무수한 중원의 백성을 노예로 거느리게 되었으므로, 그들을 화살받이 삼아 아조에 해를 입히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피지배민을 앞세워 화살받이로 삼는 건 기마 민족의 유구한 전략이었다.
금한 호격의 부친인 홍태주 또한 제가 복속시킨 야인여진과 몽골인, 요동민을 앞세워 의주를 침공한 전력이 있다.
“오랑캐가 괄시받은 이유는 비단 그들의 습성이 미개하고 배우지 못하여 야만적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남이공이 덧붙였다.
“그들이 배우지 않고 외면하는 건 학문만 아니라, 역사와 전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세대에 이어 망각과 만용을 거듭해 왔으므로, 아조가 누대에 걸쳐서 북방의 오랑캐들과 부딪쳐온 것입니다.”
이에 이상의가 물었다.
“좌의정께서는 호격 또한 아비와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키리라 보시오?”
“미래의 일을 어떻게 확신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므로 역사를 배우고 전례를 상고하는데, 북방의 야만한 족속은 세대를 걸쳐 반란하는 게 습성이므로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공이 강조하였으나, 결국에는 그게 그 말이었다.
어쩌면 호격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
“아조가 호격과 금나라에 있어 위압적인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들에겐 목숨줄과 마찬가지인 식량을 쥐고 흔들어대며, 요동의 진귀한 자원들은 특혜를 받아 값싸게 가져가고 있다.
양국의 관계가 이렇게 된 건 분명 금나라가 먼저 조선을 침공했으며, 그러다 패배했기 때문이지만, 그 장본인이 아닌 호격으로선 억울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 이해는 할 뿐 배려까지 해주어야 할 부분은 아니다.
호격이 홍태주에게서 물려받은 건 아비의 죄과와 그에 따른 징벌만이 아니었다.
덕분에 한의 지위를 물려받아 금나라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안 취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은 입은 건 몰라도 잃는 건 잘 아는 법이었고, 오랑캐일수록 그런 습성이 강한 만큼 조선은 주의할 수밖에 없었다.
못난 오랑캐들이 입은 은혜는 망각하고 제멋대로 부당하다 확신하여 주인을 몰려들지 누가 알겠는가.
“신이 토벽과 목책을 권한 건 국경이 길어 하루아침에 장성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안도하지 않고 석벽까지 세운다면 서관과 동관이 모두 안전해지며 바다 또한 오롯이 아조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에 우의정 김류도 찬동했다.
“좌의정의 계책이 참으로 치밀합니다. 수고스러움은 분명 비할 바 없겠으나, 백성이 순종하고 얻을 이익이 분명하며, 나아가 장성을 쌓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성문은 삼가고 군대가 몰래 입출할 수 있는 암문暗門을 틈틈이 만들어둔다면, 장차 불미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장벽을 두고 군사가 자유롭기 진퇴하며 반란한 무리를 단숨에 깨트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우의정의 계책 또한 참으로 날카롭습니다!”
남이공이 칭찬하자 김류가 공손하게 겸양했다.
“이는 다 된 밥에 수저만 올리는 것으로, 좌의정께 치하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치하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남이공은 발끝을 용상으로 돌리고서 고했다.
“전하, 우의정은 공조판서를 거듭 연임하며 토목과 공사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과연 김류는 공조판서를 맡아 선혜법 시행에 필요한 기반시설 확대를 전담해 왔다.
그래서 충청도와 황해도, 전라도의 일부 지역까지 김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 과정이나 결과물이 안 좋은 쪽으로 거론된 적 또한 없었다.
김류가 치밀하게 감독해왔다는 방증이리라.
왕이 답했다.
“나라의 백년대계인 선혜법이 오늘날까지 이룩된 데는 우의정의 덕이 크지요.”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우의정에게 재차 재능을 발휘하게 하신다면, 마찬가지로 나라의 백년대계인 서관과 동관의 안녕에서도 큰 실효를 거두지 않겠사옵니까?”
이에 왕이 남이공에게 물었다.
“우의정께서 맡아주실지 모르겠군요.”
뻔히 당사자를 세워두고서 남에게 묻는 의도야, 남이공도 잘 알고 있었다.
“우의정은 나라에 몇 없는 대신이자 인재이고, 작은 일보다는 큰일을 맡는 데 탁월하며, 국가의 백년대계에 있어선 응당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적임자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의정이 아니라면 누구를 쓰겠습니까?”
남이공이 거듭 치켜세우며 갖은 호들갑을 떨어대니, 김류야 당연히 부정하지 않고 콧대 세울 따름이었다.
정직하기 짝이 없는 반응.
왕도 김류를 의정으로 삼은 보람이 느껴졌다.
“우의정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나와 만백성을 위해 양관의 장성 축조를 감독해주시겠습니까?”
이에 김류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이미 신이 간절히 바랐던 바이온데, 성상께서 맡겨주신다면 분골쇄신의 각오로 성심성의하여 받들겠사옵니다.”
“우의정께서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기껍게 맡기지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류가 굽실대며 답하자, 왕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일렀다.
“서관과 동관은 팔도와 사정이 달라, 각기 바다와 강 너머에 있으므로 대업을 한양에서 감독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마침 우의정은 바다 너머를 방문하신 적도 없으니, 이참에 거처를 옮겨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처를 옮긴다 하심은…….”
“그야, 서관이나 동관으로 처소를 옮겨 그곳에서 공사를 감독하시는 것이지요. 그편이 우의정께서도 일이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왕이 제안하자 김류는 갑자기 소심해져서는 몸을 웅크리고서 답했다.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지당하시오나, 신이 바다를 건넌 적이 없어 과연 이역만리에서도 감독과 함께 의정의 직분을 잘 유지할 수 있을지…….”
“청래도와 서관도, 동관도는 합쳐서 숫자가 팔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나 중요함으로 따지자면 내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감사들만이 위태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나로서는 많이 불안합니다.”
김류가 항변할 새도 없이, 왕은 못을 박듯이 덧붙였다.
“우의정이 외지에서 태산이 되어 중심을 지켜준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김류는 참으로 난처했다. 어째서 의정까지 되어서 바다를 직접 건너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본인이 먼저 장성의 일을 받아들였으므로 내세울 말이 마땅치가 않았다.
“…….”
궁지에 몰린 김류가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자신을 부채질한 남이공이었다.
그러나, 그런 남이공도 오래전에는 북경에 반쯤 상주하다시피 했으며 예조판서로 부임한 뒤에도 금나라와의 일로 의주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자칫 어설프게 따졌다가는 되레 큰소리들을 게 뻔했다.
슬쩍, 시선을 피해버린 김류가 다음으로 마주한 이는 말석의 공조판서였다.
김류의 뒤를 이어 공조판서가 된 인물은 전임 병조판서인 김세렴이었다. 그는 도원수 정충신에게 병조판서의 자리를 내어준 뒤, 비게 된 공조판서를 맡은 것이다.
그런 김세렴을 잘 포장하여 자기 대신 바다 보내는 건 어떨까, 고민하던 김류에게 김세렴이 말했다.
“우의정께서는 부디 염려치 말아주십시오. 대감을 본받아 전라도의 나머지 일은 부끄럽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크, 크으음!”
멋쩍어진 김류가 괜히 헛기침을 토해냈다.
그렇게 추한 모습도 제법 보여주었으나, 김류는 본디 제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대체로 끝까지 도망치지는 못하기 마련이고, 이는 김류도 마찬가지였다.
“……성상께오서 신에게 과분한 소임을 맡겨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우의정을 바다 건너에 오래 두지는 않겠습니다.”
“……!”
“사업이 크게 진척되어, 우의정이 가까이서 감독하지 않더라도 차질이 없다 확신하신다면 언제든지 돌아오셔도 됩니다.”
왕의 말은 얼핏 관대하였으나, 뒤집어서 해석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결과에 책임 질 자신이 없다면 부르기 전까지는 알아서 돌아오지는 말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천 리里에 걸쳐 장성을 쌓는 게 백 번 만전에 완벽을 기한다고 마음대로 될 일인가.
김류는 기세가 푹 죽어서 답했다.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