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98화 (29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98화

서관도와 북관도가 설치되자 조선의 본토에서는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

영향만 따지면 이 바람은 돌풍보단 폭풍에 가까웠다.

예로부터 강조되어온 개념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그 개념이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세상이 달라져도 농부들은 여전히 천하의 근본이다.

사람들이 사람 그 자체를 탈피하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그러나 상업이 크게 진흥하면서 많은 사람이 장사에 투신하였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 역시 병작반수竝作半收라는 살벌한 소작료를 피해 요동과 중원의 조선령으로 기회를 찾아 떠났다.

때마침 해운海運 또한 발달하여서 기회를 바라는 이들은 얼마든지 바다 건너로 진출할 수 있는 상황.

여기에, 각처로 빠르게 확산하는 이앙법은 농촌에서의 일손 부족을 가속했다.

이앙법은 적절한 조건으로는 단위 면적당 작물의 생산량을 폭증하나, 대신 모내기와 같은 특정한 시기에 막대한 인력을 요구했다.

그런데 농업은 절기에 따라서 치밀하게 진전하지 않으면 한 해의 농사를 다 망쳐버리게 된다.

무수한 일손이 시의적절하게 공급되어야만 이앙법은 물론이고 농촌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촌에서는 농사꾼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고을마다 유지로서 군림해온 만석꾼, 천석꾼이라도 혼자서는 방대한 논밭을 다 일굴 수는 없는 법.

반드시 소작농들이 있어야만 땅을 놀리지 않는데, 세상이 달라져서 소농들이 소작 외에도 생계를 이어갈 장소가 많아졌으니 이제는 지주들이 소농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로 이앙법을 체계적으로 도입했고, 그 후유증으로 인력의 부족까지 겪었던 경기도 여주목에서는 변화 역시 한발 빨랐다.

“크흠!”

잘 차려입은 선비가 막 논으로 나온 농군을 찾았다.

농군은 뜬금없이 방문한 손님에 당혹하였는데, 선비는 여기서 볼만한 사람이 아닌 탓이었다.

길을 오가면서 양반들과 마주하는 일이야 흔하지만, 당장 농군은 논 위에 있었고 이 땅은 마주한 선비의 것이 아니었다.

“……생원 어르신?”

“알아보기는 하는군.”

“예, 이 마을에서 김 생원 어르신을 몰라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부모에게서 넓은 농지를 물려받아, 무수한 소작농을 거느린 고을의 실세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생원 어르신께선 소인에게 어인 일로…….”

“일은 잘되고?”

뚱딴지같은 대답이었다.

“예…….”

“소작료는 얼마나 되나?”

“남들과 다 똑같지요. 병작반수竝作半收입니다.”

소작농이 수확물을 거두면 지주가 절반을 가져간다는 원칙이다.

지주가 단순히 토지만 빌려주는 데 반하여, 소작농은 한 해를 꼬박 중노동을 해야 하니 이러한 배분은 불공정한 면이 강했다.

소작농이 상업에 투신하거나 바다 건너의 버려진 땅을 개척하려는 이유였다.

이에, 지난 평생 병작반수로 땅을 빌려주었던 김 생원이 과장하며 놀랐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병작반수를 한다는 말인가?!”

“……어음, 안 그래도 박 어르신께선 내년부터 6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허!”

김 생원은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는 듯, 거칠게 탄식하곤 말했다.

“내가 그 늙은이를 좋게 보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몹시 나쁜 사람이었구만?!”

“왜, 왜 그러십니까요?”

“으음. 자네가 들으면 아주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요, 말씀해 주시지요!”

“음……. 그래! 내 특별히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나 역시 내년부터는 소작료를 크게 깎을 생각인데, 이제는 삼분지 일만 가져가고자 하네!”

김 진사가 이만한 대출혈도 없다는 듯, 곤란한 얼굴로 외쳤다.

“어, 삼분지 일이라면…….”

“자네가 나와 함께 일한다면, 가져가는 게 육 하고도 반! 추수 때 열 가마니가 나왔다고 치면 자네는 반 가마니 더 가져가는 셈이지!”

“아…….”

“이런 좋은 기회가 있는데 박 어르신은 자네에게서 반 섬을 다 가져가려고 했으니, 참 못된 늙은이 아닌가?!”

김 생원이 마치 제가 당하기라도 한 양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니, 농부는 주변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 어르신에게는 그렇게 주겠다는 말만 들었지, 내년에도 이 땅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약조하지는 않았습니다요.”

“흐음……. 그런가?”

“예!”

“그럼, 자네는 내년에는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아이구, 권해주시다면 소인이야말로 감읍합지요!”

그렇게 김 생원과 농부가 머리를 맞댄 채 빈 땅은 어디가 있으며, 면적은 얼마나 되며, 주변의 관개시설은 어떤지 한참 논의하던 와중이었다.

“야아!”

멀리서부터 고함이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들이 마주한 이 역시 예상대로였다.

“어, 어르신!”

농부는 혹 배신을 모의했냐며 타박이라도 당할까 기겁했으나, 땅 주인인 박이 쫓은 건 농부가 아닌 김 생원이었다.

“네놈이 감히 귀한 소작을 빼돌리려 들어?!”

“소작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잘 주는 사람에게 가는 거지!”

“이놈이!”

박 어르신은 위협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댔고, 김 생원은 공격을 피해 경사진 논두렁을 두 손 두 발로 타고 올라가 외쳤다.

“생각 있으시면 찾아오시게! 저 못된 늙은이보단 무조건 더 잘 쳐줄 테니!”

“꺼져!”

김 생원은 박 어르신이 투척한 지팡이를 피하고는 발 빠르게 도망쳤다.

그리고, 간만에 추격전을 벌였다가 지팡이까지 잃은 박 어르신은 휘청거리면서 움츠린 농부를 찾았다.

“아이고.”

“괘, 괜찮으십니까요?”

“나는 됐고, 자네는 어떤가?”

“소인이야 뭐어…… 멀쩡합니다요.”

박 어르신은 안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보나 마나, 저 독사 같은 놈이 자네를 꼬드겼겠지? 잘해줄 테니 자기 땅에서 소작을 지으라고 말이야.”

“예…….”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믿으면 안 돼! 나랑 자네가 같이 일한 지가 한 세월인데, 어디서 구르다 왔는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놈에게 신변을 맡긴단 말인가?!”

박 어르신의 절절한 호소에도 농부는 멋쩍을 따름이었다.

박에게서 땅을 빌려 입을 풀칠해온 세월이 과연 짧지는 않았으나, 서로 긴밀하게 지냈냐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접점이라곤 기껏 해봐야, 추수 때 사람을 보내서 작물을 빼돌리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어렵사리 거둔 한 해 수확의 절반을 대수롭지 않게 가져가는 게 전부였으니까.

먹고는 살아야 하므로 마지못해 소작을 부쳐왔을 뿐 고맙게 여기거나 동업자처럼 느낄 여지는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일꾼이 귀해져 지주들이 서로 소작농을 빼앗게 되었다고 예전부터 한 가족이었던 양 군다는 말인가.

“어음…….”

농부는 새삼 돌이켜보니 어이가 없어져서, 용기 내어 말했다.

“김 생원은 삼분지 이를 주겠다던데요.”

“뭐어?!”

박 어르신은 기겁을 하고는, 눈치를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속삭였다.

“알았으니 못된 김 생원에게 가지 말고 여기서 계속 일해주시게……. 응?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짧지 않잖은가.”

“어르신께서도 삼분지 이를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으으으으, 그래!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녀서는 안 되네. 알겠지?!”

박 어르신은 지장이라도 받아내겠다는 듯, 농부의 두툼한 손아귀를 낚아 부여잡았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글공부 조금 하다가 때려치우곤 반 백 년 여생을 한량처럼 살아온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력이었다.

오죽하면 농부조차 흠칫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응해버릴 정도.

“아, 알겠습니다.”

“그래…….”

박 어르신은 아쉬움이 강했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곤 덧붙였다.

“알았다니 다행이로군. 열심히 일하시게. 또 못된 놈이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면 내게 꼭 알려주고. 알겠나?”

“예, 예.”

박은 맞잡은 농부의 손등을 두들기고는, 발을 돌리고서 자신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찾으러 멀어졌다.

농부에게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오늘이었다.

그동안 불쌍한 소작들의 골수만 빨아먹어 온 지주들이, 이제는 서로 소작을 데려가기 위해 다투고 있으니까.

이제야 사람 비슷한 대접을 받는 듯했다.

배분의 비율도 조금 올랐고.

흥이 오른 농부는 다시 기분 좋게 일에 빠져들었다.

* * *

많은 신하가 지주들을 대표해, 혹은 그들 중 하나로서 소작료의 급락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건 왕으로선 알 바가 아니었다.

지주들이 조정의 신하들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그들의 목소리가 곧 신하들의 목소리기도 하지만, 조정에서의 입지와 지배력은 왕이 훨씬 우월했다.

저들의 여론에 휘둘릴 이유가 없는 셈이다.

또한, 왕 역시 방대한 대토지의 소유자로서 지주이긴 하나 여느 지주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곡식 가격이 하락했을 때부터 흐름에 대응해 인쇄 및 출판이라는 차기 사업을 육성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왕이 잡다한 군소리에 연연치 않는 데는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시대에서 국가와 사회, 경제의 밑바탕인 소작농들의 품귀 현상은 긍정적인 변화 외에도 다양한 부작용 역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중 왕이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노비奴婢의 가치 상승이었다.

“노비의 몸값이 올라가는 게 어째서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영의정 이상의가 물었다.

“소작농이 귀해져 일손 구하기가 힘들어진 상황에, 노비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노비는 오롯이 밥값만 들여서 노동을 충당할 수 있다.

인력이 귀해진 시대에 노비의 몸값이 올라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

“마침 소작농에게 땅을 빌려주는 건 소작료의 인하로 지주들에게 매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입니다. 당장은 땅을 놀릴 수 없어 그렇게라도 땅을 빌려주곤 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이 덧붙인 말에 이상의가 즉각 대답했다.

“소작농들을 노비로 대체하고자 할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마침 노비의 몸값이 크게 올라가고 있으니, 노비 주인들이라면 강력한 유혹에 시달리지 않겠습니까?”

소유한 노비들에게 어떻게든 아이를 더 낳도록 하는 것이다.

수요는 무궁무진하고, 가치는 천정부지로 오르며, 전통적으로 수입을 조달해온 소작료는 하락하고 있다.

평범한 상황에서는 꺼림칙하게 여길 일이나 강력한 유혹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유혹을 견디지는 못한다.

“인간성을 포기한 소수가 그에 따른 보상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면, 이는 본보기가 되어 나라 전체에 혐오스럽고 지독한 파문이 되어 퍼져나갈 것입니다.”

“으음……!”

“나는 나의 백성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두가 그런 천박함에 전염되지 않더라도, 천박해지지 않는 게 상대적으로 손해를 봐야 할 죄처럼 여겨진다면, 우리는 국격의 밑바닥을 시험하게 될 테지요.”

왕이 이전 세계에서 흔히 보아온 광경이었다.

왕은 그러한 광경이 새로운 역사에서도 재현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