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9화
영의정 이상의도 왕이 우려하는 바는 깨달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막상 그러한 일이 만연하게 벌어진다면 어떨까.
이상의는 순간 욕지거리를 느꼈다.
그 불쾌한 감정을 어렵사리 떨쳐낸 이상의가 말했다.
“하교하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비가 아예 없어져야 하옵니다.”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노비 제도는 조선이 건국한 순간부터 존재해왔다.
여러 강성하고 진취적인 왕들은 일관적으로 이 흉악한 제도를 꺾고자 시도해 왔으나, 좀처럼 좋은 결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노비들은 과거에도 대지주와 권력자들의 핵심 재산이자, 여타 재산들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니까.
태종의 치세에 들어서는 사병私兵의 보유가 금지되면서 노비들은 유사시 타격이나 방위의 용도로도 이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인력으로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노비라는 존재는 권력자와 자산가들에게는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이러니 진취적인 왕들이 아무리 노비제의 위상을 깎아내고자 해도,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거나 종내에는 복구되어 매번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왕을 제외한 십중팔구의 위정자들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 골수까지 찌들어버린 못된 습성이다.
이는 왕도 각오해야 할 부분.
“법령을 제정하여 인습因習을 완전히 타파하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법을 세우시겠다면 먼저 백관의 공론이 따라야 하옵니다. 그러나 대개의 신하는 인습을 폐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더 많은 노비를 원하므로 쉽지 않사옵니다.”
개인의 인품과는 별개로 십중팔구가 다 그러했다.
단순히 노비가 재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비가 당연한 세상에서 태어나, 노비가 당연하게 제공되는 편의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노비를 거느리며 무수한 편의를 제공받는 유력자들에게 노비 제도의 폐지란 하루아침에 신발을 없애버리자는 것과 마찬가지.
그럴 이유도, 필요도 못 느낄 수밖에 없다.
“좌의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이 고개를 돌리고서 묻자, 이상의 옆자리에 앉은 남이공은 대뜸 탄식부터 내질렀다.
“허어어어…….”
그러면서 남이공은 고개까지 저었다.
노비의 폐지.
이에 대해서 남이공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자, 가장 확실한 반응이었다.
“명망을 가진 관리들도 빠짐없이 가진 것이 노비이며, 개중에는 수십 수백의 노비를 거느리는 자들도 있는데, 집안 전체까지 아우른다면 능히 수천에도 달할 것입니다.”
대유大儒라 일컬어지는 퇴계 이황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선조에게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게,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지 못하게 하라.’는 식으로 간언했다.
하지만 그런 이황조차도, 혼자서 수백에 달하는 노비를 거느렸다.
단지 노비가 많을 뿐이라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이황은 나아가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양인良人과 통혼시켰다.
부모 중 어느 쪽이라도 노비라면,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에 따라 자식 또한 노비가 된다는 점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노비를 양산하려 한 것이다.
이황이 정녕 이러한 행위에 인륜적 도의적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식을 느꼈음에도 단지 입만 산 위선자에 불과하여 저질렀을 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이공이 지적하고 싶었던 건, 노비를 통해 이익을 얻고 편의를 누리는 건 대유로 칭송받았던 이황조차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조차도 예외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막상 제도를 폐지하더라도, 계속 살아온 주인의 집 외에는 의탁할 곳이 없다는 점 또한 문제이옵니다.”
과연 그러했다.
예속된 신분인 노비로서는 재산을 축적한다는 게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주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주인의 땅을 경작하는 외거노비라면 부정하게라도 알음알음 재산을 축적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주인과 함께 살면서 의식주를 오롯이 의탁하는 솔거노비라면 상황은 난처하다. 독립하는 순간 몸뚱이만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비들에게 해방이란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반대로 악용될 여지는 차고 넘쳐서, 사악한 주인이 늙고 다쳐서 쓸모가 없어진 노비를 내쫓는 수단으로 해방하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하니 가진 자들도, 가지지 못한 자들도 노비의 폐지를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다.
노비 제도의 폐지를 전적으로 찬동하거나, 하다못해 반감이라도 가지지 않는 건 오로지 집안이 완전히 영락해 버려 부리는 사람 하나 없는 잔반殘班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라야 딱히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남이공이 말했다.
“신이 감히 아뢰건대, 노비의 폐지는 한순간의 정성으로는 이룩하지 못할 줄로 아옵니다.”
그러자 곁에서 듣고만 있던 이상의가 나섰다.
“좌의정은 성상의 하교를 듣지 못하였는가?”
“마땅히 경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유약한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 장차 지주들이 더 많은 노비를 원하게 되고 그들의 몸값 또한 올라갈 터인데, 엉성하게 한 발자국씩 떼어서 언제 제도를 폐지할 수 있겠는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였으나, 섣부른 처치로 자칫 소를 죽이진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와 남이공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러나 왕이 보건대, 두 사람의 말은 모두 틀리지 않았다.
“현재 상황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으니 서둘러야 하는 게 맞으며, 인습이 나라의 골수까지 스며들어 정체성이 되어버렸기에 신중해야 하는 것 또한 맞습니다.”
“그러나, 두 방식을 모두 취하지는 못하옵니다.”
남이공이 공손하게 지적하였으나, 이내 이상의가 물었다.
“어찌하여 두 방식을 모두 취하지 못한단 말이요?”
“…….”
남이공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돌아보았다가, 이내 이상의의 저의를 깨우치고는 되물었다.
“두 방법을 동시에 쓰자는 말씀이십니까?”
다소 의심스럽다는 어조였다.
“그렇소이다.”
“……말로는 불가능한 게 없는 법입니다.”
“이 사람은 이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강경하고 단호한 수단에 더해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방법을 병행한다면 후자는 쉽게 묻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양자를 잘 조율한다면 두 가지 방법의 효용을 동시에 거둘 수 있지 않겠소?”
“자칫 일만 더 복잡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남이공이 단호하게 대답하니, 이상의가 느긋하게 답했다.
“유연함과 우유부단함은 종이 한 장의 차이요.”
“소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의정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이 오갔다.
보통은 논의가 이렇게까지 과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비 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결부한 것인 만큼, 이를 두고서는 누구라도 조심스럽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인 셈.
다만 두 사람이 각기 해석하는 바와 최선이라 여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에 왕이 말했다.
“두 분이 모두 나의 근심을 해결해주기 위해 마음을 써주시니 참으로 고맙고, 또 보기 좋습니다만 이대로는 두 분 사이에서 논쟁만 이어질 듯합니다.”
왕은 고개를 돌려보는 두 사람을 마주하고서 덧붙였다.
“그러니 두 분이 각기 동원하고자 하는 방법을 세심하게 고안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각자가 최선의 해법을 분명하게 규정하고서 서로 비교하고 논의한다면 진전이 클 것입니다.”
이에 이상의가 응했다.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좌의정께서는요?”
“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에게 일렀다.
“두 분은 모두 의정으로서 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이고, 대체할 수 없는 귀한 인재들입니다. 그러니 모쪼록 각기 안고 계신 사명에 부끄럽지 않은 해답을 가져오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노비 제도가 민감하고 난처한 문제라는 건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때로는 발생하는 법이며 나라에서는 이에 대응하고자 품계에 차등을 두었고 품급에 따라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이런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만백성 중 최고의 지성이며 백관의 대표이자 동시에 우두머리인 의정의 역할. 이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의정을 맡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삼가 대왕의 성지聖旨를 받들겠사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절을 올렸다.
* * *
이상의와 남이공이 예를 올리고 떠나간 뒤.
왕은 식어가는 빈자리를 앞둔 채로 일렀다.
“다 들으셨습니까?”
왕이 이른 나이에 망령妄靈이라도 들었거나, 혹은 두 번째로 망령亡靈이라도 씌인 건 아니었다.
집무실은 편전에 속한 장소다.
혹자는 궐이라면 벽에도 귀가 달려있다고 하는데, 이는 궁인宮人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왕이 기거하며 공무를 보는 편전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다 들었사옵니다.”
과연 벽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왕에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들어오세요.”
“예에.”
공손하게 응하며 옆문을 열고 나선 이는, 내시부의 수장이자 차기 은행장으로 내정된 최 상선이었다.
“상선이시라면, 나의 말을 듣고 즉각 품은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질문.
그러나 최 상선은 곧바로 수긍했다.
“예에…….”
그럴 수밖에 없다.
기실, 노비 제도를 폐지한다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게 왕실이기 때문이다.
내수사에 속한 방대한 토지를 경작하는 건 조정의 관리도, 내시부의 내시들도 아니며 전부 소작농이 떠맡는 것도 아니다.
왕실 자산의 일종으로서 내수사에 속한 무수히 많은 노비들이 부족한 소작농들의 자리를 메꿔주는 것이다.
제도를 폐지하여 이들을 모두 자유의 몸으로 만든다면, 내수사가 겪을 변화의 폭풍은 천석꾼이나 만석꾼과는 비할 수조차 없었다.
“정녕 전하께서는 제도를 폐하고자 하시옵니까? 많은 사람이 반기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렵사리 이행하더라도 한동안은 극도로 혼란스러울 것이며, 내수사 또한 크게 흔들릴 것이옵니다.”
이미 예상했던 상선의 우려에, 왕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평소에도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서로 노예로 삼는다는 걸 온당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급변하여, 서둘러 대처하지 않으면 악화될 것이 분명하므로 시급히 나서는 것이지요.”
미리 손을 써야 한다.
때마침 왕권 역시 거듭된 성세로 정점에 다다른 참.
그 힘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권력의 낭비 아니겠는가?
물론,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졌더라도 처리가 불공정하다면 억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특권을 내려놓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먼저 포기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요.”
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최 상선이 공손하게 허리 숙였다.
“다른 위정자들도 다 전하와 같았다면 이 나라에는 진즉 태평성대가 펼쳐졌을 것이옵니다.”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왕은 쓰게 웃고는 일렀다.
“이 안에 대해서 나의 의지는 분명하고 또 확고하니, 상선께서는 은행과 내수사 모두 뒤이을 여파에 대응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받들겠나이다.”
최 상선은 수긍과 함께 예를 올리고서 물러났다.
노비 제도의 폐지.
거대한 장애를 맞이한 왕은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이 나라의 정체성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인습을 없앤다는 건, 고작 시도조차도 권력이 정점에 오른 왕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욕심낼 수 있는 만용이었다.
성패는 물론 장담할 수 없다.
이 나라의 모든 위정자와 권세가들이 모두 잠재적인 적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