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0화
왕이 두 의정을 만난 뒤, 조정의 분위기는 다소 무거워졌다.
의정들이 왕을 만날 일은 항상 나라가 중대사를 앞두었을 때뿐이니까.
무언가 작지 않은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건 금상의 치세에서 녹을 먹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백관百官을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건, 회의의 내용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지간하면 의정부나 어전을 통해서라도 무슨 논의가 오갔는지 알려질 법도 하건만, 두 의정이 모두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하들을 더욱 겁먹게 했다. 도대체 어떤 중대사이기에 의정씩이나 되는 대신들이 입조심을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달을 낸다고 알 수도 없는 노릇.
백관은 그저 평소처럼 자신의 소임을 다하면서도 언제 닥칠지 모를 돌풍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 * *
남두북南斗北은 한양을 수호하는 수방사의 장교였다.
그의 이력은 제법 화려하다.
오래전 무과에 급제한 이래로, 북방군과 수방사는 물론 비사성의 원정군과 산동의 원정군에 모두 참여했으니까.
그러다가 산동이 청주가 되고, 청주와 내주가 되었으며, 청래도로 병합될 즈음에는 파견 기간을 채우고 귀국했다.
전장을 거듭 전전하였으므로 생사를 시험할 일이 많았고, 가까스로 살아난 적도 많았다.
대신 그 모든 역경과 고비를 넘어선 남두북은 갖은 전공을 세우고 제법 높은 위치에 올랐다.
이제는 부친의 앞에 서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아버지.”
남두북은 오래간만에 부모의 댁을 방문했다.
방문을 미리 통기通奇했기 때문일까.
부친은 마당을 앞둔 채 마루에 서서 막 들어선 아들을 맞이해 주었다.
“왔느냐?”
“예.”
“이리로 오거라.”
남두북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부친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섬돌 앞에 서자 부친 좌의정 남이공은 섬돌로 내려와 아들의 얼굴을 만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더니 남이공은 문득 웃었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아버지께서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야 원래 늙은이니 늙은 건 당연하다만, 너는 나보다도 훨씬 젊은데 나만큼 늙지 않았느냐?”
“…소자도 젊다고는 못 할 나이입니다.”
“내 눈에는 아직도 핏덩이 같거늘.”
남이공은 실소하고는 손을 거뒀다. 그리고 섬돌에서 물러나며 일렀다.
“안에 들어가 있거라.”
“아버지께서는요?”
“나는 잠시 부엌에 다녀오려 한다.”
“부엌에 말입니까?”
“그래.”
남두북은 좌의정을 지내는 부친께서 부엌을 들를 이유가 무엇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남두북이 생각하는 부친은 부엌이라면 일부러라도 피할 사람이었으므로 좀처럼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부엌은 사대부가 방문하기엔 품격이 떨어지는 장소였으니까.
그러나 자식이 되어 부친의 행보에 거듭 의문을 드러내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은지라, 남두북은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아버지.”
“그래. 기다리고 있거라.”
남두북은 방문 앞에서 부친을 배웅한 뒤, 먼저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예전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방구석에는 경전과 도서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서안에는 때마침 펼쳐놓은 책이 있었다.
얼핏 보니 종이가 희고 쓰인 글자가 언문인 걸 보아, 근래에 나눠진 언문본 대학大學일 듯했다.
남두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 그는 명문 반가의 자제로서 문중과 부친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자신은 학문에 소질이 없었는지 가장 기초적인 시험인 소과에도 낙방만을 거듭했다.
이는 흔히 외지外地의 선비들에게 형평성을 지적받는 별시別試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남두북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학문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명문 반가의 자제로서 그것을 인정한다는 건 자존심도 상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중과 부친께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기약 없는 노력만 들이다가 평생을 한량閑良으로 지새우는 건 더더욱 죄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남두북은 책을 덮은 직후 곧바로 활을 들었다.
다행히 남두북은 학재學才는 모자랐어도 무재武才만은 충분했다.
무과에는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문의 길을 포기한 데 따른 자존심의 추락과 죄스러운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아서, 남두북은 부친과 문중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전장을 자원해 왔다.
그렇게 남두북은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제법 높은 위치에도 올랐다.
그래서 지금은 미련이 덜하냐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음.”
남두북은 침음과 함께 상념을 정리했다. 부친을 기다린 시간이 제법 되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 탓이었다.
남이공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남두북으로선 상상조차 못 했던 광경이었는데, 바로 남이공이 직접 소반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고지식한 선비이자 관직마저 좌의정에 다다른 부친이 직접 소반을 옮길 일이야 있겠는가.
남두북은 일순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가, 꿈이 아님을 직시하고는 부친이 가져오는 상을 받았다.
“아, 아버지?”
“서안 앞에 놓아라.”
“예….”
남두북이 소반을 놓는 동안 남이공은 서안을 치웠다.
소반에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준비하는 사람의 실력이 썩 좋지는 않았는지 뜨거운 물이 여기저기 흘러내린 채였는데, 덕분에 남두북은 어렵지 않게 이것이 부친이 직접 내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소자에게 시키시지, 어찌 소자에게 앉아서 대접받는 불효를 강제하십니까?”
“아니다. 이건 내가 너를 불효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소일거리를 행함으로써 그간의 편의와 수고로움을 직접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어찌하여 노비들은 다 내버려 두고 이런 수고를 자처하십니까.”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남이공은 짧게 답하고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자, 잡스러운 이야기는 이쯤하고 목이나 축이자꾸나. 네가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예….”
남이공과 남두북은 각자의 잔에 차를 내렸다.
다과상을 내오는 실력은 깔끔하지 못했으나, 찻잎이나 뜨거운 물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차의 향취를 느끼며 목을 축였고 잔이 반절쯤 비자 남두북이 입을 열었다.
“최근 소자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전하와 의정들 사이의 긴밀한 일 때문이냐?”
에둘러 말하기 무섭게, 남이공은 날카롭게 찔러왔고 남두북은 부정하지 못했다.
“……예.”
“그렇다면 내가 해줄 말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구나.”
남이공의 단호한 대답에 남두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근래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야 화려한 경력과 용맹, 유능으로 평판이 좋았으나 이는 군문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그러다 중앙의 조관朝官들에게서 갑자기 문의와 만남이 늘어나니, 칼잡이 명운에 자격지심이 강했던 남두북은 더더욱 이 기회가 아쉬웠다.
“정녕 소자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남두북이 강하게 억지를 부렸으나, 남이공은 대답을 서두르는 대신 찻잔만을 돌렸다.
남이공으로선 자신이 이미 보여준 모습이 답이 되고도 남았다.
평생을 고지식한 선비로 살아왔으며, 지금은 좌의정을 지내는 자신이 어찌하여 노비들을 다 차치하고서 직접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다과상을 준비했는가.
노비가 없어지면 어떨지 예행한 것이다.
아비의 이 지극히 이례적인 행동에도 아들은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알려줄 수가 없었다.
이 정도조차 안 되는 이해도로는 말조심조차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왕과 의정 사이의 일인데, 무엇을 알고자 한다는 말이냐.”
따지자면 불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과연, 앉아서 부친에게 대접을 받았다고 다 불효인가.
그보다는 일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부친과 나라의 위계 및 공공公共을 어지럽히는 게 진정 불효였다.
“이 아비를 생각한다면 너는 두말 말거라.”
남이공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고, 남두북은 입술을 움찔거리다 찻잔을 들었다.
다 식어버린 찻물로 아쉬움을 달랜 남두북이 물었다.
“요즘에는 무탈하게 지내시옵니까?”
“하하!”
아들의 물음에 남이공은 웃음이 터져서 일렀다.
“네가 공허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달리 용무는 없는 모양이다. 개의치 않으니 돌아가거라. 아니면, 내가 축객逐客이라도 해야 편하게 물러나겠느냐?”
“아, 아닙니다…….”
남두북이 멋쩍어하며 답하자, 남이공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가라, 이 녀석아.”
“예….”
그렇게 남이공은 간만에 찾아온 아들을 떠나보냈다.
기껏 아비를 찾아온 이유가 고작 내밀한 사정을 캐묻기 위해서라니 애석하기 짝이 없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이공 본인이라고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상념에 빠져들기엔 이미 거쳐온 세월이 많았다.
아들이 찾아오기 전에 고민하던 것도 있었다.
과연 노비들이 사라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단순히 개인적이기만 한 고민은 아니었다.
노비가 없어지고 그들 모두가 양민이 된다면, 이들을 머슴이나 날품팔이로 다시 고용할 수 없는 대부분은 이전과 같은 편의를 누리지 못할 터였다.
이 역시 노비 주인들이 인습의 폐지를 반대할 핵심적인 이유였다.
그 불편함을 직접 겪어보며 대안을 강구하지 않고서는 편의를 잃게 될 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진전은 아직까진 없었다. 남이공은 아궁이 앞에서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물을 끓이는 것부터 익숙하지 않았다.
* * *
며칠 뒤.
영의정 이상의와 남이공은 다시 왕 앞에 모였다. 각자가 생각한 방도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이상의였다.
“신이 사료컨대 노비의 제도를 유지하는 건 노비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이옵니다.”
그렇다면 해결법 역시 간단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노비 제도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이라, 아비와 어미 중 어느 한쪽이라도 신분이 노비에 해당한다면 자식 역시 노비가 되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노비가 되었는데, 이를 뒤집어서 일양즉양一良則良을 시행한다면 일천즉천의 결과 또한 뒤집을 수 있으리라 사료하옵니다.”
그리고 종내에는 노비가 모두 없어져, 자연스럽게 제도 또한 폐지되리라는 제안이었다.
인습의 강경한 폐지를 주장하였던 이원익의 제안치고는 상당한 세월이 걸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노비의 제도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와 한순간에 바꾼다는 게 불가능했다.
그간의 제도 변천을 사료한다면 일양즉양은 충분히 파격적이었다.
태종은 개국과 함께 고려조의 노비 제도인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으로 개정했으나, 세종의 치세에 고려의 천자수모법과 유사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 다시 회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조의 치세가 되어서는 법전에 일천즉천의 원칙을 명시화하여 최악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이후로는 왕의 성향에 따라서 도리어 개혁이 되어버린 노비종모법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이자 위정자들은 개혁의 추진력이 다하는 순간 다시 제도를 최악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이 추악한 퇴행의 반복은 건국시조인 태조는 물론, 여느 왕조차도 끝끝내 극복하지 못한 흐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일양즉양은 분명 과감한 정책이었다.
그 파격성이 과히 폭풍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일양즉양을 시행할 경우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는 왕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절대로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좌의정 남이공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는 놀라다 못해 기겁까지 한 얼굴로 말했다.
“영의정께서는 이 나라를 결딴내시고자 하십니까?!”
“이 사람이 결단내고자 하는 건 구차한 인습이지, 나라가 아니외다.”
“정녕 그러한 정책을 도입했다가 벌어질 일을 조금도 예상치 못하셨습니까?”
이에 이상의는 단호하게 답했다.
“겨울철 개울물 흐르듯 조용하게 지나가리란 생각은 이 사람도 하지 않소이다.”
“아시면서도 권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나라에 단단히 뿌리 박힌 못된 인습을 철폐하려면 응당 과감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소이다. 이는 사람의 병이 위중하면 독한 약을 써서 낫게 하는 것과 같아, 마다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영상께서는 일개 인명과 일국의 종사宗社를 같이 보십니까!”
“그렇다면 좌상께서도 말씀해보시오. 흉중에 어떤 상책이 있기에 타박만 한단 말이오?”
이상의가 추궁하자, 남이공은 입술을 말았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