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4화
“‘우리’를 강조한다면, 응당 우리가 아닌 ‘너희’도 강조될 수밖에 없지.”
왕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울타리를 쌓는 것이다. ‘너희’에 속하는 자들과 유감이 많아, 그것을 더 강화하기 쉽다면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지.”
“안에서 배격하는 대신 밖으로 배격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당연히 올바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나쁘지 않구나.”
조선이 의식하고 의지해온 명나라는 몰락해버려 장강 이남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조선과 당장 가까이 놓인 금나라와 일본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절대 친하게 지낼 수 없는 오랑캐들이다.
수백 년 된 해묵은 원한으로 증오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일본과 금나라의 침략은 비교적 최근에 속하며, 그 피해자가 여전히 살아 소름 끼치는 과거를 기억으로 품고 있다.
“주변에 적밖에 없다면, 반대로 말해서 어디를 향해서든 싸울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느냐. 포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후일에는 세태가 변화하여, 인습과 마찬가지로 한때의 적절한 제도가 고루한 구습으로 변하지 않겠사옵니까?”
세자의 우려에 왕은 태연히 답했다.
“그때는 그때의 왕과 신하들이 올바른 방향을 다시금 골라 나아가지 않겠느냐?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의 왕이, 세자일 수도 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법이고 최근의 조선은 특히 그래왔다. 당분간 이러한 기조가 달라지진 않으리라.
어차피 세계 역시, 빠르게 변모하는 중이니.
“이 아비가 벌인 일이 많아 세자가 고생할 것이 훤히 보이는구나.”
“성대한 기업基業이고 위대한 대계입니다. 아바마마께오서 물려주시려는 것 중 어느 하나 소중하고 대단치 않은 것 없는데, 고생인들 마다하겠사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조금은 덜 미안하구나, 하하.”
세자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왕은,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껴 앉고는 빈자리를 두들겼다.
“와서 앉아라.”
“예.”
이미 허다하게 권유받았던 용상의 한쪽 구석이었다.
이제 와 마다할 것도 아니었으므로, 세자는 그저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와 빈자리를 차지했다.
“세자도 이제는 아비의 비원을 알게 되었구나.”
“…노비제의 폐지 말입니까.”
“그래. 동족이 같은 동족의 절반을 대대로 노예 삼은 건,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악습이다.”
과거에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적었고, 노비가 만들어지는 방식 또한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나 전쟁 포로를 값싼 인력으로 전락시킨 것이니까.
그러나, 이제는 현황이 달라졌고 제도 또한 달라졌다.
세자의 말처럼 한때에는 적절한 제도였겠으나, 오늘날에는 고루한 구습으로 전락한 것이다.
“내가 행하려는 건 세자에게 한 말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때에는 이때의 왕과 신하들이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다.”
“소자 역시 아바마마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세자가 결의 어린 얼굴로 답했다.
혹 나의 대업이 나의 치세 안에 성취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유지를 이어 반드시 인습을 폐지하겠다는 의지다.
“자랑스럽구나. 고맙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예?”
“내가 여태껏 취해온 모든 방식과 태도가 세자의 치세에서도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즉위할 때의 조선과, 세자가 즉위할 때의 조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가 있었다.
조선이 금나라마저 꺾고는 아예 중원에 교두보까지 마련하며 나아가 발해渤海를 오롯이 조선의 것으로 전유하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조선은 지난 역사에도 없을 뿐 아니라, 이전 역사에서도 없었다.
이런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고루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예전과 이전의 조선만 아는 왕에게 익숙한 방식이 전부 정답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드러내는 일도 없이 조용히 공부만 하고 있다 들었다.”
틈틈이 내왕하여 병자들을 구호하던 활인서活人署도 이제는 찾지 않았다.
세자는 직접 의서를 간행하고, 환자를 구호하며, 그 효험이 안팎으로 분명히 드러나, 잡학雜學이라 여겨지던 의술에 여러모로 명백한 진일보를 가져온 명의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 세자가 활인서 내왕을 정지하고 구호를 그쳤으니, 세간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지사였다.
혹자는 초심이 변한 게 아니냐는 망령된 소리까지 할 정도였다.
세자라면 응당 활인서에서 구빈하는 게 원래의 역할이라도 된다는 양.
그러나 범부들의 마음이란 본디 얻을 때보단 잃을 때를 기억하여, 후의를 권리로 착각하고, 지나간 시절에 쉬이 미련을 가지고 연연하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과연 세자가 이러한 반응을 예상치 못하고서 활인서의 내왕을 그쳤을까.
그리고 활인서의 내왕을 그친 게 본연의 마음이었을까.
“혹자는 거의 칩거라고도 하던데, 기이하게도 세자가 칩거하게 된 시기가 대리청정을 맡은 것과 맞물리더구나.”
대리청정을 맡을 때는 활인서 내왕을 그치는 게 당연하다.
본디 용상의 후계로서, 신체가 혼자만의 것이 아닌데 이제는 국사까지 도맡게 되었으니 거동을 더더욱 유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리청정을 마친 뒤에도 활인서는 찾지 않았고. 평소에 틈틈이 하던 출타도 없어졌지.”
“…….”
세자가 쉬이 답하지 못하자 왕이 물었다.
“세간의 여론을 의식하느냐?”
“……예에.”
“흐음. 확실히 세자는 세간에서 이미 드높은 명성을 세웠지.”
문무로 공적을 세웠고 후계자이자 차기 후왕으로서 만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세자의 즉위를 꺼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차에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고도 여망輿望에 실망스럽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는 있었지만, 지적은 아니었다. 대리청정의 한계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
오히려, 운신의 폭을 좁히고도 최초로 맡은 정식 국사國事에 압도되지 않았다는 점이 여러 사람을 기대 이상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다소 가혹하게도 비쳤던 왕의 교육 방침이 과연 올발랐다고 세인들은 평가했다.
여러 사람이 세자의 승계와 국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점쳤다.
국왕과 국본의 관계가 지극히 두텁고, 후계의 곁가지가 어지럽지 않다는 점이 ‘즉위한 다음이 기대되는 세자’라는 가까운 전례와는 결과가 다를 것 또한 여러 사람을 흥분시켰다.
이러한 마당이니 책임감 강하고 사고가 깊은 세자는 응당 근신할 수밖에 없다.
세인들에게 더 많은 지지와 기대를 구가하게 되는 행위를 스스로 단속하고 절제함으로써, 왕위의 승계를 앞당기거나 그러고 싶다는 의사를 본의가 아닐지라도 퍼뜨리게 되는 결과를 지양하는 것이다.
왕이 말했다.
“염려치 말아라. 세인의 여론이 나의 계획이나 세자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니.”
“…망극하옵니다.”
“실방사를 맡아라.”
왕이 툭 던진 말에 세자가 놀랐다.
실방사는 국가의 음영에서 비밀스럽고 위험한 일을 전담하는 기관.
그 위력은 대사大事를 그르치려는 죄인 몇을 공공연히 처단하고도 남으니, 비유하자면 왕이 찬 칼과도 같은 셈이다.
만약 세자가 불효하고 불충한 인간이었다면 부왕은 얼마든지 자신이 넘겨준 칼에 찔릴 터.
그런데도 실방사를 맡기고자 한다는 말인가.
“실방사는 조정 이상으로 많은 것을 듣고, 방대하게 활동하는 기관이다. 그런 실방사를 도맡게 되면 국사의 이면에 더욱 익숙해지겠지. 다른 일을 맡기 전에 미리 여기에 익숙해지는 게 순번이 옳다.”
“소자가 과연 그런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세자는 알지 못할지라도, 나는 알고 있으니 개의치 않는다. 세자 또한 염려치 말아라.”
세자는 부담스러웠으나, 그의 부왕은 사양을 좀처럼 받아주는 법이 없었다.
끝내는 따르게 될 뿐.
그렇다면 세자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잘 해내어, 아바마마의 기대에 부응하겠사옵니다.”
그러자, 왕은 실소와 함께 세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말을 불친절하게 했구나. 세자에게 실방사를 맡기려는 건 잘 해내리라고 기대해서만이 아니다, 세자, 바로 너이기 때문에 맡기는 것이다.”
“아바마마.”
“미리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한 번 왕위에 오르게 되면, 질리도록 애를 쓰게 될 테니까.”
왕은 이른 양위의 뜻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면서도, 그게 마치 농담이라도 되는 양 웃었다.
그러니 세자 또한 마냥 사양할 수도 없었지만, 긍정할 수도 없어 멋쩍게 미소지었다.
* * *
두 의정은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겠다고 고했으나, 고작 두 사람이 만백성을 상대로 성취를 얻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조력이 필요했고, 영의정 이상의는 백성들을 설득할 글을 만들고자 홍문관을 방문했다.
그가 왕을 대신해 홍문관 관리들에게 내리려는 지시는 조선의 정통성과 함께 백성들의 자부심을 고취할 서적을 간행하라는 것.
홍문관을 포함한 사헌부, 사간원 삼사三司의 주축은 반항기 가득한 도당의 당여들이었으나, 그들이라고 왕의 성세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칭송하면서도, 다만 옳고 그름은 분명하게 따져서 별개로 여겨야 한다는 축일 뿐.
원숙한 정당 당여들에게는 방자한 혈기였다.
다 망해가던 나라가 오늘날까지 소생하고 영화를 누리는 건 오롯이 대왕의 인도 덕분인데, 건방지게 공과를 따져 묻겠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방자한 혈기라도 적절한 주제가 주어진다면 유용한 방향으로 불태울 수 있을 터.
“오늘날 아조의 성세는 삼한三韓을 다 통틀어도 비교할 수조차 없는데, 이 같은 영화로운 치세를 기록하지 않고 백성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면 열성과 선조께는 애석하게 비칠 터이고, 후대는 한심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상의가 홍문관 관리들 앞에서 말했다.
그는 비단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홍문관의 장관인 영홍문관사領弘文館事이기도 했다.
명예직에 불과하긴 하나 장관이자 수장이 하관下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아조가 성군을 만나 지극히 영화로운 치세를 맞아 밖으로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고 안으로는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있으니, 이 좋은 시절을 기록하여 만백성의 보람이자 자긍심으로 삼고, 후대에서도 발판으로 삼아 오늘날의 영화가 이루어진 경위를 잊지 않는다면, 정녕 백만 년의 성세라도 불가능하겠는가.”
다시금 의의를 강조한 이상의가 덧붙였다.
“가장 영광스러운 치세에서 선열께 바치고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럽게 전하며, 이 순간 살아가는 조선의 만백성들에게 반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긍지를 느낄 서책을 집필하라. 이는 나에게만 아니라 그대들에게도 과분한 중임이고, 그대들 또한 절대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상의가 일장연설을 마친 뒤에 물러나자, 홍문관의 관리들은 달아오른 얼굴로 즉각 서책의 내용을 논의하고 구상해나갔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책의 구성은 이러했다.
열성과 선조에게 바치는 것이라 했으니 과거의 역사를 기술하고, 오늘날의 성세를 기록한다고 하였으니 응당 현재의 성취를 칭송하며, 후손들에게 자랑스레 남긴다고 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전할 교훈을 남기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