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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05화 (305/380)

인조, 명군이 되다 305화

“홍문관에서 사료를 수집하고 정합하여, 삼한의 역사와 오늘날의 성세를 기록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상의의 보고에 왕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의의는 매우 아름답습니다만, 그것으로 공동체 의식을 증진할 수 있겠습니까? 혹 조정이나 식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지는 않을는지요.”

“그들을 먼저 설득하는 게 중요하옵니다. 일단 조정과 식자들이 기쁘게 된다면, 이들로 하여금 말단의 여염까지 이로움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흐음…….”

왕이 썩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내비치자, 이상의가 물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조정과 식자들로 하여금 말단까지 퍼뜨린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항교와 서원이옵니다.”

“음.”

왕의 짐작대로였다.

조선에는 여러 교육기관이 있다.

중앙에는 성균관이 있다면, 지방에는 상기한 향교와 서원이 있다.

말단 외에도 도호부 이상의 거읍에는 관아에서 교수敎授를, 이하 군현에서는 훈도訓導를 두어 외방의 교육을 진흥했다.

괜히 조선이 교육의 나라가 아니며, 또한 괜히 후대에서도 교육을 중시하는 게 아닌 셈.

그러나 이러한 교육이 대다수 백성의 삶과도 밀접했냐면, 그건 아니다.

적어도 유익한 쪽으로는 그랬다.

특히, 임란과 호란을 거치는 동안 서원은 향교를 제치고 말단 교육의 주류로 부상했다.

그 비결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둥 갖은 명목을 빙자해 인근 백성들을 수탈하고, 교육을 진흥할 명목으로 주어진 면세지免稅地를 이용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서원은 백성을 교육하고 미풍양속을 권면하는 기관이 아니라, 타락한 유지들이 서로 결탁하여 관아에 맞서고 군현을 착취하는 악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서원이 발흥하는 동안 향교는 쇠락하여 존재감을 잃었다.

교수와 훈도 역시 입지와 할 일을 서원에게 밀려 잃어버린 뒤에는 학술연구와 교육 양면에서 태만해졌다.

“말단의 학교를 이용하는 건 불가피한 절차겠지요. 그러나 나는 서원과 향교의 교육지들이 태만함이나 부정 없이 학생과 백성들을 잘 교육할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에 이상의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들을 신용하지 않으시겠다면, 어떻게 백성들에게서 유대감을 체계적으로 고취할 수 있겠사옵니까?”

실방사를 이용해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편법이 주主가 될 수는 없다.

소문에는 체계가 없고, 쉽게 변질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할 의도로 자극적인 소문을 퍼뜨렸다간 반드시 부작용이 돌아오게 되어있다.

이미 조선은 비슷한 결과를 겪지 않았던가.

조선이 해도海島의 명나라 해적에 이어 홍태주의 군대마저 격파하고, 그의 나라를 이면에서부터 무너뜨리자 식자들은 요동의 진공을 강력하게 소원했다.

그 여론과 여망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은 특히 독설적이고 시끄러운 호사가는 군대로 보내버렸고, 비사성을 점유했으며, 청래도의 개척을 미리 약조해야 했다.

그 희생과 성취가 다 이루어진 뒤에야, 식자들의 여망과 백성들의 기대는 겨우 충족됐다.

그리고 처음만 어렵고, 다음부터는 쉬운 법.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문을 섵불리 주主로 삼았다가는 기름 위에 다시금 불을 놓는 꼴이다.

결국에는 정도正道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향교와 서원이 오늘날 퇴락하고 부패하여 본의를 찾기 어렵고, 대사를 성취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마땅히 시정하면 될 따름이옵니다. 이를 시도하지 않고 미리 염려하여 배제한다면 어떤 수단이 남아나겠사옵니까?”

“……영의정의 말씀이 옳습니다.”

“양사兩司에 일러, 말단 학교의 폐단과 부패를 감찰하라 전교하시옵소서. 마침 사헌부와 사간원 모두 홍문관이 먼저 대사에 착수한 것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으므로, 명령이 떨어진다면 열정적으로 제 몫을 다할 것이옵니다.”

젊은 도당 당여들이 불만과 혈기로 가득한 이유는 단순했다.

왕의 성세가 지속하면서 내부의 권력 흐름은 정체하는데 신설하여 그나마 찾아갈 빈자리는 해외의 지옥 같은 개척지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나마 외지의 관리들은 제 몫 하기 바빠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여유조차 없다면, 내지의 관리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하는 일도 크지 않아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다.

여기에 해당하는 무리가 본디 청요직淸要職으로 우대받던 삼사三司의 관리들이었으며, 홍문관은 다행히 최근 일감다운 일감을 받은 참이었다.

삼사의 다른 두 구성원이자, 별도로 양사兩司라고도 일컬어지는 사헌부와 사간원으로선 배가 아플 일이다.

이상의는 이러한 기류를 이미 감지했다.

두 기관은 홍문관 이상으로 호전적이고 시건방진 청춘들이 많이 모여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물어뜯을 거리를 안겨준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제 몫을 해낼 터.

이는 왕 역시 기대하는 바였다.

“바깥으로는 실방사를 거론하여 감찰 영역에서의 주도권을 위협하고, 내부적으로는 양사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더욱 큰 실효를 거둘 수 있을 테지요?”

왕이 덧붙여 제안하니 이상의는 감격한 낯으로 답했다.

“그럴 것이옵니다. 과연 영명하시옵니다.”

“건실한 경쟁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유도하기 좋은 수단은 없지요.”

“과연 그러하옵니다.”

때마침 실방사는 설치 이래 위협적인 입지를 과시하며 삼사를 떨게 만드는 중이었다.

음지에서 신하를 감시하고 처단한다는 건 유학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어긋나면서도, 동시에 삼사의 본래 권한인 감찰과 규탄과도 역할이 겹치기 때문이다.

단지 행위의 음양陰陽과 법률의 비준非遵이 대조적일 뿐.

그러나 삼사가 백날 실방사를 규탄하여도 씨알 하나 먹히지 않고, 반대로 먼지만 털려서 보복을 당하니 두려우면서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감찰에 주도권 싸움이 붙는다면 양사는 필사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안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붙이는 건 경쟁의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기여도 낮은 쪽을 추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에게 망신당하는 일을 막고자 안에서도 필사적으로 경쟁하지 않겠는가?

이러면 혹 외방의 관리 중 양사에 끈이 있어 덮고자 하여도, 다른 쪽이 적발하고 규탄하게 되는 것이다.

각 기관의 호전성과 경쟁심리에 불을 붙여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를 실현하는 셈이다.

물론, 사헌부와 사간원이 필사적으로 경쟁한다고 그들 관원이 죽을 일은 없다.

대신 태만하게 향교를 운영해왔고 방만하게 서원에서 군림해온 어중이떠중이들이나 떼로 죽어 나갈 뿐.

그리고 그게 곧 요체이기도 했다. 의상의가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이런, 미친! 양사의 관원들이 하는 꼴을 봐서 쥐새끼 같은 놈들에게 감찰을 맡길지 안 맡길지 결정하겠다니?!”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이 왕임을 생각한다면, 무척 불경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보통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본디 이전 역사에서도 두고두고 왕에게 개기다가 죽은 인물인데, 하물며 지금은 혈기방장한 때.

옳고 그름은 별개로 따져야 한다는 도당 당여들 중에서도 소문난 독종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당여들이 말하길, 우리가 다 죽게 되면 이놈 때문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

그러나 송시열은 개의치 않았다.

군자는 소인배의 눈치를 보지 않으므로, 군자인 자신은 마땅히 그러는 것이다.

“당장 입궐하여서 전하께 따져야겠네!”

“……어어어?”

그런 송시열이 부담스럽게 권하는 인물은 같은 집안사람이자 송시열 첫 스승 송이창의 아들이기도 한 송준길이었다.

족보로는 송준길이 송시열보다 어른이었지만, 나이는 고작 한 살 많은 데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지라 서로 예는 과하게 차리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남들 앞에서는 눈치 조금 봐서 형이라 불러주는 정도일까.

공유한 세월과 소탈한 관계를 생각해보면 친우나 마찬가지였다.

송준길에게는 악우처럼 여겨졌지만 말이다.

“동춘당同春堂은 반응이 왜 그런가!”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라의 주인 된 사람이 간관諫官을 핍박하고 언로言路를 무색하게 만드는데, 찾아가서 따지는 것 외에 무슨 반응이 필요한가! 그런데 멍청하게 바람 새는 소리나 내다니?!”

“…….”

송준길이 당혹해서 별 반응을 내비치지 못하니, 송시열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타박했다.

“이러니 내가 춘春을 형 대접하기 어려운 걸세! 동생이 인의仁義를 다하려는데, 앞장서지는 못할지언정 망부석이 되어버리다니!”

“…환장하겠군.”

송준길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놈이 또 지랄병이 도졌구나, 내심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서, 도리어 당당한 기세로 따졌다.

“동춘당은 망부석 하고 싶으면 계속하시게! 나는 당장 전하를 뵈러 가겠으니!”

“가세!”

송준길이 내지르자, 송시열은 일순 귀가 멎고 사고라도 정지된 양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와 함께 가겠다고.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드디어……!”

“…드디어?”

“춘 형이 사람이 되려나 보오!”

“자네 미쳤나, 진짜?”

송시열은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듯 손바닥을 내저었다.

“마음이 굳었으면 시간 더 썩히지 말고 얼른 댁에 다녀오시오! 내가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송준길은 상태 오락가락하는 송시열을 뒤로하고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그가 송시열의 억지에 응한 건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마음이 달라져서도 아니었다.

단지, 송시열과는 집안사람이고 엮인 데가 많아서였다.

친족의 의리 같은 걸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자신과 송시열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나.

다만 송시열이 죽을 지경에 처한다면 자신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가 대왕 앞에서 미친 소리를 하지는 않는지, 혹 기어코 하려 든다면 미리 막아야 했다.

* * *

송시열은, 예기치 않게도 왕과 대면하게 되었다.

송준길에게는 거절당하면 월담이라도 할 것처럼 기세를 과시했지만, 내심 정말로 대왕이 저 한 사람의 억지를 받아주겠냐고 복심을 품었던 것이다.

고작 일대 유생에 불과한 자신을.

그래서 호언장담하며 내질렀던 것인데…….

막상 왕을 대면하니 기세에 압도되어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답지 않게 조용해진 송시열의 모습에, 곁에 자리한 송준길은 더욱 긴장했다.

이놈이 무슨 망언을 흉중에서 굴리기에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왕은 송시열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듯 서안의 책을 상대하다가, 침묵이 길어지자 고개를 들고서 직접 송시열을 대면했다.

그 눈빛이 송시열에게는 자신을 헤집어보는 듯했던지라, 저도 모르게 일단 입부터 열고 보았다.

“하늘과 같은 만백성의 어버이께서 한낱 유생의 간청을 들어주어 입궐을 윤허해 주시니, 과분한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분수에 지극히 부합하는 감사에, 송준길은 외려 입술을 씹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언제든 송시열을 기절시킬 수 있도록 주먹에 힘을 쥐고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맞은 편 용상에 자리한 왕에게는 다 보이는 광경.

그러나 왕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전 역사에서 유별난 명성을 가진 인물이 어떤 연유로 미리 등장한 것이고, 또 함께 온 사람은 왜 동행했으면서도 여차하면 잡아먹을 기세로 옆 사람을 노려보는 중인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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