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6화
송시열의 간청에 응한 건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전 역사에서 그가 제대로 등장한 시기는 지금보다 한참 뒤였으니까.
그러나, 역사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송시열은 대뜸 찾아와 만나주기를 요청했다. 예기치 않은 방문과 등장이었던 만큼 잠깐은 놀라기도 했으나, 끝내 응했다.
무엇이 그를 이 순간 궁궐로 이끌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유명인이니 얼굴 한번 보자는 얕은 생각도 없잖았고.
그런데, 일찍이 마주한 송시열은 내가 생각한 대유학자의 풍모와는 크게 달랐다.
일개 유생의 신분으로 대뜸 궁궐에 쳐들어온 기세만은 남달랐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부분이 없었던 탓.
“그대가 궁궐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
비장한 대답이었다.
“기탄없이 말하라. 경청하겠다.”
관대하게 윤허가 내려지자 송시열은 주먹을 움켜쥐었고, 동행한 송준길은 침을 삼켰다.
곧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대왕께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나라를 다스려 안으로는 종묘와 사직의 반석을 세우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무찌르고 명나라에 은혜를 청산하니, 아조의 치세가 오늘날 같았던 적은 삼한의 역사를 상고하여도 없습니다.”
의례적인 칭찬이었다. 이어질 말이 본론이라는 건 누구나 짐작하리라.
“그러나 근래에는 불의한 기관이 세워져, 남들 앞에서는 백성의 소리를 빠짐없이 듣는다고는 하나 뒤에서는 몰래 사람을 지켜보면서 모략을 일삼으니, 이들이 성업에 누가 될 것은 확실합니다.”
“…….”
“…….”
왕이 별다른 말이 없으니, 송시열도 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묘한 침묵 끝에 왕이 물었다.
“그리고요?”
마치, 오늘 날씨를 전해 듣기라도 한 양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었다.
불호령이든 책망이든 각오하고 있었던 송시열로서는 도리어 진이 빠지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결과.
그래서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러한 자들을 양사兩司와 비교하며, 장차 음산한 자들에게도 국사國事를 맡기실 것처럼 세간에 알려지니, 여러 선비가 우려를 표하고 있사옵니다.”
“…….”
“…….”
또다시 침묵.
이제야, 송시열은 제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핏덩이와 같았을 적, 아버지에게 제 시답잖은 일들을 혼자 들떠서 고했을 때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와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제가 고한 바는 국가에 반석을 다시 세우고 전례 없는 중흥을 일으킨 대왕에겐 이미 고려되었고 결론이 내려졌을 부분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일개 유생이 시답잖은 소리로 성총聖聰만 번거롭게 한 것이다.
“……윤허해 주신다면 물러나겠사옵니다.”
송시열이 얼굴이 벌게져서 청하자, 왕은 손을 들어 보이고는 일렀다.
“나는 학문의 성취보다는 흉중에 품은 뜻이 천하의 안녕에 부합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떻습니까?”
송시열로서는 뜬금없이 느껴졌으나, 대답하기에는 쉬운 질문이었다.
“신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익혔더라도 품은 뜻이 천하의 안녕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는 말이 괴설怪說이나 망설妄說에 불과할 뿐이고, 가진 뜻이 천하의 안녕과 부합한다면 부족한 건 오로지 학문뿐이니 이를 성취한다면 얼마든지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사료하옵니다.”
“그대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내가 실방사를 세우고, 양사가 본의를 다하도록 채근하며, 퇴락한 서원과 태만해진 향교를 정비하려는 것 또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더 밝은 데로 이끌기 위함이지, 본의가 다른 데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배움이 부족하여 방식이 투박하고 예에 부합하지 못할 뿐이지요.”
“…….”
송시열은 일순 압도됐다.
무시당한 줄 알았던 자신이 의문을 대왕이 대답해준 데 놀랐으며, 그 대답이 건성이 아님에 다시금 놀랐다.
그리고 사특한 편법으로만 여겼던 대왕의 방식이 나름 최선이었음을 깨달았다.
과연 외방에 산재한 서원과 향교들의 부정을 시정하는 데 양사의 공명심을 부채질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송시열로서도 상책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실 실방사로 하여금 그들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하는 건 단지 겁을 주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요, 이로써 꾀하는 건 양사가 본의에 충실케 하는 것뿐이니, 저의가 악하지 않고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문제 될 부분이 있는가.
알지 못하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여전히 못마땅한 구석이 있겠으나, 송시열이 직접 대면한 대왕은 국사를 허투루 경영할 사람이 아니었다.
“……소생이 짧은 식견으로 대왕의 성지聖智를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일깨워주시니 성은이 망극하고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의문은 해결되었습니까?”
“예…….”
송시열은 조금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왕은, 그런 송시열에게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그로서는 입시한 신하들이 퇴궐을 앞두었을 때 으레 해주던 의례에 불과했으나, 아직 백신白身에다 일개 유생에 불과한 송시열로서는 황망한 대접이었다.
송시열은 이미 해묵은 소문을 통하여 이러한 의례를 알고 있었으므로, 놀라기는 하였으나 얼어붙는 대신 떨리는 두 손을 모아 과자 하나를 집었다.
특정한 무언가를 고를만한 정신은 없었다.
단지 눈에 띈 것을 바로 받들었을 뿐.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송시열에 이어 옆에서 과자를 챙긴 송준길 또한 손을 모은 채로 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왕은 고개를 끄덕여 두 사람의 감사를 받고는 일렀다.
“의문이 해결되었다면 두 분은 이만 퇴궐하시지요. 미안하게도, 나는 돌봐야 할 정무가 많습니다.”
“예, 예.”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물러나는 예를 표하고는 도망치듯 편전을 빠져나왔다.
그런 두 사람을 마주한 편전 내시는 썩 탐탁지 못한 기색이었다.
대왕께서 기거하는 궁궐에 감히 시답잖은 유생 둘이 방문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성총을 번다하게 만들었으며, 과분한 대접을 받았으니까.
편전 내시가 퉁명하게 일렀다.
“두 분은 나를 따라오시오.”
“아, 예…….”
송시열과 송준길은 빠르게 멀어지는 내시를 잰걸음으로 쫓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통하는 궐문에 이르자, 내시는 배웅하지 않고 안에서 팔만 펼쳐 쌀쌀맞은 태도로 두 사람을 내보냈다.
왕에게 이미 압도된 송시열과 송준길은 그저 얌전히 궐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두 사람은 누구기에 궐을 다 방문하냐는 행인들의 눈치를 받으며 송준길이 탄식했다.
“흐아아! 숨 쉬는 것조차 잊어먹을 뻔했군, 그래!”
송준길은 그간 애써 죽여온 호흡을 여기서 다 정산하겠다는 듯 가슴을 부풀리며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송시열에게 일렀다.
“이 사람아. 그래서 자네 소망은 다 풀렸나?”
“…….”
송시열은 눈만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반응이 송준길에게는 부담스러웠던지라, 조금 조심스러워져서 재차 물었다.
“이미 억지를 써서 전하를 만나 뵈었고, 자네가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하교에 납득까지 한 듯한데 뭐가 아쉬워서 이런단 말인가?”
“아쉽다라…….”
“아쉬운 게 있으면 대과에 급제해서 관직을 받고 펼쳐야지, 이렇게 대뜸 궐을 찾아와서야 쓰나! 다른 시대 같았으면 진즉 경을 칠 일이네!”
“춘春 형의 말이 옳소.”
항상 이렇게 해왔다는 양, 어울리지 않게 정상인 같은 반응이었다.
“오, …옳다고?”
“그렇소!”
송시열이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한평생 학문을 닦아왔고, 소과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 온 천하를 발아래에 둔 것 같았지. 하지만 아니잖소? 나는 일개 유생에 불과할 따름이고, 거인들은 다 속 빈 강정인데 운이 좋아서 각자의 자리에 다다른 게 아닌데 말이요.”
“갑자기 왜 이러나 자네? ……무섭네!”
송준길은 거의 사색이 되어버렸다.
송시열이 하는 말이야 다 옳았지만, 언제 이렇게 멀쩡한 소리를 하던 사람이던가?
매사 길길이 날뛰고 시답잖은 일로 염병하며 당장이라도 몸에 불이 피어오를 것처럼 지랄하던 위인이었다.
그런데 궐을 잠시 다녀오는 동안 머리가 이상해진 건지…….
답지 않게 멀쩡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백주에 귀신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송준길이 떨거나 말거나 송시열은 주먹을 움켜쥐고서 외쳤다.
“공부나 마저 해야겠소! 일단 대과에 급제하고 말직이라도 받아야 춘 형의 말씀대로 뜻을 펼칠 길이 열리는 게 아니요?!”
“그, 그으렇지.”
송준길의 질린 듯한 반응에, 송시열이 고개를 홱 돌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형은 대왕을 대면하고도 느끼는 게 하나 없었소?! 기운이 이렇게 없어서야! 어떻게 나라의 대사를 보필할 사람이 된다는 말이요!”
송준길은 책망을 당하면서도,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정신 이상한 인간이 한 번 더 돌아서 멀쩡해진 것처럼 보였나 싶었으니까.
그러나 아직은 다행스럽게도, 약간은 정상이 아니었고 송준길이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 자네 말이 옳네. 나 역시 열심히 수학하여서 이름을 빛내고 문중을 드높여야지.”
“하!”
송준길의 대답에 송시열이 대뜸 탄식했다.
“국가의 대업에 일조하는 데 이름은 뭐고, 문중은 또 뭐요? 형 취급을 해주려고 했더니만 아직 갈 길이 멀었군!”
“…….”
“동춘당은 계속 하찮은 것이나 쫓아다니시오! 나는 대장부다운 위업을 성취하고자 하니!”
송시열은 제 할 말만 쏟아내고는 씩씩대며 먼저 발걸음을 옳겼다.
그리고 송준길은 그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 * *
그 시각 편전에서.
“생각보다 훨씬 얌전한데.”
이전 역사에서 가졌던 대단한 입지와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갑자기 등장해서 토로한 불만치고는 지극히 평범했다.
오늘날 고지식한 인물이라면 누구나 다 거론할 법한.
그리고 나름의 대답을 돌려주니, 딱히 이론을 발하지도 않고 궐을 나서기까지 했다.
이전 역사에서 두 사람의 왕을 지독하게 긁어대며 자신의 목숨마저 시험했던 것 치고는 무척 얌전한 셈.
“아직은 양반인가…….”
물론 신분이야 당연히 양반이니,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 놀랍지도 않은 것이, 지금의 송시열은 일개 유생에 불과했다.
소과에 장원 합격한 이력이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소과는 소과. 장원일지라도 코웃음을 칠 사람이 조정에는 많았다.
“연이 닿으면 또 보겠지.”
아니라면 단지 그뿐.
역사가 달라지면서 많은 인재가 이전 역사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기에 일일이 연연할 부분이 아니었다.
왕은 금세 관심을 옮겼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과연 사헌부와 사간원이 내 바람대로 움직여 줄지…….”
* * *
“서원에서 벌고 쓰는 게 얼마인데 장부가 없다는 말이냐!”
사헌부 장령의 일갈과 함께 우당탕, 하고 서원 어딘가에서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과연 주변은 보통 소동이 아니었다.
관복이나 군복을 입은 사내들은 이곳저곳 들쑤시는 와중이었고, 때깔 좋게 차려입은 유생들은 마당에 떼로 꿇려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중이었다.
유생들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시끄럽게 자비를 청원하였는데 그들 앞에 선 장령 또한 얼굴이 벌게져서는 외쳤다.
“너희 쓰레기들 때문에 이 나라의 유구한 학문이 어지러워지고 간관諫官들의 목소리가 약해지고 있거늘, 무슨 자격으로 애원질이냐!”
장령은 바로 앞에서 호소하던 유생을 뻥, 하고 걷어찼다.
연배만 따지자면 날아간 유생이 장령보다 훨씬 윗줄이었으나 근래 난립한 서원들은 모두 말단의 암적인 존재들이 군현과 백성을 수탈하고 착취하고자 모인 소굴일 뿐.
위패를 세워놓고 사원을 가장하고 유생을 자처하나, 실체는 붓 든 도적과 다를 바 없으니 연배 따윈 하등 상관없었다.
“아이고오! 나 죽네!”
날아간 유생이 염병을 떨거나 말거나 장령은 주변을 향해 닦달했다.
“한두 놈이 해 처먹으려고 응집한 게 아니거늘 주먹구구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장부가 없을 리 없다! 싹 다 뒤져! 뭐라도 나올 때까지 벽이건 마루건 다 뜯어버리란 말이야!”
관리의 불호령에 하관下官인 감찰監察과 아전이 분주하게 지시를 전하고 뛰어다녔으며, 감찰나장監察羅將은 저마다 든 몽둥이와 도끼를 들고서 눈에 뵈는 건 뭐든지 신명 나게 부수고 쪼개버렸다.
그 호쾌하고 파격적인 광경에도 장령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사간원에서는 훨씬 앞서나가고 있어서였다.
놈들은 미리 점찍어둔 곳이 여럿 있었는지, 일사불란하게 서원 몇 곳을 털어서는 장부들과 함께 무수한 증좌를 입수하고 죄인까지 대거 확보해버린 것이다.
그런 신속한 대응에 각지의 부정한 서원들은 서둘러 증거를 폐기하고 장부를 숨기며 오리발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장령으로서는 미칠 노릇.
사헌부 장관인 대사헌이 하관을 모두 불러모은 자리에서 노기 충천하여 질책한 것이 엊그제였다.
-급작스럽게 일이 이렇게 되어 다들 놀라게 된 것은 안다.
-하지만 헌부憲府가 본의를 맡았거늘 대사를 그르치고 여타 삼사의 원망을 받게 되어도 이해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묘당廟堂에 불려 정승들 앞에서 일의 중요함을 직접 강조 받았으니,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다.
-모쪼록 분발하여 불의한 방식이 정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라.
본심을 해석하면, ‘저번에 의정부로 불려가서 한 소리 들었다! 내가 대사헌씩이나 되어서 너희 때문에 이런 취급 당해야 되냐?’라고 정리될 훈계였다.
사헌부의 분위기가 이러했으므로 기껏 출장을 나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안에서도 못나고 무능한 사람으로 찍힐 건 명약관화일 터.
불안해져 입술을 씹던 장령이 다시 발을 내질러 부패한 유생들을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