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7화
서원과 향교의 정화사업은 왕의 바람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필사적인 기세로 외방의 부패를 근절해나갔다.
양사의 관원들은 저들의 인맥을 배신하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는데, 상대가 공로로 삼게 두느니 차라리 우리가 공로로 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양사의 관리들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고 학문과 인망이 높아 청요직에 제수된 지라 발도 넓고 그 발에 채는 쓰레기도 많았다.
서로 주변에 잘 아는 사람부터 솎아내다 보니 자연히 반부패 사업도 활황이었다.
무수한 죄인이 한양에 밀물처럼 쏟아졌다.
죄인들은 먼저 조리돌림부터 당했다.
“학생을 자칭하고 악의 소굴을 서원으로 빙자하며, 학문을 명분 삼아 죄를 저질렀으니 성현을 욕보인 것이다. 가볍게 처리하지 않음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영의정 이상의의 천명이었다.
일부 식자는 사대부에게 가벼이 조리돌림을 행하는 데 꺼렸다.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개 여염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 있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특권의식도 무더기로 몰려드는 죄인들 앞에서는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학문을 배운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떼로 죄과를 저지른단 말인가.
일시의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그 규모도 수효도 작지 않았다.
알량한 변호로 유지들의 죄과를 어쭙잖게 뭉개보려다가, 되려 무수한 죄과에 변호가 뭉개진 꼴이었다.
막아주는 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죄인들은 등에 북과 깃대를 매달았다.
그리고 깃대에는 탐오貪汚라는 죄과를 쓴 깃발을 걸었으며, 행인 많은 대로를 오가는 동안 뒤에서 하인이 북을 두드렸다.
정석적인 조리돌림이었다.
선조 치세 하에 득세한 서원이다.
대외로는 학문 수양과 말단의 교화를 빙자하였지만, 실체는 특권의식으로 무장한 촌구석 폭군들의 소굴일 뿐.
유지의 세력을 결집하여 면세를 누리고 노비를 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강탈하는 그 단맛이 다른 못난 사람들의 귀감이 된 지라, 서원의 숫자는 마찬가지로 못난 놈의 치세에만 다섯 배로 늘어났다.
이미 이때부터 갖은 폐단을 흩뿌리면서 말이다.
그러니, 조리돌림 당하는 죄인들 앞에서 세인들의 반응이야 뻔했다.
“저것들이 꼴에 낯짝 들기는 부끄러웠는지 산발로 다 가려놨군.”
“양반이니 유생이니 거들먹대면서 사람 못살게 굴다가 하루아침에 조리돌림 당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어찌 낯짝을 들고 다니겠나?”
“꼴에 부끄러운 건 안다는 게지.”
“부끄러운 걸 알면서도 탐오한 죄를 공공연히 저지른다는 말인가?”
구경꾼들의 신랄한 반응이었다.
이처럼 감정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양반들에게 당한 게 많거나, 서원의 폐단을 몸소 체감해본 자들이었다.
이들과는 다르게 죄인들에게 딱히 유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양반들에게 딱히 유감이 없거나, 외방과는 연이 닿지 않아 폐단을 알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도 죄지은 사람들이 조리돌림 당하는 건 심심한 일상에 기분 좋은 볼거리였다.
“저 인간들은 백주에 왜 저러고 다니나?”
“사람들 말로는 몹시 나쁜 죄를 지었다는데.”
“아무튼, 못된 놈들이었구만?”
“죄를 지었으니 저런 꼴을 당하지 않겠소?”
“죄지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지!”
외방의 촌구석에서 폭군처럼 군림했던 유지들이라도, 쓰는 언어가 백성과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구경꾼들은 인파에 의지하여 들으라는 듯이 죄인들을 비난하고 비웃으니, 죄인들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명예와 위신을 목숨처럼 여기는 시대였다.
중형 못지않은 조리돌림이 한양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지니, 어중간한 선에 걸쳐있던 각지의 다른 서원과 향회鄕會에서는 알아서 근신했다.
부정한 학생을 제명하거나, 나아가 직접 관에 고발함으로써 말이다.
소수와 엮여 자칫 한양으로 붙들려갔다간 당할 짓이라곤 뻔했으니, 무고하게 치욕을 당할 바에야 척 질 각오로 썩은 부위를 쳐낸 것이었다.
덕분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인력이 아직 닿지 않은 곳에서도 자발적인 정화가 진행됐다.
그렇게 말단이 정화하자, 궁궐에서 왕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대들이 수고하여 말단의 폐단을 몰아냈으니, 나는 오늘을 더없이 경사스러운 날로 삼아 치하하려고 합니다.”
상석에 자리한 왕의 좌우로, 각기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나뉘어서 자리했다.
품계에 따른 좌석의 배치를 엄격하게 준수한다면 양사의 관리가 어지러이 뒤섞였겠으나 왕은 그러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앞으로도 경쟁해주어야 했으니까.
사이좋게 뒤섞이는 일은 지양되어야 했다.
두 무리가 각기 허리를 숙였고 왕은 기쁘게 덧붙였다.
“오직 양사의 관원만 모인 자리에 준비가 거창하긴 하지만, 나는 경들의 노고와 성취를 잘 알고 있고, 내가 마음을 다하여도 부족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 억지를 부려 마련하였으니, 부디 그대들은 부담을 가지지 말고 이 자리를 즐겨주었으면 합니다.”
이에 사헌부 장관 대사헌이 손을 모아가며 답했다.
“신과 이하 관원들은 단지 왕명을 받잡고 소임만 다하였을 뿐인데 이렇게 치하해주시니, 감히 감읍하는 마음을 그칠 수가 없사옵니다!”
대사헌이 고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사건원 장관, 대사간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의 연회가 확정되기 전 대사헌과 대사간은 비밀리에 모여 모의했다.
혹 왕이 양사의 역할을 폐지하고 실방사로 하여금 대신케 한다면,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궐문 앞에 드러눕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내자고 말이다.
부패한 유지를 잔뜩 적발하는 성과에도 이런 논의가 있었던 건, 반어적이게도 성과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양사는 뭘 했길래 비질 한 번 했다고 먼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냐는 소리도 나올 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밀약까지 맺었음에도 불구, 대사헌은 최악을 면하자 곧바로 태도를 뒤집어서 왕에게 아부했다.
내막을 아는 대사간으로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대사간은 약간 다르게 아부했다.
“전하, 신은 왕명을 수행하면서 양사가 얼마나 직무에 태만해왔는지 깨달았습니다.”
“……!”
눈이 동그래지는 대사헌.
“그런데 전하께서는 하해와 같은 은혜로 죄 많은 신하를 용서해주시고, 이렇게 과분한 치하를 내려주시니 망극하고 더없이 송구스럽사옵니다.”
죄를 시인하여, 그저 좋다고 아부만 해대는 대사헌보다 나은 양심을 갖췄음을 드러내는 전략이었다.
대신 대조적으로 대사헌이 못나 보이게 되었고, 그래서 대사헌은 은근히 노기 어린 기색이었지만, 대사간은 개의치 않았다.
대사헌이 여차하면 합계할 밀약을 잊고 개처럼 꼬리를 살랑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관청 단위에서 공적을 두고 다투느라 쌓인 유감이 많았다.
특히 사헌부에서는 사간원의 창도唱導, 즉 말단 심부름꾼을 매수해 거동을 파악하고 선수를 쳐 공적을 거듭 훔치기도 했다.
이것이 크게 비화하지 않은 건 오로지 사간원 또한 사헌부의 감찰나장을 매수해 똑같이 보복해버렸기 때문일 뿐.
“…….”
“…….”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으나, 금세 시선을 거뒀다.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 없이 오직 왕과 양사의 관리만이 모였다. 그러니 각 관청의 장관인 대사헌과 대사간은 당연히 왕과 지척.
유치한 기싸움을 어전에서 이어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왕이 나서서 중재해주었다.
“두 분과 양사가 열성적으로 각자의 소임에 임해주셨고, 그래서 만들어진 좋은 자리입니다. 거추장스러운 겸양의 말씀은 다 내려놓고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지당하시옵니다.”
두 사람이 수긍하자, 왕은 장악원掌樂院 악인樂人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악사樂師가 박拍을 쳐 신호하자 음악이 연주됐다.
* * *
“사헌부와 사간원이 열심히 일해주긴 했지만, 알량한 연회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배신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애석합니다.”
연회를 마친 뒤.
왕은 두 의정을 불러냈다. 논의를 위해서였다. 백관의 어른인 그들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이었다.
영의정 이상의가 물었다.
“어찌하여 국가의 대사大事를 이행하는 것을 배신이라 하겠사옵니까?”
“양사가 나의 저의를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 이처럼 나서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는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번 일이 양사를 밀어내고 실방사를 전면에 드러내기 위한 시도라고 여였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고자 의도하였을 뿐.
실체는 부패한 서원과 퇴락한 향교를 정리하고, 또 소생시켜 말단의 교육에 변질이 없도록 청소한 것에 불과했다.
말단까지 퍼진 이들을 이용하지 않고는 백성들에게 유대감과 동질의식을 퍼뜨릴 수단이 없다는 이상의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실효는 노비제의 폐지다.
서로가 같은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고취하여, 그 같은 조선인 중 절반이 노비로 억류되고 구속된 현실을 타개하는 데 도움받고자 한 것이다.
“사대부이자 식자이며, 유지들과도 집안 안팎으로 인연이 많을 관리들입니다. 나의 의도를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나서주었겠습니까?”
절대로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제 살 깎아먹기라는 걸 알면서도 어떻께 열정적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그러한 본의는 교묘하게 감추고, 양사가 저들의 존속 여부와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고만 여겼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좌의정의 비상함이 세인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본의를 가려둔 채 대업을 성취하자는 건 경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왕이 남이공에게로 고개를 돌리고서 치하하니, 남이공이 허리 숙였다.
“신이 그와 같은 뜻을 간언하긴 하였으나, 양사의 눈을 가려 대업이 이처럼 성큼 성취된 것은 오롯이 성상께서 창안하신 바이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상의에게도 일렀다.
“만약 영의정이 서원과 향교를 이용해야 한다, 내게 간언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부패하고 퇴락한 그들을 남겨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상의가 망극하다는 듯이 허리를 숙였다.
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늘날의 성취는 나와 두 분이 모두 함께 힘쓴 덕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사는 끝나지 않았고 갈 길이 멉니다. 영의정?”
“예, 전하.”
“홍문관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관원들이 적극적으로 대사에 임해준 덕에 일이 크게 진취하여, 책은 이미 만들어졌사온데 마지막으로 검수 중에 있사옵니다.”
국가를 찬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건 평소 글을 다루는 홍문관 관리들에게 맞는 일이었다.
마침 국가 또한 성세를 맞이하여 전례 없는 영화를 구가하는 만큼, 관리들 역시 국뽕이 충천하고 기고만장하던 차.
이를 풀어낸다는 건 홍문관 관리들도 바라던 바였다.
“그러면 나는 인쇄소에 미리 언질해두지요. 검수는 서두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예, 전하.”
이상의가 응했고, 왕은 두 사람에게 과자를 건넸다.
늘상 행하던 의례였지만 이쯤 하자는 축객이기도 했기에 두 의정은 받쳐 든 과자를 금세 해치운 뒤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