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8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왕은 옅게 침음하고는 책장을 넘겼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이었다…….”
왕은 일독을 마치지 못하고, 다만 질린 얼굴로 아직은 초반인 책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막 홍문관에서 검수를 마치고 완성한 책이다.
만백성의 민족의식과 동질감을 빠르게 고취할 수단이자 경전으로, 말단의 서원과 향교에 배부할 목적인데.
‘……이걸로 되나?’
왕은 의문을 느꼈다.
만백성이 모두가 식자는 아니다.
그런데 신인神人 단군이 박달나무로 내려왔다는 건국 일화를 시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의식한 듯 고대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한 서책은 보통의 백성들이 흥미로워할 물건이 아니었다.
‘식자들이라면 좋아하겠지만…….’
절대다수의 백성에게서는 공감과 성원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선전을 위해서라면, 다소 천박할지라도 국뽕TV 같은 자극적인 맛이 있어야 한다.
왜 말도 안 되는 헛소문과 낭설이 유독 빠르게 퍼지고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는 걸까?
그야,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식성 또한 자극적인 것에 쉽게 심취하듯 지식과 정보 또한 그러한 면모가 있다.
“이래서야 2부, 3부도 기대하긴 힘들겠군.”
근래의 성세를 논하겠다는 2부는 전형적인 선전물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2부나 다름없을 테고, 금시대의 백성들에게 교훈을 전달하겠다는 3부는 훈계질이나 마찬가지일 터.
어느 쪽이라도 1부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좋아할 법하진 않다.
“그렇다면……. 내가 힘을 좀 써야겠지?”
* * *
“전하.”
밖에서 내시가 아뢨다.
“세자가 입시하였사옵니다.”
“들라 하라.”
윤허가 내려지자 즉각 문이 열렸다. 약간의 한기를 몰고 등장한 사람은 당연히 세자였다.
“강녕하셨사옵니까, 아바마마.”
“이 아비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구나. 세자는 잘 지내고 있었느냐?”
왕의 물음에 세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소자야말로, 아바마마의 덕으로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좋구나. 앉거라.”
세자는 예, 짧게 답하면서 부왕이 권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왕이 일렀다.
“내가 홍문관에 일러서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할 책을 쓰게 했다는 건 세자도 알 것이다.”
“예에.”
“그 책이 오늘 막 당도하여서 읽던 중이었다. 세자도 한 번 보거라.”
왕이 서안에서 책을 밀어냈고, 세자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받들었다.
그리고 곧장 책을 펼쳐 담담한 얼굴로 눈길만 옮기며 일독해나갔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세자도 직접 보았으니 알 것이다. 이대로는, 백성들에게 좋은 뜻을 전하기가 어렵다.”
“소자 또한 그렇게 생각했사옵니다.”
“그래. 인쇄의 용이함을 누리고자 언문을 사용했으나 한자로 된 단어가 많아 되려 혼동을 초래하고,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하면서도 어조는 딱딱하니, 세인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왕이 애석하게 이르니, 세자의 면면 또한 애석함을 물들었다.
세자는 부왕이 대업의 성취를 위해 극도로 심려心慮를 써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업의 수단이 되어야 할 책이 본의에 부합하지 못하니, 부왕의 상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홍문관에 일러 다시 책을 쓰게 함이 어떻겠사옵니까?”
“으으음……, 아니다. 이 아비 역시 그러한 수를 고민해 보았지만, 이것도 좋아할 사람은 분명 있으니 관원들의 노고를 굳이 무위로 돌리지는 않기로 했다.”
“하오나 이대로는 대업을 달성하는 데 난관이 될 것이옵니다.”
“내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 아니, 네게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함이 옳겠구나.”
“……?”
세자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책이 이런데, 내용을 고치지 않고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그 방법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일까?
세자는 고민했으나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 방법이 실방사와 연관이 있사옵니까?”
부왕이 발언을 정정했는데, 마침 부왕과 세자 자신 사이에서 오간 변화라곤 실방사밖에 없었다.
본디 부왕이 자신의 수족이나 비수처럼 부리던 집단이었으나 미리 다루는 방법을 익혀두어야 한다며 넘겨준 것이었다.
과연 그 뒤로는 실방사를 상징하는 예조의 붉은색 비단 장계가 오롯이 서궐로 보내졌다. 그 내용이 하나같이 가볍지 않았으므로, 세자는 아조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밀스러운 일을 깨우칠 수 있었다.
실방사가 얼마나 다재다능하게 활용되는지도.
이번 일에서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왕이 답했다.
“그렇다.”
“……실방사를 쓴다고 할지라도, 소자로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써야 이 난관을 극복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부디 하교를 내려주십시오.”
부왕의 가르침이 부족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부왕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배움이 부족한 탓 아니겠는가.
세자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진지하게 여쭈었으나, 왕은 도리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웃으며 답했다.
“서책이 재미가 없다면, 재미가 있도록 가공하면 되지 않겠느냐?”
“가공…… 이라 하심은 책을 변조하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아니다. 멀쩡한 책을 굳이 변조하여 배부한다면 홍문관에 같은 일을 또 주문하는 것과 다를 바 어디 있겠느냐?”
세자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뽕TV의 선진 선동방식은 오늘날에 쉬이 떠올릴 법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효과만은 확실하다.
원본의 내용이 얼마나 시시하건 당장 오늘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떠들 수 있는 것이다.
“예시를 한 번 들어보자꾸나.”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감은 없었다.
국뽕TV와 같은 선전은, 현생은 물론 전생에서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지 희미해진 기억에만 의존하여 그들의 교묘하고 뻔뻔하면서도 허황된 괴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건 쉽지만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가르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자신이 예시를 보일 수밖에.
왕은 동국통감에서 따온 책의 서문을 가리켰다. 신인神人 단군이 박달나무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왕으로 삼았다는 대목이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조선은 신이 건국한 나라!’ 아니다, 이건 좀 약하구나.”
세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그때의 조선과 이때의 조선이 같지 않으며, 단군이라 할지라도 신인神人이라는 건 전설에 불과할진대 신의 나라라니.
그러나 21세기를 경험한 왕에게 이 정도는 약과였다.
“중국이 대대로 시기하고, 왜국이 틈틈이 침범해온 이유. 조선은 신이 선택한 나라이기 때문!”
“…….”
세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백성들이 좋다고 서로 소문을 퍼뜨리며 익히지 않겠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인이 단목에 내려와 왕이 되었다는 건 단지 전설에 불과할진대 극도로 과장하여 낭설을 퍼뜨린다면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않겠사옵니까?”
“세자의 말이 옳다. 그러나 아비는 이 이상의 좋은 방법은 떠올릴 수가 없구나.”
지구 반대편에서도 똑같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국가 단위로 노예제를 운영하는 식민주의植民主義를 정당화하고자 정부부터 지식인까지 나서서 선전선동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노비제를 폐지하기 위한 심리적 초석으로 하는 선동 아닌가.
“오직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할 것만 생각하고서 낭설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게 된다면, 말단의 풍속이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서원과 향교를 남겨두었으며 정론正論을 변조하지 않는 것 아니냐.”
왕은 서안의 책을 짚었다.
“만약 아조의 사대부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다면, 낭설을 퍼뜨리더라도 극단으로 비화하지 않고 자연히 제압될 것이다.”
말단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증진하는 게 사대부의 역할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신머리가 똑바로 잡혀있다면, 정론을 통해서 낭설을 진압하고 올바른 교육을 전파할 터.
“…만약 사대부들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반대의 일이 벌어지지 않겠사옵니까?”
“그것은 나라가 사대부의 육성을 잘못 해왔다는 뜻이니,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결과다.”
세자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말았다.
그간 부왕을 곧이곧대로 쫓아온 세자였으나, 막상 실방사라는 무기를 손에 쥐게 된 채 마음에 맞지 않는 수단을 마주하자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세자는 그러한 자신의 불충과 불효에 내심 놀라면서도, 좀처럼 달라진 마음을 꺾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말하거라.”
“아바마마께서 전교傳敎하신다면 소자는 이견 없이 따르겠지만, 감히 아뢰옵건대 소자는 하교해주신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사옵니다.”
“그러느냐.”
“꾀하고자 하는 결과가 아무리 옳다고, 수단마저 올바름을 포기하는 건 상책을 추구하는 방법이 아닐 줄로 사료하옵니다. 본의가 변질하는 순간 방식과 결과 모두 올바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옵니다.”
세자는 단단히 결의에 차서 말했다.
“아비는 이뤄야 할 대업이 있다. 이것은 쉽지 않은 목표다. 이 나라에 골수까지 찌든 폐단을 제거한다는 건 여러모로 감수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제도는 물론, 나라의 정체성이나 왕 일신의 안위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노비제로 백성의 절반이 착취당하고 있다면, 그 착취로 인한 이익은 얼마나 크겠는가?
조선에 산재한 모든 지주와 유지들이 그 혜택의 대표적인 수혜자였고 폐단의 철폐는 그들 모두를 잠재적인 적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전제국의 군주일지라도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조 고려의 골수까지 찌들었던 삼정의 문란이 신진사대부에 의해 시정되었을 때는, 나라가 바뀌고 옛 왕이 죽은 다음이었다.
그런데 노비제는 그 고려 시대부터 존속해 온 악습이다.
삼정의 문란 이상으로 지독하고 끈질긴 폐단인 것이다.
“누백년에 걸쳐 이어져온 인습에 맞서, 결과의 옳음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지경인데 어떻게 방식의 옳음까지 고려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지 못한다.”
왕의 단호한 시인에 세자는 숨을 삼켰다.
부왕조차 해내지 못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막상 생각해 보니 노비제의 폐지는 부왕마저 장담하지 못할 대사大事가 맞았다.
그러나, 다 망해가던 조선이 소생하고 기세 오른 금나라와 맞서 승리하며, 그들을 무릎 꿇리고 천자국인 명나라의 존속에 개입한 건 소사小事였단 말인가?
“가능하십니다.”
세자는 왕 못지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론 부족했다는 듯, 더욱 결의에 찬 얼굴로 단정했다.
“능히 가능하십니다.”
“당사자인 내가 하지 못하겠다는데, 어째서 세자가 단정하느냐?”
“세자가 봐온 아바마마께서는 해내지 못하신 일이 없으며, 당해내지 못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부정한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나의 비결이었다.”
결과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에, 수단의 올바름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래서 반정 직후 주도권 싸움을 걸어온 대비를 폭압적으로 억눌렀고, 개똥만큼도 쓸 데가 없는 간신배인 김자점은 암수를 써 살인 멸구 해버렸으며, 이전 역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거기에 동조한 이괄과 흥안군은 서로 차도살인借刀殺人한 다음 각기 선혜법 확대와 종친의 궁방전 몰수에 이용했다.
술수를 안에서만 쓴 것도 아니다.
해도海島를 장악한 채 대국의 후광을 믿고 뻔뻔하게 약탈을 자행한 모문룡과 동강진은, 명나라가 누르하치를 의식하는 것을 이용해 과감히 공격해 처단했다.
누르하치와 반목하기에 앞서 저들의 전력을 약화하고자 안에서부터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일군을 지휘하던 이패륵 아민과 그의 팔기를 소탕했으며, 격돌을 앞두고 거짓 칭신하여 재물을 빼돌렸고 내부에 분열을 유도해 홍태주가 친정에 실패했을 때 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술수는 적에게만 통용되지 않았다.
금나라가 파멸하자 국제 정세에 균형을 맞추고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재물을 반출하고 당쟁을 유도했다.
끝내는 명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몰아내기까지 했으며, 산동과 북직예는 금나라와 나눠 먹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금나라에 수출하던 식량을 의도적으로 빼돌려 식량난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진정 결과를 위해 수단에는 가리는 게 없었던 셈이다.
“나 또한 세자에게 간곡하게 가르치지 않았더냐?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단지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수행했기에 크게 주목받지 않았을 뿐.
“이 아비는 세자가 봐온 것과는 다르다.”
왕이 애석한 얼굴로 시인했다.
“아바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