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09화 (309/380)

인조, 명군이 되다 309화

“아바마마…….”

세자가 숨을 삼키고서 말했다.

“소자가 배움이 부족하긴 하나, 방식에 옳고 그름이 있다면 옳은 것이 그른 것보다 낫다는 고집만은 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소홀히 한다면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를 재현하게 될 것이다.”

“결과를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옳은 결과를 추구하는 과정 역시, 올바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에 왕이 웃었다.

“세자는 욕심이 많구나.”

“그 욕심을 실현하고자 한평생 배웠습니다.”

왕은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아비는 배움도 자질도 부족하여, 욕심은 많지만 근신하여 수단의 올바름은 감히 추구하지 못하였다. 세자는 나의 방식을 완강히 사양하나 아비는 반드시 대업을 성취해야겠으니, 이것을 해소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하명하시옵소서.”

왕은 서안에 놓인 책을 밀어냈다.

“홍문관에 명하여 이 책을 고치든, 실방사를 다르게 이용하든, 백성들에게 동류의식을 고취하여 아비가 대업을 성사하는 데 일조해보아라.”

“삼가 명을 받드옵나이다.”

“만약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때는 세자에게 아비의 방식대로 실효를 취하라고 전교할 수밖에 없다.”

천박한 방식을 취해 낭설을 퍼뜨리고 혹세무민할지라도 어떻게든 대사는 성취해야 했으니까.

이것이 아비이자 왕으로서 세자에게 내리는 기회이며 시험이었다.

과연 세자는 결과와 수단에 있어 모두 올바름을 추구할 자격이 있는지를 검증해보겠다는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세자는 왕명을 받드는 신하의 태도로 임했으나, 왕이 이내 웃어버림으로써 기류가 바뀌었다.

“좋구나.”

“……예?”

세자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세자가 이 아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배우면서도, 내심 내켜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게 무어냐? 옛말로, 도둑도 자식 앞에서는 찬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아비라고 이 방식이 옳다고 생각지는 않아.”

세자나 신하들에게 항상 강조했다.

올바른 방식을 고집하지 못하는 건, 타고난 자질과 학문이 부족해서라고.

그래서 그런 부족한 자질과 학문일지라도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도私道라도 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가르쳤다고 곧이곧대로 취하는 대신에, 스스로 사리와 시비是非를 가리며 올바름을 추구하고자 하니 자랑스럽구나.”

“…….”

세자로서는 생각지 못한 치하였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소자가 과욕으로 억지만 부려 성총만 어지럽힌 건 아닌지 송구스러울 따름이옵니다.”

“아비는 세자가 욕심을 부리는 것도, 억지를 부리는 것도 다 좋구나.”

“…….”

왕은 어조를 가라앉히며 덧붙였다.

“다만, 왕업이 욕심과 억지만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 분별해야 할 것은 수단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야. 일의 경중과 나 자신의 자질 또한 분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이번 일로 세자가 한 번 욕심을 부릴 자격이 있는지, 억지를 부려도 되는지 알아보자꾸나.”

“예.”

“쉽지 않은 일이다.”

“예.”

“진심으로 응원하마.”

어째서 수단의 옳고 그름을 분간하면서도 올바른 수단을 채택하지 못했는가.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면서도 끝내 사도를 취한 건 무슨 의미인가?

뜻을 굽히고 양보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세자가 자신과는 다르게 욕심과 억지를 부릴 자격이 되기를 바랐다.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 후계자이자 미래의 후왕後王이 유능하기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로서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삶으로나 능력으로서나 말이다.

“……망극하옵니다.”

“그래.”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렀다.

“물러나라. 바쁠 테니 더 붙잡아놓지 않으마.”

“예…. 강녕하시옵소서. 소자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세자는 예를 표하고는, 상념 많은 얼굴로 어전을 빠져나갔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왕 역시 고민이 많아졌다.

사람의 본성은 옳음보다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익도 흥미도 되지 않는다면 꺼리고 기피하기 마련이다.

또한, 장차 큰 이익이 될지라도 당장 얻고 느끼는 게 없다면 마찬가지로 꺼리고 회피하니 여러 사람이 배우고 익힘을 마다하며 방탕한 삶을 평생토록 이어가는 이유다.

이것이 다수의 본성인데, 왕으로서는 사도私道 외에는 좀처럼 쉬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고.

과연 세자는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궁궐의 여느 관리들과 다르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는 부류가 달랐다.

각기 후계자를 교육하고 시위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유망한 미래의 동량東梁들로서, 훗날 세자가 즉위했을 때 든든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었다.

오랫동안 세자를 모셔왔으니 즉위 후에도 모시는 게 익숙했고, 또 인연이 두터워 덕을 보기도 쉬웠으니까.

금상의 대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동궁東宮이라는 이칭이 무색하게도, 왕과 세자는 각기 경운궁과 서궐로 따로 살았다.

더욱이 서궐의 규모마저 방대하여 필요한 인력도 많은 만큼,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역시 숫자도 늘었고 독립성도 커졌다.

백관百官의 주인은 임금이지만, 두 관청에 한해서만은 세자가 실질적인 주인에 가까운 셈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정작 세자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부왕이 의도한 바였으므로 세자가 마다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시련이 내려지니,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는 세자에게 양지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래도 명목상 주인은 오롯이 부왕뿐인 만큼, 두 집단을 동원한다는 게 세자로서는 달갑지 않았으나 달리 동원할 수단은 음지의 실방사뿐.

이 집단들을 모두 배제하면 본인 혼자서만 움직여야 했는데 막중한 과업 상대로는 지난한 무리수였다.

‘이것이 현실이겠지.’

세자는 먼저 부왕에게 양해를 구했다.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모두 이럴 때 쓰라고 부왕이 안배해 둔 것이지만, 원칙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공무 밖에서 사적인 부탁을 통해 두 관청의 사람을 동원해도 되겠느냐는 세자의 부탁에, 부왕은 흔쾌히 응해주었다.

‘역시 부왕께서 의도하신 바구나.’

이제 남은 단계는 오롯이 두 집단을 부리는 것밖에 없었다.

때마침 회강會講 때, 강의와 시위를 위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가 모두 모이므로 세자는 이때를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며칠 뒤였다.

* * *

“……역시 저하께오서는 학문을 익히고 강론講論하는 데 막힘이 없으십니다.”

세자시강원사世子侍講院師를 겸임하는 영의정 이상의가 평했다.

세자시강원에서 당상관 이상은 대신들이 겸직했다. 대위大位의 후계자를 교육하는 데 말단 관료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

그러면서도 막상 겸직 전용의 당상관들은 세자의 학문을 시험하기 위한 회강會講 자리를 제하고는 보통 강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세자시강원이 당하관에 한하여 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세자시강원부世子侍講院傅를 겸임하는 좌의정 남이공 또한 말했다.

“저하께서 학문을 나날이 성취하시니 이 나라의 앞날 또한 무척 밝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한순간의 성취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한평생 닦아야 하는 것이니 저하께서는 유념하시어 태만해지지 않아야 하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좌의정.”

세자시강원의 사부師傅가 각기 만족하며 회강會講이 파했다.

세자는 평소처럼 배웅을 위해 대문까지 나아갔고, 두 의정과 함께 마찬가지로 회강에 참석한 좌우左右 빈객賓客들도 품계대로 배웅했다.

그리고 겸직이 아닌 정삼품 당하관직인 보덕輔德의 차례에도 이르렀다.

“저하, 오늘도 노고 많으셨습니다.”

“다 보덕께서 힘써주신 덕입니다.”

세자는 치하와 함께 보덕의 손을 붙잡고 다가가, 조용히 덧붙였다.

“당하관들은 남으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보덕 강석기姜碩期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금세 가라앉아서는 침착하게 답했다.

“예, 저하.”

“감사합니다.”

세자의 밀명을 받은 보덕은 문간을 나서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순번을 기다리는 하관들에게로 나아갔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지시를 내리는 건, 오롯이 왕에게만 충성해야 하는 신하나 세자 양자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당장 세자시강원 보덕을 맡은 이는 강석기姜碩期.

다른 사람도 아닌 세자의 장인이었다.

애초에, 세자의 장인이 시강원을 겸하지 않는 사실상의 장관을 맡고 있다는 점 또한 왕이 시강원을 세자에게 맡겼다는 방증이었다.

“저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하네.”

보덕이 세자의 뜻을 거론하니, 하관들이야 응당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세자익위사들 역시, 세자가 나서지 않았는데 먼저 자리를 떠날 수는 없는 법.

그렇게 한 자리에 세자를 보필하는 문무 후대의 동량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서 세자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내게 엄명을 내리셨는데,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세자가 학문 외에 도움을 구한 적이 있던가?

시강관과 위사들은 모두 놀라워하다가, 이내 열정적으로 달아올라서는 답했다.

“말만 하시옵소서!”

“예! 말씀만 내려주신다면 성심으로 받들겠습니다!”

시강관과 위사들은 모두 전도유망하고 촉망받는 후대의 동량들.

아직 관료로서 지낼 세월이 한참 남아 있는데, 미리 인연까지 쌓은 후대의 왕에게 공로마저 미리 세워두는 걸 마다할 이는 없었다.

사소한 공로일지라도 지금 쌓아두면 나중에는 열 배, 백 배로 돌려받을 테니까.

모두가 열정적으로 황금 같은 기회를 반기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중도를 지켜야 했으니까.

“전하께서는 허락하셨습니까?”

보덕 강석기였다.

세자시강원의 실질적인 장관이자, 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자를 따르는 뭇 사람들의 대표이자 대장인 그.

오히려 그런 위치였기에, 세자와 세자를 따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서라도 대원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세자 역시 공감하는 바.

“물론입니다. 전하께 이미 상주드렸고, 며칠 전 윤허를 받았습니다.”

세자의 대답에 강석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소관들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 * *

이건 강석기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저하께서 참으로 난처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회강이 파한 뒤, 세자는 자신을 따르는 시강관과 위사들에게 모종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논의할 시간을 주고자 먼저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러자, 남은 이들은 과연 세자의 안배대로 논의를 시작했다.

“경연과 시위는 일정대로 다 하면서 퇴궐한 뒤에 또 시간을 내어달라니…….”

참으로 난처한 주문.

열정적으로 응하던 시강관과 위사들을 단번에 식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별 수 없지 않습니까? 저하의 지시를 이행하느라 본분을 놓칠 수는 없어요.”

“저하의 지시를 이행하는 게 곧 시강관과 위사들의 본분 아니요?”

“시강관과 위사의 본분은 각기 저하를 교육하고 시위하는 것이지, 전하의 지시를 받드는 게 아닙니다. 지시를 받드느라 본분을 소홀히 한다면 본말전도에요.”

그것이 세자의 본의이기도 했다.

신하란 왕을 모시는 신분.

그러한 신분으로 본분을 다하지 못한 채 세자의 지시만 이행한다면, 신하로서 올바르지 못한 행위였다.

단순히 원칙이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날 부왕의 신하는 훗날 세자의 신하이기도 했다.

당장 신하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젯밥만 노리는 자는 자신의 신하로도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행위를 권장할 수도 없었다.

“말이야 그렇지만…….”

“두 가지를 모두 준수하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비현실적이라 단정하기엔,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주문인 건 아니잖습니까?”

“각자 일과라는 게 있어요.”

시강관과 위사들은 왈가왈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진전은 없고 사적인 시간을 내어달라는 주문의 부담스러움에 대한 토의만 오가자, 강석기가 좌장으로서 중재했다.

“제관이 백날을 논의하여도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공론을 하나로 모으는 건 어렵겠소이다.”

반박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분명한 것이요. 저하의 지시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행하고,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뿐이지 않겠소?”

명쾌한 결론이었으나, 후자에 속하는 이들에겐 그렇지 못했다.

“혹, 오늘날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훗날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응당 감수해야 할 바요. 아니면, 애써 시간을 낸 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말씀하시고픈 게요?”

“…….”

“다들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소이까. 사정이 무엇이 됐건, 저하의 지시에 응할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그 결과는 오롯이 감당해야 하오.”

몇몇에겐 썩 달갑지 않은 결론이었다. 그런 기색이 드러나자 강석기는 더욱 단호하게 일렀다.

“저하가, 사정이 있는데도 무리하게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하여 원한을 품고 부당한 불이익을 가할 분은 아니잖소이까? 단지 공이 있고 헌신한 사람에게는 상응하는 신뢰를 가질 뿐이요. 헌신하려는 사람들 상대로 부정한 욕심은 내지 맙시다.”

강석기는 세자가 괜히 원망을 사지 않도록, 그가 무리한 지시를 내린 것보다는 공정함을 강조하여 지시에 응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을 구분했다.

그러자 시강관과 위사들은 자연스럽게 부류가 나뉘어, 헌신하여 신뢰를 받아보겠다는 자들과 이를 내켜 하지 않는 자들로 구분됐다.

정당성은 전자에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다수가 후자에 속했다.

그러니 서로가 편치 못한 기색을 교차하며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니, 의도를 성취한 강석기가 다시금 일렀다.

“우리 사이에 괜한 분란을 일으킬 거리도 아니거니와, 그런다고 저하께서 좋아하지도 않으실 터이니 논의는 이쯤하고 어떻게 처신할지는 각자 돌아가서 결정하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강석기가 무리하여 품계순으로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니, 시강관과 위사들은 마지못하여 하나둘 해산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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