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0화
세자의 주문은 단순히 퇴궐 후 사적인 시간만을 내어달라는 게 아니었다.
거기서 한술을 더 떠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홍문관의 책을 가르치라고 한 것이다.
난처한 데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주문이었다.
갑자기 제자를 받아들이라니!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난해한 점마저 덧붙었으니, 바로 교육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배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홍문관의 책은 시험을 볼 때 필요한 사서오경四書五經과는 다르게 역사를 가르치고 오늘날의 성세를 찬미했다. 완전히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일정 부분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몸소 보고 들어서 알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익힌다는 것도 심력이 아예 안 드는 작업은 아니었다.
세자에게 얼굴도장 한 번 제대로 찍어보겠다, 열화熱火처럼 나서던 시강관과 위사들의 기세가 단숨에 얼어붙은 이유였다.
사적인 시간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공부까지 하고, 가르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자라도 제 발로 찾아오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저하께선 어찌하여 이렇게 난처한 지시를 내리셨는지.’
강석기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장인이면서 시강원의 보덕으로 시강관과 위사들을 아우르는 강석기다.
특수한 위치에 놓인 본인부터가 세자의 간청을 아니 들을 수도 없는 노릇.
‘따르기는 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난처하고 난해한 주문을 내린 저의를 알 수 없으니 괴로웠다.
저하께서는 어찌하여 홍문관의 책을 교육하는데 이처럼 열성이신가?
그게 유교 경전이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가벼운 이유 때문은 아님이 분명하다.’
세자의 품성부터가 애초에 사소한 일로 관리들에게 도움을 구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정황 또한 분명했다.
홍문관에서 책을 편찬한 건 왕명이 있었기 때문이고, 세자 역시 최근 몇 번 경운궁을 방문했다.
홍문관의 책이 그저 재미없기만 한 책이 아니며, 이것을 교육하는 것 또한 그저 번거롭고 귀찮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 이상의 고민이 필요한가?’
강석기는 자문하였다가, 곧장 자답했다.
‘아니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할지라도 이것의 국가의 대사이며, 왕과 함께 세자가 대단히 공을 들인다는 걸 안다면 신하로서의 본분은 정해져 있었다.
강석기는 방문을 열고 별채를 향해 일렀다.
“문성文星과 문명文明이 있느냐?”
그러자 곧장 별채의 방문 두 개가 열리며 두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사옵니까, 아버지.”
“내가 귀중한 일을 맡았으니 더는 지체하지 말고 수행해야겠다. 너희 둘은 즉각 거리로 나가, 삼한의 역사와 오늘날의 성세를 배우고픈 자를 모집하여 데려와라.”
강문성과 강문명 두 사람에게는 부친의 명령이 급작스러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귀중한 일이 제자를 모집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며, 또 하필이면 경전도 아닌 삼한의 역사와 오늘날의 성세를 가르치는 건 뭐란 말인가?
같은 의문을 느낀 형제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도 된 양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형제 또한 알지 못한다는 걸 알자 어리숙한 얼굴로 부친을 마주했다.
“내가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강석기가 은근히 노한 목소리로 묻자 강문성과 강문명 형제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즉각 나가서 제자가 될 사람을 구해오겠습니다.”
“예, 아버지!”
강문성과 강문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명령을 받드니, 강문기는 편치 못한 기색으로 콧바람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장남과 차남은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지시조차 신속하게 따르지 못하는데, 과연 언제 학문을 성취하여 가문을 빛내고 자신을 편안케 할 수 있을까.
그저 누이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데 안도하여 인생이 풀렸다고 자찬하고 태만하게 늘어져 사소한 심부름조차 째깍 수행하지 못하니 부친으로서 애석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제자는 몇 명이나 데리고 오면 되겠습니까?”
“나가라!”
“예, 예에……. 문명아?”
“예, 형님…….”
부친의 엄한 타박에 강문성과 강문명 형제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 문간을 나섰다.
그 비실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강문기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장남이 여차하면 열 명, 스무 명이라도 데려올 듯 의문을 표하였지만 막상 한 사람이라도 구해올 수 있을까 의문만 들었다.
* * *
“세자시강원의 학사들과 익위사 위사들에게 일러 각자 홍문관의 책을 가르치도록 했다 하옵니다.”
최 상선의 보고였다.
실방사를 세자에게 내어주었기 때문에, 현재 눈과 귀가 되어주는 건 전통의 내시주였다.
“배우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도록 했다는 말입니까?”
“예에. 각자 제자를 모집하여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책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하옵니다.”
“그것도 퇴궐한 뒤 사적인 시간을 내어서 말이지요.”
“그러하옵니다.”
“세자가 어려운 길을 가는군요.”
정도正道라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그중에서도 올바름이 더한 것과 덜한 것이 나눠진다.
그런데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사람에게 지시하여, 일과를 다 끝내고 남는 시간에 책을 강의하게 한 건 정도正道 중에서도 너무 정도가 아닌가?
“세자 본인 또한, 동궁내시들을 부려 밖에서 책을 배울 제자를 수소문하고 있다 하옵니다.”
“……!”
왕은 깜짝 놀랐다가 답했다.
“그건 초강수군요.”
세자가 직접 나서서 백성을 가르친다니?
전왕前王 부자父子와는 판이한 오늘날 왕의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알지 못하는 이라면, 세자의 행위가 외람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과감한 선택이었다.
어디, 세자가 직접 백성을 교육했다는 전례가 있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전례가 없는 건, 세자가 왕의 백성을 친히 교육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게 불충했고, 그 상대가 부왕이라는 점에서 불효하기까지 하며, 여염을 친히 가르친다는 게 세자라는 체통에도 맞지 않거니와 후계자로서 금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자는 그런 오해를 다 감수하고서 직접 스승으로 나선 것이다.
“……분명 인기는 많겠습니다.”
식자라면 우려하는 마음에 선뜻 지원하지 못하겠지만, 정치적으로 궁리가 깊지 않을 백성들이라면 무수히 자원할 게 분명했다.
세자는 여러 업적에 더불어 끈질긴 봉사로 백성들에게 크게 지지받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하물며 장차 나라를 이끌 후계자이기까지 한 세자가 직접 교육을 한다는데 흥미라도 동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 교육이 분명 지루하여 무수한 낙오자들을 양산하긴 하겠지만, 천 명 만 명이 지원하여 일 할만 남더라도 백 명이고 천 명이었다.
그만한 사람이 끈질기게 세자의 교육을 이수하여 홍문관의 책을 외우고 설파할 수 있는 세간의 잠재적인 스승들이 되는 것이다.
‘……이 짐작대로만 된다면 파급은 놀랍겠어.’
세간에 흩뿌려진 스승들이, 제자를 양성하고 또 그들이 흩어져서 새로운 제자를 양성할 수 있으니까.
그저 자극적이기만 한 낭설을 퍼뜨리거나 한양에서 저 멀리 외방의 서원과 향교를 닦달하는 것보다 훨씬 큰 실효를 거둘 터였다.
‘사도를 취하는 대신 정도의 극단을 과감하게 취했구나.’
왕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세자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정도는 항상 말만 쉬우며 실천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십중팔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분별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올바르게 행동하고, 실천하며, 성취하지 못하기에 끝내 사도나 악도惡道를 걷는다.
‘정도의 극단을 달리는 이 과업 또한 마찬가지야. 백성을 천 명, 만 명을 모집하더라도 어떻게 그들 모두를 교육한다는 말이냐?’
또, 여염의 백성들은 십중팔구가 언문은 말하면서도 정작 쓰지는 못하는 일자무식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들에게 지루한 책을 가르쳐 얼마나 많은 제자를 스승으로 가꿔낼 수 있을까.
‘개중 일 할이 아니라, 일 푼만 남겨도 감탄할 일이다…….’
무수한 난관을 헤쳐온 왕조차도 탄식부터 나오는 과업이었다.
‘……하지만, 세자라면 가능할지도.’
왕은 여차하면 사도를 취했기에 정도만 고집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막연하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세자의 과업조차, 세자에게는 어쩌면 도리어 가장 편하고 쉬운 길일 수도 있었다.
갈대는 폭풍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우직한 바위는 공들이지 않고도 굳건히 버텨내는 것처럼.
아비로서는 그저 응원만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명하시옵소서.”
“내시부에서 사람 하나만 넣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세자의 제자로 말이옵니까?”
“예.”
“동궁내시들도 다 내시부의 사람이니 그들에게 시키거나, 외부인을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어찌하여 사람을 넣고자 하시온지요?”
“세자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그러면서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대신 아랫사람을 시켜 교습을 엿듣고자 하는 건 세자가 부담 가지지 않기를 바라서일까.
최 상선은 그 뻔한 의도에 조금은 질리면서도, 왕이라도 예외가 되지 않는 아버지의 심정에 공감했다.
“예, 외부인을 써서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겠사옵니다.”
“역시 최 상선밖에 없어요.”
최 상선은 덕분에 내정된 은행장을 역임하기 전 상선을 마지막으로 명을 다하겠다는 투정을 내심 부렸다.
그게 진지한 불만은 아니어서, 실상은 본인이 좋아 남아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 * *
백성들 사이에서 인망이 드높은 세자가 제자를 구한다는 소식에, 단 하룻밤새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
자원한 자 중에는 세자의 의술에 목숨을 빚졌던 이들로, 세자에게 진심으로 감화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대개는 세자의 드높은 인망과 후계자라는 지위를 의식해 얼굴이나 볼 겸, 겸사겸사 덕도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제자를 청했다.
극히 일부나마 사대부 또한 제자를 자원하였는데, 이들도 여느 자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자의 인품에 반한 자와 젯밥을 꾀하려는 자가 뒤섞여 있었다.
세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자원자 모두를 서궐로 불러들였다.
중외의 외인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들인 만큼 서궐을 수호하는 금군과 세자익위사들이 부쩍 고생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퉁명스러워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금군과 위사들의 쌀쌀한 검사를 받으며 서궐에 입장한 제자 자원자들은 동궁전의 반 층 높은 누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게 되었다.
그들 앞에 등장한 세자는,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의례와 소란을 모두 무시하고 책부터 펼쳤다.
“우리 해동海東은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를 지나 삼한에 이르기까지 고증할 문적이 없었으며…….”
대뜸 강론이 시작하자 여러 사람이 금세 입을 닫고 이목을 모았다.
그런 와중에도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강론이 이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견디질 못했는데, 오직 소란을 일으킨 자들만은 다시 서궐을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배우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