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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11화 (311/380)

인조, 명군이 되다 311화

세자는 일정이 빌 때마다 틈틈이 제자들을 불러 강론했다.

그때마다 서궐의 방문자는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했으나 소문이 진정되고 열화와 같은 반응도 가라앉자 점차적으로 제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서궐 외부에서 시강관과 위사들이 저마다 교육을 진행한 영향도 컸다.

그러자 사람이 많을 때는 제자들이 동궁전의 담장 너머에서도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어야 했다가, 이제는 다시 동궁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표면적인 수치만 보면 흥해간다고는 못 할 변화였다.

그러나 내실은 갈수록 달라졌으니, 서궐에는 세자의 강론에 집중하는 알짜배기들만이 남았고 이들은 집과 거리로 돌아가 각자의 가정과 주변에 자신이 배운 것을 설파했다.

그것이 단지 뭇사람의 호기심을 충족해주기 위함인지, 혹은 세자의 제자가 되어 강론을 듣는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 중요한 점은 집중해서 배우는 알짜배기들이 주변에 열성적으로 세자의 강론을 퍼뜨린다는 점이었다.

“세자의 강론이 끝난 날에는 고작 하룻밤 만에 그 강론의 내용이 한양 전체로 퍼질 정도이옵니다.”

최 상선의 보고에는 왕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참! 단순히 책의 내용을 외울 뿐인데도 한양의 백성들이 이처럼 관심을 기울인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소신 역시 감히 그러했사온데, 세자가 뭇 백성의 인망을 얻어 학문을 설파하고 수도 전체를 교화하니 세자 한 사람이 만 명의 사대부를 능히 능가하는 듯하옵니다.”

“내가 보기에는 과연 능가합니다!”

사대부들은 학문과 말단의 교화를 빙자하여 특권을 악착같이 수호해 왔다.

하지만 그런 변명이 무색하게도, 조선이 개국한 이래 군림해 온 무수한 사대부들이 달성하지 못한 과업을 세자는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왕으로서는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자랑스러운 점은, 이게 세자의 다른 업적처럼 왕이 만들어주거나 등 떠밀어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부왕이 맹신하였던 수법에 맞서서 자신의 철학과 의지를 관철했으며, 이후 실패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결과로써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낸 것이다.

이래서야, 세자가 정녕 아비를 능가하고야 말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인정이었다.

게다가 세자는 단신으로 역대 모든 사대부들이 해내지 못한 대업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훗날 세자가 신분에 관하여 신하들과 논의할 일이 생겼을 때, 이는 무적에 가까운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

사대부들이 저들의 특권을 수호하고자 가루가 될 정도로 우려먹은 변명을 단칼에 쳐낼 수 있으니 말이다.

“좋습니다, 좋아요! 세자가 재목材木으로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이미 일가를 이룩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온 천하의 홍복이옵니다.”

“그래요, 정녕 온 천하의 홍복입니다. 하지만 그 혜택은 나라와 백성들이 먼저 받게 되겠지요!”

“그러할 것이옵니다.”

“아아……. 진정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상선이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준 덕입니다. 참으로 고마워요.”

“신이 한 일은 단지 소식을 가져온 것뿐이고, 대업을 성취하고 후대를 안정한 건 세자이거늘 신이 한 게 무엇 있겠사옵니까. 민망하옵니다.”

“에이. 어디, 최 상선이 소식만 가져온 게 공로의 다랍니까? 내시부의 장관으로 나와 세자를 극진하게 보필해주었으니, 세자가 이토록 성장한 데는 분명 상선의 공로가 크지요.”

“…부끄럽사옵니다. 과찬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과찬이 아니라도 자꾸 그러시네.”

왕은 기쁜 마음을 거듭 표출하고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는지, 아예 손뼉까지 치면서 웃었다. 말 그대로의 박장대소拍掌大笑였다.

“내가 기뻐서 눈물이 흐른다는 말은 몇 번 들어본 적 있어도, 실제로 경험해본 적은 없는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눈물도 나는군요.”

“아!”

옥루玉淚가 흐르자 상선은 깜짝 놀라며 소매에서 비단보를 건넸다.

왕은 그 비단보로 눈가를 훔치고는, 몇 번 더 기분 좋게 웃었다가 겨우 숨을 돌려 진정했다.

“이럴 수가.”

진정한 왕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상선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니옵니다. 신 역시, 세자와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울고 웃기만 했겠사옵니까? 거리로 나가 소리까지 질렀을 것이옵니다.”

최 상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멋쩍게 웃었다.

내시로서 생식능력은 갖추지 못했다지만 입양이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실제로 최 상선은 입양을 통해 아들 하나를 거두었는데, 막상 상선을 통해서나 어전에서나 거론된 적이 없었다.

나쁜 이유로 거론되는 것보다야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만, 마음으로 자식을 길러낸 최 상선으로서는 씁쓸할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왕도 어쩌지 못할 문제인지라, 그저 멋쩍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소자의 자식에 대해서라면, 염려치 마시옵소서. 일 인분은 하고 있사옵니다.”

왕은 긴말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어떠한 말일지라도 사족이 될 테니까.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했다.

* * *

세자의 강론이 한양 전체를 들썩이니, 이에 따라서 요동치는 건 여느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탐구욕이 강하고 지식과 사세事勢를 쫓는 사대부와 식자들 역시, 세자의 강론에 참여하거나 원전이 되는 홍문관의 책을 구해 읽었다.

때마침 인쇄소가 활발히 부응하였으므로, 책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 자체가 귀하고 비싸다 보니 비용만 약간 들뿐.

그리고, 홍문관 관리들이 밤낮을 지새우며 고서古書와 고사古事를 집대성하고 문맥과 표현을 가다듬으며 지성인의 기개를 한계까지 발휘한 ‘책’은 뭇 사대부와 식자들에게 열화와 같은 반응을 끌어냈다.

이는 대단한 파급이었다.

힘을 가진 여론을 발생시키고, 실무자들을 배출하는 계층에서 홍문관의 책이 교양서처럼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의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의정께서도 보셨습니까?”

“이 사람이야, 직접 작업과 출판을 감독하였으니 당연히 보았소이다.”

이상의의 대답에 좌의정 남이공이 손을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입니다.”

“음!”

이상의는 짧게 침음하고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물론, 읽어보았소이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좌상의 말씀대로 탐독하였소.”

홍문관 책의 발행은 이상의에게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단순히 왕이 지시해서만이 아니라, 이번 작업을 통해서 흥미로운 고서와 고사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이 집대성하는 과정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삼한의 역사가 모여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군더더기를 솎아 비단결처럼 짜내는 것은 보통 상서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물을 탐독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어찌하여 홍문관의 책에 사대부들이 열광하는지는, 나로서는 그리 궁금하지도 않은 부분이요.”

출판을 감독하고 감수한 장본인으로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굳이 물어봐야만 아시겠소?”

이상의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남이공은 수긍하며 손을 저었다.

“소관이 괜한 질문을 했습니다. 워낙 책이 한양을 경천동지驚天動地하게 만들어서 말이에요. 감독하신 영상께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좌상께서 괜한 질문을 하시는 걸 보니, 다른 저의가 있는 듯하오만?”

이상의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묻자, 남이공은 난처한 얼굴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주변에서 홍문관의 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게 이 사람과 무슨 관계란 말이요.”

“크흠……, 혹시나 몇 질을 먼저 받을 수 있다면 의정대신의 지고한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겠지요.”

“하하! 이 사람이 홍문관 영사라고, 책 출판까지 어찌할 수 있겠소이까? 그거라면 차라리 전하께 상주 드리는 게 확실할 거외다.”

책 편찬과 간행을 전담한 홍문관의 실무진들조차 책을 가지지 못한 실정이었다.

선진 인쇄기술의 도입으로 책값이 싸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일이 필사하던 시절에 비해서야 싸졌을 뿐.

장마다 활자를 일일이 배열하고 고정하며 수작업으로 한 장씩 찍어내야 하는데, 수십 권으로 이루어진 책이 어떻게 싸겠는가?

직접 책을 펴낸 홍문관 관리들조차 책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얼핏 어불성설語不成說로 비치나, 이것이 현실이었다.

일꾼들을 부려 저택을 지었다고 해서 일꾼들에게 저택을 하나씩 다 나눠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고민하던 남이공은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의정 대감께서도 손을 쓰지 못하신다면 홍문관 관리들은 더더욱 난처한 지경에 처해 있겠습니다.”

“아니 그렇겠소이까.”

“그럼, 전하께 상주해볼까요?”

“무엇을 말이요. 책 몇 질 내어줄 수 없느냐고 말이요?”

“그보다는, 홍문관 관리들조차 저들이 간행한 책을 가지지 못한 게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남이공이 사람 좋은 소리를 하니, 이상의가 곤란한 얼굴로 되물었다.

“……홍문관 관리만 따져도 영사領事부터 정자正字까지 스물이 넘는데, 그들 모두에게 책을 나눠주는 건 불가능할 거외다.”

“간행에 기여한 사람들로만 국한하여서 말입니다.”

“간행에 아니 힘쓴 사람은 없소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서리와 녹사들까지 간행에 힘쓴 공이 있다고 나설 거요.”

“으음…….”

남이공이 쓰게 침음했다.

사실, 홍문관 관리들에게 선심을 쓰고자 한 건 순전히 인품의 발휘가 아니었다.

몇몇 홍문관 관리들은 품계도 낮고 가문도 빈한하여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자도 있을 터.

일단 대왕에게 상주하여 홍문관 관리들에게 책을 나눠준 다음, 의향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이 적당한 값에 매입해줄 심산이었다.

술책이 다소 교묘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이상의가 속내를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무리수라고 여겼는지 썩 호응해주질 않았다.

남이공이 아쉽게 여기는 찰나.

“……좌상의 발상이 아예 그릇되지는 않았소. 내가 전하께 상주는 드려 보리다.”

“혼자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두 의정이 함께 찾아갈 필요까지 있겠소? 어차피 나도 전하께 따로 상주드릴 말씀이 있으니, 겸사겸사 해결한다면 편하겠다 여겼을 따름이요.”

어차피 대왕을 뵐 생각이었는데 뵈는 김에 말이나 해보겠다는 투였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대수롭지 않은 일이요.”

* * *

“이러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이상의가 보고했다.

“좌의정이 과하게 인품을 발휘하려는 것을 보니, 복심을 알 듯합니다.”

왕의 여유로운 발언에 이상의 또한 작게 웃으면서 답했다.

“좌의정의 인품이 특별히 인색하지는 않으나, 이유 없이 베풀 정도로 유난하지도 않지요.”

“내수사의 귀한 자산을 들여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니 괘씸합니다.”

“성덕에 누를 끼칠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속이 너무 뻔히 드러나긴 하지요. 좌의정이 원한다면 몇 질 쟁여두라고는 전해두겠습니다.”

남이공이 그간 세워온 업적과 비교하면 애교나 다름없었다. 그가 명나라에서 이리저리 타서 보내준 금은만 해도 어디인가.

그게 오늘날 은행의 밑천이 되었으니, 이 정도 치하는 사소했다.

“좌상이 무척 기뻐할 것이옵니다.”

이상의가 씨익 웃었다. 대신 간청하여 남이공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차후에 소소히 보답받을 수 있을 터.

용무를 마친 이상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것은 신이 좌의정의 요청을 듣고 떠올린 것인데…….”

“말씀하세요.”

“좌의정에 달하는 그조차 책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데, 뭇 세인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또한, 세인들이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 오직 홍문관의 책뿐이겠습니까?”

인쇄소의 진흥으로 세인들이 서책을 훨씬 구하기 쉬워진 건 사실.

그러나 한없이 목마르던 사람이 한 모금의 물에 더욱 갈증이 나듯이, 한양과 팔도에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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