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2화
이앙법의 도입으로 식량 가격은 빠르게 하락했다.
경기도와 일부 하삼도에서 시행하는 것만으론 팔도를 모두 부양할 극적인 생산량이 발생하진 않았으나, 사람들은 경향을 본 것이다.
이앙법이 점차 확대하고 발전할수록 식량이 넘쳐나게 되리라고 말이다.
여기에는 화폐의 도입 또한 한몫했다.
세금으로도 낼 수 있는 신용도 높고 보전성도 뛰어난 거래의 수단이 생겨나자, 시시각각 손상하고 변질하는 양곡은 축재의 수단으로는 매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소모하는 것 외에도 축재의 수단으로 상당한 수요가 있었던 양곡이다. 사실상 그 두 가지가 곡가穀價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라 할 수 있었는데, 기둥 하나가 반쯤 무너져 버린 것이다.
농경이라는 전통적인 수입구조가 약화하자 영리하고 발빠른 지주들은 다각화를 시도했다.
일부는 땅이나 재산을 처분하고 상단을 설립했으며, 직접 나서는 대신 다른 상인이나 상단에 투자하기도 했고, 은행의 조합원이나 고객이 되었다.
말단의 지주들마저 이러한 형국이었으니 대지주 중에서도 대지주인 왕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왕 본인은 이미 내수사를 통하여 은행을 설립했고, 조정 및 은행 구성원들과 나누 가진 의결권과는 별개로 수입은 온전히 거두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현재 진행형인 국내 사업들 외에도, 국가가 팽창하고 범선 수요가 폭증하면서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해진 탓이다.
은행과 함께 설치한 주조소가 이익이 되어주기는 했다.
화폐를 구성하는 실제 금속의 가치보다 명목 가치가 더 높기 때문이다.
화폐 발행에 주조를 통한 차익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의 신용도를 높이고 범죄자들의 화폐 위조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이 주조차익에도 한계를 둬야만 했다.
재료비로 천 원을 들여서 만 원 가치의 화폐를 만든다면 구천 원이라는 막대한 주조차익을 누릴 수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찍어낸 화폐를 백성들이 믿고 거래 수단으로 사용하겠는가?
만약 사용한다 치더라도, 범죄자들이 그 막대한 주조차익을 누리고자 위조를 시도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러한 병폐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주조차익에 한계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에게는 또 새로운 재원이 필요했다.
인쇄소는 그 과정에서 설치되었으며, 막대한 수요에도 극단적으로 부족한 공급은 곧 인쇄소의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영의정이 그 인쇄소의 수입원을 흔들고자 했다.
“좌의정에 달하는 그조차 책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데, 뭇 세인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또한, 세인들이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 오직 홍문관의 책뿐이겠습니까?”
왕은 곧바로 한 가지 구상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이 이상의 또한 의중에 품고 있는 바였을지 몰랐다.
아니, 확실히 그러했다.
왕으로서는 쉬이 인쇄소의 수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순히 탐욕 때문이 아니었다. 왕은 항상 자신의 주머니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공공에 사재를 투입해왔다. 오늘날 성세의 밑바탕에는 비단 왕과 여러 사람의 노력만 깃든 게 아니라, 왕의 막대한 사유재산 또한 양분으로서 포함되어 있었다.
수입이 줄어들면 그만큼 국가에 재투자할 재산 또한 줄어든다. 내킬 리 없었다.
“책이야 항상 귀하고 부족하지요. 인쇄소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인쇄소를 확대하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사업의 섣부른 확장은 자멸을 일으킵니다. 수요에 적당한 부족분을 남겨두는 것이, 잘 나가는 사업을 고꾸라뜨리지 않게 하는 비결이지요.”
“그러나 이건 공공의 사업이지 않사옵니까?”
“과연 나는 공공이지 않은 사업을 한 적이 없어요.”
약간은 동문서답과도 같은 대답.
이상의의 질문도 옳았고, 왕의 대답 또한 옳았다.
인쇄소는 단지 내수사의 수입 벌충이나 그 수입을 통한 재투자만을 노리고 설치된 게 아니었다.
나아가 사대부들이 학문을 닦고 그것을 퍼뜨릴 수단이 될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확산 또한 중요한 목적 중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언문사용의 확대와 공공의 교양 증진은 또 어떤가.
사익만 아닌 공익의 추구는 은행이나 주조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왕이 덧붙였다.
“그런 공익의 추구도 공공의 사업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밑천까지 다 내어줄 작정으로 베푸는 건, 선의가 아니라 오만이자 자멸이 아니겠습니까?”
“약간의 자선慈善이 오만으로 비치거나, 자멸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이상의의 담담한 대답에 왕은 안색을 굳혔다가, 이내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딱, 딱.
왕은 고민했다.
이상의의 구상과 자신의 짐작이 당장 인쇄소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었다.
반응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결과 역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할 터.
그러나 인쇄소 수입에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며, 먼저 값비싸게 책을 매입한 자들에게서 원망이 나올 공산도 컸다.
이상의가 말했다.
“오롯이 공익을 추구하려는 것뿐입니다.”
왕은 고민하였지만, 그 고민이 길어지지는 않았다.
남이공도 한 게 있어서 배려해주는데 이상의에게는 해주지 못할까.
오히려 이상의는 여느 의정들보다도 특히 가상하고 고생한 편이었다. 절대적인 수치로 비교하면 아닐지 모르겠으나, 왕은 이전 역사에서 이상의의 천수天壽를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의정께서 간언하시는데 내가 아니 따를 순 없지요.”
“망극하옵나이다.”
“대신, 영의정의 이름을 조금 팔아야겠습니다.”
왕이 덧붙인 말에 이상의가 놀라서 말했다.
“신은 전하께서 간청을 가납해주신 것만으로 은혜가 과분한데, 어찌 이 이상을 바라겠사옵니까?”
“알량한 이유입니다. 내가 내수사와 인쇄소를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책을 팔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데 같은 이름으로 영상의 간언을 들어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상의가 쓰게 신음했다.
말이야 책을 파는 입장이니 이름을 빌리겠다는 소리였지만, 궁극적으로는 큰 명예를 양보하는 셈이었으니까.
왕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게 곧 영상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이 나를 위해 힘써준 역사를 다 알고 있는데 이 정도도 아니 해드릴 수는 없지요.”
진정으로 양보가 아깝지 않았다.
“신이 행한 것은 오롯이 본분을 다하여 과오를 속죄하기 위함일 뿐인데, 성상께서는 하늘과 같은 은덕으로 감싸주시고 베푸시니 신이 만 번 죽어도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 분의 이는 이미 갚으셨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되겠군요.”
“하하하…….”
왕은 이상의가 이미 천수天壽를 극복해가며 자신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상의로서는 그저 반쯤 농담으로 여길 따름이었다.
사람이야 한 번 났으면 한 번 죽는 것. 제가 언제 죽다 살았는지 어떻게 알며, 또 확신하겠는가.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이것이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인생이라는 것만 알고 또 확신할 따름이었다.
* * *
한양 한가운데 공사판이 펼쳐졌다.
그 규모가 심상치 않고, 나라에서 벌이는 일이라는 소문까지 돌자 금세 사람들이 관심을 드러냈다.
“여기서는 뭘 하길래 이렇게 분주하단 말인가?”
한 구경꾼이 공사판 앞에서 말했다.
자리에 원래 있던 집들은 진즉 해체되어 사라진 뒤였고, 말끔해진 터에 틈틈이 세워진 대들보들은 굵기와 높이만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설마, 새로운 궁전이라도 짓는 건 아니겠지?”
한 구경꾼의 조심스런 우려에 누군가 답했다.
“지금 나랏님은 궁궐 공사라면 학을 떼는데, 설마 새로운 궁궐이겠나?”
“옛말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않았나!”
초심이 변질하여 촉망받던 임금이 타락하고 궁궐 공사를 남발했던 건 그리 오래전의 과거도 아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영건營建이라면 지레 기겁부터 하는 건 당연지사.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만 보아도 놀라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궁궐이 아니라…….”
지나가는 누군가가 슬쩍 나서자, 금세 주변의 이목이 몰렸다.
“아니라?”
“뭐더라?”
“……그걸 왜 우리에게 묻나?”
중인들의 한심한 눈빛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던 사내가 당혹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는 끙끙대다가, 죽다 살아난 얼굴로 답했다.
“도서관圖書館!”
“뭐?”
“도서관!”
“그게 뭔가.”
“……그건 나도 모르지.”
중인들의 눈빛이 다시 한심하게 변했으나 이번에는 사내도 별 수 없었다. 이름만 얼핏 들었을 뿐이었다.
서책이 무척 진귀하고 값비싸기까지 한 시대.
책을 쌓아두는 장소가 없지는 않았으나, 임대나 공유를 위해서라기보단 순전히 기록보관서나 진귀한 도서를 비축해두는 장서각藏書閣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에 내재된 가치와 지식을 선뜻 외인外人과 공유하려는 사람 혹은 집단은 흔치 않았고, 오직 소수만이 세책점貰冊店을 운영하면서 비싼 삯을 받고 잠시 책을 빌려줄 따름이었다.
그러니 민간도서관의 개념이란 전무할 수밖에 없다.
혹, 팔도를 이잡듯 들쑤시면 인품이 좋아 책을 막 빌려주는 사람이 몇 명은 있는 정도일까.
도서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와도 대답이 궁해지는 이유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름만 아니라, 개념조차 낯선 게 도서관이었다.
“아무튼! 궁궐은 아니라는 걸세!”
“……흐음.”
사내가 확언하자 몇 사람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으나, 광해군의 치세는 외면할 수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상흔이 얕지 않았으므로 몇몇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눈을 가릴 요량으로 이름만 이상하게 붙여놓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저기 저 대들보부터 보게. 저게 어디 평범한 집을 지을 대들보인가?”
족히 복층의 건물을 올리고도 더 남을 정도였다.
근래 부쩍 부유해진 한양인 만큼 복층이 많아지긴 했지만, 대부분은 시전이나 대로변에 존재했는데 대개 면적은 집 한 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좁은 부지에 공간만 더 만들기 위해 층수를 올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
그런데 소위 도서관이라는 건물은 수 채의 저택을 포용하고도 남을 면적에서 대공사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래서야, 당한 게 많은 백성들로선 일단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뭐어…….”
한 사람이 슬쩍 운을 떼고서 덧붙였다.
“정말로 궁궐 공사 같았다면 이렇게 조용하지도 않았지.”
“으응? 시끄럽기만 하구만.”
“저기 공사판 말고, 나랏님 계신다는 궁궐 앞 말일세.”
“아아.”
중인들은 감탄하며 수긍했다. 과연 궁궐 공사였다면 관리와 선비들부터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한양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공사를 눈치 채지 못하지도 않았을 터.
뻔히 큰 공사가 벌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조용하다는 건, 그들이 우려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그럼 별일 아닌 건가?”
“아마도?”
“뭐야, 괜히 호들갑 떨었잖나!”
“그걸 왜 나에게 호통을 쳐?!”
쓸데없이 벌어진 다툼 앞에서, 대목장과 인부들은 바삐 공사판을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