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5화
수차례 포격을 달린 해적들은 더 공격하지 않고 다시 선수를 돌려 다가왔다.
저항이 없으니 항복한 것으로 여겼을까.
배裵 제독, 옛 이름 페르바스트는 의도한 대로 전개되자 죽다 살아난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거듭 포격을 맞은 갑판의 상황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포격에 배의 곳곳에 터져나갔고, 그런 나무 파편을 맞고 쓰러진 사상자가 즐비했으니까.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포격에 튀긴 바닷물과 뒤섞이며 파도의 요동을 타고 갑판에 어지러이 번졌으며, 우왕좌왕하는 사관들을 따라 선홍색 흔적을 어지러이 남겼다.
도저히 안도할 수 없는 광경.
그러나 감정에 휩쓸리기엔 상황이 너무 위급했다.
배 제독은 수시로 다가오는 적 선단을 주시했으며, 양측이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최초의 포격이 이루어진 거리에서 채 절반이 안 될 정도로 간극이 좁아지자 배 제독이 외쳤다.
“선형진을 펼치고 즉각 방포하라!”
반격을 알리는 지휘관의 목소리에 사관과 선원들이 즉각 반색했다.
그동안 시시각각 날아드는 죽음을 그저 각오만 하고서 얻어맞기만 해온 그들이다. 참기 어려운 공포이자 고통이었고, 또한 슬픔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방포!”
사관의 구령과 함께 그간 잠들어 있던 대포가 불을 뿜었다.
꽈과과광!
기함에 이어 다른 세 척의 배에서도 굉음과 함께 포연을 자욱하게 뿜어냈다.
지상군과는 다르게 홍이포를 원형 그대로 가져온 대포다. 위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어, 기함의 갑판에서 벌어진 참상이 적에게도 똑같이 재현됐다.
더욱이 적들은 선수를 향하고 있던 참.
무방비하게 노출된 뱃머리가 연타 당하며 마구잡이로 파편을 뿜어내더니 끝내 바우스프릿Bowsprit이 격중했다.
선수의 거대한 장대가 부러지며 흘러내렸고, 그 끄트머리에서 십수 개의 돛줄이 위협적인 파열음과 함께 사방을 후려쳤다. 난간마저 으스러뜨리는 그 파괴력에 한 해적 선원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내장을 쏟으면서 바다로 떨어졌다.
단숨에 조향操向 능력이 급감한 지척의 적선敵船은 맞추기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적 또한 알았기에 애써 돛을 반쯤 접고 방향타를 돌려 전선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뒤따르는 건재한 선박이 앞서나갈 동안 탈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두 선박이 모두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선두의 배가 전장에서 이탈하기는커녕, 뱃머리를 더 얻어맞고 앞에서부터 기울어지는 동안 치고 나선 후미의 배 또한 순식간에 비슷한 꼴이 되었다.
배가 물 위를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건 날카로운 유선형의 몸체로 물살을 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뱃머리가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더는 물살도 가르지 못하고 오히려 나아가면서 물만 퍼먹게 되어버렸다.
곧, 두 척의 해적선 모두 돛을 공손하게 숙인 채 굼벵이처럼 다가오다 앞에서부터 잠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으아아아!”
적 선단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광경에 사관과 선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배 제독 또한 난간을 붙잡은 채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지나가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해적선은 비록 침몰하였으나 그 배에 타고 있던 해적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과연 멀지 않은 수면, 배가 죽어가는 자리에서 해적들이 시체의 살을 뚫고 나오는 기생충처럼 쏟아져 나왔다.
해적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뻔뻔하게도 그들이 의지하고자 한 대상은 배 제독의 선단이었다.
한때 자신이 표적으로 삼았던 이들에게, 한목숨 건지고자 구차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배 제독으로서는 역겨운 광경이었다.
만약 자신의 선단이 비무장하여, 무기력하게 나포되었다면 배는 해적선이 되어 다른 내수사의 무고한 선단을 습격하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며 선원과 승객들은 노예로 팔려나갔을 테니까.
그래놓고 해충과 같은 목숨을 연명하고자 필사적이고도 뻔뻔하게 헤엄쳐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도움을 주더라도 과연 그들이 죄수로서 얌전히 수용될까?
해적은 원칙적으로 모두 교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놈들도 알고 있으니, 반드시 기회를 엿보아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해적들이란 어떻게든 죽어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도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 제독의 선단은 항행을 그치지 않았다.
해적들은 연신 몰아치는 파도를 맞으며 구차하고 필사적인 탈출이 무색하게도 하나둘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광경은 빠르게 멀어져서, 끝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우.”
배 제독은 고개를 처박은 채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갑판의 상황을 확인하곤 사관들에게 일렀다.
“승객들에게 위협이 사라졌다는 걸 알리고, 난장판을 정리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사관과 선원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변을 치워나갔다.
수병이기 이전에 상선 선원인 그들이다.
시신과 부상자를 옮기고 부서진 파편을 치우며 날카롭게 박살 난 끝을 정리하고 핏물을 닦아내니, 갑판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되었다.
되돌아온 승객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 * *
한양, 서궐에서.
막 제자들을 물린 세자는 동궁내시에게서 권자卷子를 받아 들었다.
동궁내시는 내시부 외에도 실방사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가 건넨 권자는 붉은색 비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발해渤海에서 해상전이라니…….”
이순신이 조선의 바다를 평정하여 해적을 일소하고 청정하게 가꾼 것이 그리 오래전 과거도 아니었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은 더없는 성세를 이룩하여 서해西海를 온전히 아조의 것으로 만들며, 웅대한 범선帆船을 마치 쪽배처럼 무수히 건조하고 있지 않은가?
사정이 이러할진대 바깥에서 오랑캐가 흘러들어와 아조의 선단을 공격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위협했다니 세자로서는 분기탱천憤氣?天할 비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드는 생각.
“그대는 이것을 전하가 아닌 내게 가져왔군요.”
세자는 동궁내시를 향해서 말했다.
습격을 당한 선단은 내수사 소속이었으며, 내수사 위에는 왕과 내시부가 있다. 세자에게 보고가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동궁내시가 답했다.
“소인은 내시부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방사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중대한 정보가 감지했다면 실방사의 일원으로서 그 주인인 저하께 보고 드리는 건 당연합니다.”
동궁내시는 이중 신분을 이용해 세자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다.
세자는 동궁내시를 다그치고자 했다. 실방사 위에 자신이 있다면, 그 위에는 부왕이 있다.
내시부와 실방사에 동시에 몸을 담았더라도, 부왕을 모시는 내시부에서 정보를 빼서 자신에게 바치는 건 도의도 충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내 세자는 짐작하고서 물었다.
“전하께서 명령하셨습니까?”
신하들이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다. 이런 무기질적인 충성도, 왕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동궁내시는 세자의 짐작이 옳다고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실방사의 지휘권을 넘기면서, 마지막으로 세자에게 최대한 충성하기를 명령했다.
동궁내시는 그 명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세자는 짧게 신음하고는 끄덕였다.
너무나도 부왕다운 조처였다.
부왕은 세자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양보하고 희생할 분이었다.
괜히 시강원 당상들이 부왕의 내리사랑은 전례가 없고 비할 데 또한 없다고 거듭 강조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세자로서는 더욱 수신하고 보답하기만을 바랄 따름.
‘……하지만, 이 문제에서 내가 나설 부분은 없구나.’
세자가 맡은 실방사는 첩보와 정탐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니 정보를 수집하는 데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나, 그만큼 대응에도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상대는 소수의 치명적인 표적이 아닌, 해외海外에서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해충의 무리.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소굴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실방사가 그들처럼 똑같이 바다를 건너가 해악의 본거지를 쓸어버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아조도 마찬가지인가…….’
아무리 영화로운 성세를 이룩했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전례없는 부국강병을 구가하는 오늘날에도, 수백 년 원수이자 숙적인 남쪽 열도의 오랑캐들을 여전히 토벌하지 못하고 있잖은가.
현실이 이러할진대 남쪽 열도보다 훨씬 더 먼, 지구의 반대편까지 군사를 보내 해충들의 본거지를 토벌한다는 건 무모한 망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다에서 해충을 몰아낼 수 있을까…….’
자신의 권한 하에서는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겠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른다면 부왕께 상주 드릴 수는 있었다.
하다못해 실방사를 움직여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었다.
세자는 타개책을 고민하며 상념에 잠겨갔다.
* * *
청래도에 도달한 배 제독은 즉각 내지內地로 귀환하고자 선단을 분할했다.
말처럼 간단한 절차는 아니었다.
교전으로 발생한 사상자들 문제도 처리해야 했고, 정기항행 선단을 분할하며 줄어든 화물 용적량으로 청래도의 상단들과도 논의를 거쳐야 했다.
또한, 부제독에게 선단을 맡기면서 유사시를 대비할 당부와 함께 전략 또한 남겨주어야 했다. 이는 청래도의 관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참으로 번잡하였으나 배 제독은 능숙하게 처리해냈다. 어쨌거나 제독으로서 일해온 세월이 짧지는 않았다.
청래도에서 이런저런 사정을 급하게 정리한 뒤 내지內地로 향한 배 제독은 금세 한양에 도달했다.
다행히 바람이 좋았고, 또 해적과 조우하는 일도 없었다.
설사 그러한 불운이 재발하였더라도 빈 배는 쾌속하기 그지없어 추격당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귀환한 배 제독은 내수사를 찾아가 바다에서의 자세한 경위를 보고했고 한양의 처소를 찾아가 달포간의 여독을 씻어내렸다.
궐에서 부름이 온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제독은 입시入侍하라는 명령입니다.”
액정서掖庭署의 별감別監이 왕명을 전달했다.
귀국한 지 고작 사흘째인 배 제독의 낯은 여전히 초췌했다.
진정으로 안도할 수 있는 거처로 돌아오자, 지난 해전과 그 직후 뒷정리로 발생한 격무激務를 해결하느라 쌓인 피로가 단숨에 쏟아진 탓이었다.
그러나 지엄한 왕명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틀간 주어진 휴식만 하더라도, 기실 상황의 위중함을 따지자면 차고 넘치게 주어진 것이었다.
“의복만 정제하고서 바로 입시하겠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배 제독은 사랑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구라파歐羅巴와 다르게 동방에서는 왕을 마주하는 것이 훨씬 더 위중하고 엄격한 행사라서, 복장에서부터 그만한 격식과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조선 땅에서 오래 머무른 배 제독에겐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사정이었다.
“부군.”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배 제독의 부인이었다.
“어인 일이요?”
“곧 출타하실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배 제독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답했다.
“그렇소. 전하께서 입시를 명하셨소.”
“처소에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다시 나가신다는 말입니까?”
왕명의 막중함을 모르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남편에게서 초췌한 낯이 역력한데 더 쉬지 못하고 불려감을 애처롭게 여기는 것이다.
이를 배 제독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명은 사감私感으로 어찌할 게 아니었다.
“큰일은 아니요. 단지 내가 보고한 게 있어서, 전하께서 하문下問하시고자 부르시는 거요.”
“일찍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배 제독은 부인을 안심시키고자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그의 특이한 생김새와 유별난 출신은 세간에서 얄팍한 관심의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만은 배 제독의 사람 자체를 봐주었다.
좋지 않은 머리와 이미 굳어버린 혀를 애써 다스려서 조선말만은 현지인과 다름없이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어도, 껍데기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항상 외부인 신세를 자각해야만 했던 배 제독에게는 고맙다 못해 감사하기까지 한 인연이었다.
“일찍 돌아오리다.”
배 제독은 부인을 끌어안고서 잠시 일별한 다음, 뜰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액정서의 별감은 더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이 먼저 발을 돌렸고, 배 제독은 그런 별감의 뒤를 쫓아 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