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6화
“전하.”
집무실 문 너머에서 내시가 알렸다.
“들라 하세요.”
윤허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건 붉은 머리칼의 이국적인 얼굴을 한 인물이었다.
배 제독, 옛 이름 페르바스트.
홍모이 출신으로 뭉뚱그려지나 더 정확하게는 네덜란드에서 왔다.
그는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서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와 사략선 선원이 되었고, 선단이 풍랑에 휘말려 표류하던 중 식수가 떨어지자 이를 구하고자 사관 벨테브레이, 동료 헤이스버르츠와 함께 한 미지의 섬에 상륙했다.
제주도였다.
배 제독의 생애는 대항해시대의 여느 선원들이 다 그렇듯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대개의 선원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교전이나 재난 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과는 다르게, 배 제독의 현재는 모험을 원하는 뭇 탐험가들의 이상적인 목표에 가까웠다.
구세계의 밑바닥에서 탈출하여 신세계의 핵심적인 위치로 올라왔으니까.
“삼가 주상전하께 인사 올리옵나이다.”
배 제독은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예의를 차렸고, 왕은 맞은편에 놓인 방석을 가리켰다.
“편하게 앉으세요.”
“예.”
“바깥에서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휴식이 짧지는 않았을지 걱정되는군요.”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전하께서는 개의치 마시옵소서.”
배 제독은 적응이 빨랐다. 그의 언어나 예의는 외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니까.
배 제독 본인도 놀라운 적응이기는 했다.
그러나, 비교적 수평적인 구세계일지라도 밑바닥에게는 수직적인 법. 드높은 존재들에게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거야 익숙한 일이었다. 동방은 단지 그게 예의범절일 뿐.
왕이 말했다.
“장계는 받았지만, 제독의 입으로 직접 사정을 들어보고 싶군요. 도대체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배 제독은 기꺼이 자신의 입을 열었다.
선단을 이끄는 위치에서 해상전을 경험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기억은 생생했으며 또한 강렬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구두 보고는 마치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왕으로서는 어쨌거나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마냥 남의 이야기처럼 듣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다시 청래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포로 몇을 잡아두지 못한 게 후회될 따름이옵니다.”
“이미 지난 일입니다. 개의치 마세요. 그리고 나는 해적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른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왕은 예나 지금이나 도적들을 싫어했다.
무고한 소시민의 일상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반정 직후에는 공신세력의 권력을 등에 업고서 소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처형해 버렸으며, 당시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포로를 사로잡았더라도 쓸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을 겁니다.”
심문이 생략되면 남은 건 처형뿐이다. 그리고 처형 또한, 나름대로 여러 사람 피곤해지는 행사의 일종.
자연의 손으로 그 처형을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그보다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군요.”
“하문하시옵소서.”
“세간에서는 아조 일대에 출현하는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을 홍모이라 총칭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화란和蘭과 서반아西班牙로 각기 소속이 다릅니다.”
화란은 홀란드, 즉 네덜란드의 음역이고 서반아는 스페인의 음역어였다.
혀가 꼬이는 발음 그대로 가져올 수 없으니 한자를 차용하여 비슷하게 명칭을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서반아西班牙도 그 나라 하나만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당장은 그 주인이 포도아葡萄牙의 주인 또한 겸하고 있어 두 족속이 한 데 섞여 있지요.”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제독의 보고에 따르면 해적 선단은 화란和蘭의 국기를 걸어두고 있었다 했지요.”
“예.”
“보통, 국기를 내건 그대로 해적질을 합니까?”
왕의 질문에 제독은 일순 흠칫하였으나, 이내 납득하고는 답했다.
“보통은 국기를 걸어두고서 해적질을 하지는 않사옵니다.”
만에 하나 추적당할 수 있으니까. 굳이 단서가 될만한 건 남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곳은 구라파가 아니고, 조선 또한 구라파의 국가가 아니므로 국기를 내리지 않더라도 무방하다 여겼을 것입니다.”
각지 대양大洋을 주유하는 유럽의 여느 해양 강국들과는 다르게 동북아 국가들의 해양 기술과 전력은 극도로 미진했다.
이들의 선박은 만만한 표적이다 못해, 나아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대개는 힘을 써줄 가치조차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대 해역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은 동북아 국가들의 추격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마당이니 국기를 숨기는 것도 피곤한 짓에 불과했다.
“아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뻔뻔하게 국기를 달고 해적질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신의 출신이 화란이기는 하나, 이곳의 족속들은 이문을 크게 밝히고 염치를 따지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하물며 그들은 이문만을 보고서 지구의 절반을 질러와 해적질까지 벌이는 자들이었으니, 더더욱 염치를 기대하기 어렵사옵니다.”
배 제독으로서는 자신의 과거이기도 했기에, 사정을 시인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왕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고, 그다음부터는 쉬운 법이지요. 저들의 계기가 무엇이 되었건 이번 해적의 침입이 마지막이지는 않겠지요.”
“그러할 것이옵니다.”
“나는 제독이 화란 출신이어서 다행입니다.”
누군가는 불행이나 오점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에게는 아니었다.
“덕분에 해적들의 습성을 잘 파악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적절한 대응책 또한 쉽게 수립할 수 있을 테지요.”
배 제독은 화란인이자 홍모이였으며 한때는 사략선의 선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장 아조의 해역에서 위협이 되는 존재들 또한 대개 그러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백전百戰하여도 불태不殆라.
“그대에게 조선의 바다를 부탁하겠습니다.”
배 제독은 감읍할 따름이었다.
* * *
본디 세자는 주변을 어지럽게 두는 법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주변의 환경으로 드러나는 법이고, 주변의 환경이 사람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법이니까.
그래서 세자는 스스로 수신하고, 또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고자 항상 주변을 말끔하게 정돈해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세자는 서안 위와 좌우로 권자와 책을 켜켜이 쌓아놓았다. 개중에는 사람의 손을 제법 오랫동안 타지 않은 것도 있어, 방 안은 퀴퀴한 먼지로 가득했다.
방문이야 이미 열어두었지만, 덕분에 밖에서 들어오는 볕으로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들만 더 잘 보였다.
세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손을 휘저으며 물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이에 세자를 시종하는 동궁내시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구라파나 서역, 화란과 서반아 등 저하께서 주문하신 것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료라면 전부 빠짐없이 가져왔습니다.”
“…생각보다는 많군요.”
서역은 이역만리의 존재였다.
최근 제주에 표류한 세 홍모이와 그들의 활약으로 서역이 조금 조명되기는 했지만, 조선에 있어 그들 세계는 닿지 못할 오지였다.
천하의 중심인 중원을 바로 옆에 두고, 그곳에서 막중한 대사마저 경영하면서 닿지 못할 서역 따위에 신경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실방사는 제법 다양하게 자료를 수집해왔다.
무려 남명의 수도 남경에 지부까지 설치해둔 채로 말이다.
“일대 홍모이들의 세력과 행보를 주시하라는 주상전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동궁내시는 보고와 함께,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나 원체 홍모이들이 저마다 따로 노는지라, 애석하게도 최근의 사건은 미리 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랜 감시에도 불구, 최근 해적의 활동을 미리 탐지하지 못한 것이 실방사의 실책으로 비칠까 염려한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족속이 제각기 횡행하며 사건, 사고를 일으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치밀하게 정탐해왔다는 게 도리어 놀랍군요. 마치 부왕께서는 최근의 사태를 예견하신 듯합니다.”
“대왕의 심모원려深謀遠慮는 극도로 깊고 치밀하여, 이미 실방사에서도 성심을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일단 따랐다가 뒤늦게 찬탄하는 일이 많습니다.”
동궁내시가 거리낌 없이 충심을 드러내니, 세자는 조금 침울해진 채 웃었다.
“과연 내가 부왕의 반만큼이라도 따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이미 세자의 지위만으로도 막중함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내시부와 실방사에서는 저하를 성심으로 받들 것입니다.”
동궁내시가 확언할 수 있는 건 그뿐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편이 세자에게는 막연히 잘 해낼 것이라는 위안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왔다.
세자는 실소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일은 잠시 차치해두고 나는 여기에 집중해야겠군요.”
세자는 서안의 책 위로 손을 놓았다. 구라파 일대의 지리 및 세력도를 정리해놓은 책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일대에서 횡행하는 홍모이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세자가 첫 절차로 꼽은 건 그들의 지리와 세력도를 익혀둠으로써 지정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었다.
동궁내시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명해주시옵소서.”
“당장은 없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지요.”
“예에.”
동궁내시는 꾸벅, 허리를 숙여 물러나는 예를 표하고는 세자의 집무실에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발걸음마저 멀어져 사위가 먼지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자, 세자는 책의 권두卷頭를 펼치며 침잠했다.
* * *
세자는 끊임없이 적의 사정을 공부하면서 깨우쳤다.
중원과는 지구 정반대에 놓인 오랑캐들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들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각축장임을 말이다.
서반아와 화란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화란은 비단 독립하기 위해서만 서반아와 전쟁을 이어온 게 아니었다.
양국의 싸움은 비단 독립만 걸린 게 아닌, 막대한 재원이 되어주는 해양 무역의 패권을 둔 경쟁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세력은 지구의 반대편인 이곳의 바다에서마저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서반아의 착취와 이에 맞선 화란의 독립 시도는 명분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근본적으로는 양 세력이 각자 더 많은 이문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계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란이 원래 활동하던 명나라의 남쪽 바다가 아닌, 발해渤海까지 침범하여 해적질을 벌였다…….”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일부 무법자無法者들의 일탈인가?
아니면, 단순히 그 이상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행위인가.
세자는 고민하였으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뚜렷한 증거는 없었고 내막은 불투명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분명해질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 들었다…….
그리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