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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17화 (317/380)

인조, 명군이 되다 317화

견고했던 팍스 에스파냐의 성세도 오늘날에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미래는 세계 각지에 자리 잡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부, 필리핀 총독령은 그러한 중임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도 남부에 존재하는 술루 술탄국, 마긴다나오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 연맹과의 전쟁을 근 백여 년 가까이 지속해왔으니까.

거리에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인종이 와글거리는 마닐라의 한복판.

필리핀 관저 총독실에서 회합이 열렸다.

“천하의 에스파냐 제국이 이런 미개국들과의 전쟁을 무려 백여 년 가까이 지지부진 이어오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발언자는 세바스티안 우르타도 데 코쿠에라.

깐깐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서 화려한 정복을 갖춘 그는, 파나마에서 총독을 지내다가 최근 필리핀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마닐라 관저에 당도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장관이 사람들 불러놓고 한마디 하는 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지사.

“내가 필리핀에 온 건 열도 남부의 민다나오와 팔라완, 보르네오에 웅거한 이단의 무리를 신속하고, 또 완벽하게 척결하기 위함이다.”

세바스티안은 지도 위에서 커다란 섬들을 손끝으로 찍으며 강조했다.

“이는 비단 제국의 영화와 누에바 에스파냐의 광대함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근방에 할거한 잡것들은 이단을 열성적으로 신봉하는 사악한 무리이고, 제국에 맞서 가짜 성전마저 선포했다!”

세바스티안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그의 제국, 에스파냐는 근본부터가 이단의 무리를 축출하는 데 있었다.

수 세기 전, 머나먼 과거 이베리아 반도는 미개한 무리와 사교도로 난립해 있었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개신교 각국은 수 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통해 사악한 이교도의 무리를 이베리아에서 모두 몰아내었으며, 이때의 개신교 각국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 오늘날의 성스럽고 영화로운 에스파냐 제국이었다.

즉, 이단의 축출과 정화야말로 제국의 근본이자 근간인 셈이다.

“세계에서 사악한 사교도의 무리를 몰아내는 것은 제국의 사명이고, 제국을 제국답게 만들어주는 정체성이며, 나아가 제국에 몸담은 우리들의 성스러운 의무다!”

세바스티안은 주먹을 움켜쥔 채로 선언했다.

“내가 필리핀 총독에서 물러나 이곳을 떠날 때, 주변의 사악한 사교의 무리는 모두 사라지고 그 땅에는 제국의 깃발과 함께 참된 진리의 복음이 퍼져 있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으니, 여태 이단을 정화하지 못한 너희 죄인들은 속죄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전에 헌신해라!”

신임 총독의 열정적인 태도에 대개의 관료는 당혹한 눈빛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그간 의지를 불태운 총독이 하나 없었겠는가.

그러나 세바스티안의 연설만은 유독 열정적이고 확신에 가득 차 있어, 종교적으로 심취하고 경도된 몇몇만은 안광을 빛냈다.

이단의 무리를 척결하는 것은 과연 진리를 추종하는 신자로서의 사명이었다. 이를 여태 해내지 못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사람이 격양된 어조로 찬동했다.

“총독 각하의 영광스러운 성전에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에 세바스티안은 그를 가리키고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악한 무리가 그간 끈질기게 저항해왔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제국이 섬에 웅크린 벌레들 몇 마리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던가? …아니다!”

세바스티안은 물음에 강렬하게 자답自答하며 덧붙였다.

“내가 이 문제의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주겠다! 놈들이 아직도 목숨줄을 연명하는 이유는, 이곳 주변에서 다른 이단자들이 성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안의 손끝이 남쪽에서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포르모사섬과 거대한 대륙, 열도가 있었다.

“제국에 반항하고 반란할 뿐 아니라 왜곡한 교리를 신봉하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네덜란드의 해충들, 그리고 교화되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외면하는 더럽고 못생긴 동방의 야만인들…….”

세바스티안은 애꿎은 지도를 후려쳤다.

꽝!

탁자가 부서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보는 사람이 혹 세바스티안은 진심으로 지도를 후려치면 그 위의 세력이 멸망이라도 하는 줄 믿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

세바스티안은 벌겋게 달아오른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누구도 제국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이곳의 이단자와 야만인들에게 똑똑이 새겨줄 것이다! 무한한 영광으로 나아가는 제국의 선봉에 바로 이 몸이 섰다고!”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가슴께를 거듭 후려치고는 팔을 휘둘렀다.

“그러니 다들 꺼져! 멍청하게 머뭇대지 말고 즉각 성전에 착수하라는 말이다!”

세바스티안의 일갈에 여러 사람이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러던 중 세바스티안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너!”

그 호명에 다른 이들은 식겁했다가, 자신이 아님을 알고 발길을 재촉했다.

지명을 당한 이는 중간에 세바스티안의 연설에 감화하여 찬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바스티안이 자신을 가리키자, 주변에서 도망치는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박차며 꼿꼿하게 섰다.

“예, 각하!”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에 산 살바도르로 보내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는 에스파냐령 포르모사의 수도였으며, 이곳에 보내겠다는 건 포르모사 총독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었다.

필리핀 총독령의 말단 실무진에 불과했던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Francisco Hernandez는 감명한 얼굴로 경례를 올렸다.

“명 받겠습니다!”

* * *

에스파냐령 포르모사에 부임하는 건 사지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미 포르모사섬 남부에 네덜란드령 포르모사가 설립되어, 원주민을 규합하고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포르모사섬 최북단에 설립한 에스파냐령 포르모사는, 대외적으로 주장하는 영역은 작지 않았으나 실체는 4개의 중대만이 수호하는 작은 요새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곳의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네덜란드령 포르모사의 영향권을 발각되지 않고 관통하여 산 살바도르에 도착해야 하며, 이후로는 에스파냐령 포르모사를 강대한 네덜란드령 포르모사에 대항하여 수비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과업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는 어찌어찌하여 불귀의 객이 되지 않고 산 살바도르에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에스파냐령 포르모사를 수비하고 진흥시켜, 일대 해역에서 제국의 이익 실현을 저해하는 네덜란드와 중국 그리고 일본의 해적들을 그들의 더럽고 지저분한 소굴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래야 필리핀 총독령에서 남쪽의 이단들을 척결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까.

더욱 다행스러운 점은, 프란시스코가 마닐라를 떠나기 전 세바스티안이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었다는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먼저 공략하라고 했지.”

조선.

프란시스코에게는 입에 담는 것조차 어색한 명칭이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중국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조선을 일개 속령屬領처럼 취급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별개인 국가들이 대외적으로 서로의 주권을 주장하는 건 제법 매우 흔한 일이다. 대수롭지도 않은 허장성세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유럽에서 수요도 높은 물산을 다종다양하게 창출하나 조선은 세계에 어떠한 이목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제국에 있어 조선이란 속령은커녕 길가의 돌멩이만 못한 것이다.

본디 그러한 조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에는 그럴싸한 소식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중국조차 어쩌지 못하여 거대한 영토를 빼앗아간 야만인들을 조선이 다스렸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끝내 몰락하게 된 중국을 중재하여 그들을 강 이남으로 보냈다던가.

반란한 옛 중국의 땅 일부를 직접 공격해 일부를 점유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범선을 모방하여 제법 배다운 배도 부리고 있다고 했지.’

프란시스코에게는 그것들이 차마 대단한 명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조선은 대양의 구석진 곳에 처박힌 소국이자 진리인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인들의 서식지였으며 그간 어떠한 존재감도 없었으니까.

이런저런 소식에도 프란시스코에게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나, 명성은 못 되어도 인지도가 올라갔다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조선에 대한 소식이 마닐라에 거듭 전해졌고, 무려 필리핀의 신임 총독마저 의식하고서 조선에 관한 특명을 내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군…….’

그러나 프란시스코에게 있어 중요한 점은 조선을 잘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었다.

그에게 분명한 사실은 세바스티안이 제국의 위상과 안녕을 위해 원대한 야망을 그리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의 지침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프란시스코는 에스파냐령 포르모사에 머무르는 선장들을 소집했다. 시킬 일이 있었다.

* * *

에스파냐인 선장들이 받은 임무는 단순했다.

네덜란드의 국기를 걸고, 조선의 해역에서 해적질 좀 해주는 것이니까.

조선이 유럽의 배를 모방해서 만든 범선을 이용한다는 건 에스파냐 선장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에스파냐령 포르모사를 거점으로 오가는 건 비단 에스파냐인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 역시 해양 무역과 해적질에 종사하며, 바다 한가운데 있는 포르모사를 요긴하게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소문이 흘러나와 퍼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단지 에스파냐인들로선 배경에 불과했던 조선이 최근 자주 언급된다는 게 약간 의아했을 뿐.

그렇다고 직접 그들의 해역을 개척할 정도로 흥미가 크게 동한 건 아니었던지라, 가만히 앉아서 전해 들은 귀로써 소식만 대강 아는 정도였다.

이러한 참에 총독에게서 하달된 명령은 선장들에게 썩 그럴싸한 것이었다.

최근 자주 언급되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는 않던 차였다.

그러나 막상 나선다면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 없지는 않았는데, 조선에서 모방했다는 범선이 제법 쓸한다면 나포하여 두둑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조선의 진상이 알려진 그대로라면 수익성 높은 새로운 무역로, 또는 ‘비법적’ 활동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다.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이 시의적절하게 등을 떠밀어준 셈이다.

마침 준비를 거의 갖춰둔 두 명의 선장은 뒤질세라 서둘러 산 살바도르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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