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8화
에스파냐령 포르모사, 그 수도인 산 살바도르.
이곳의 요새에는 모험과 기회 그리고 일확천금을 찾아온 에스파냐인과 포르모사 원주민, 그리고 약간의 중국인과 일본인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그만큼 거리에는 다종다양한 군상들로 즐비했으며 술집과 점포들은 활기가 넘쳤다.
마냥 이상적인 세상은 아니었다.
위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위험 그 자체를 닮아가는 법이었으며, 포르모사 또한 사방이 바다이고 위도상으로도 제법 남단이라 기후가 덥고 습했다.
여기에 밀림마저 울창했으니, 산 살바도르는 사시사철 해충이 들끓었으며 오가는 행인들은 그런 해충과 동족들로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쾌활하게 먹고 마시고 떠드는 와중에도 어딘가에서는 강도와 살인, 납치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문명의 밑바닥과 같은 곳.
법령은 허례허식에 가까웠고, 이를 대신하여 통용되는 건 부와 폭력이었다.
이곳에서 얼마 전 두 선장이 총독의 제안을 받아 미지의 영역으로 떠나갔다.
이름이야 익히 알려졌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어 오직 소문만이 무성할 뿐 실체에 대한 경험담은 전무한 세상이었다.
산 살바도르의 선장과 선원들은 과연 그들이 어떠한 성과를 가져올지 궁금해했다.
선뜻 뒤따르는 이는 없었다.
미지의 영역이란, 그만큼 기회도 많지만 그 이상의 위험을 의미하기도 했으니까.
먼저 떠나간 두 사람은 일종의 모험가이자 첨병이기도 한 셈이었다.
과장된 소문이 일부나마 옳아서 그들이 많은 재보를 약탈해올 수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공연히 힘만 낭비하고 돌아오거나 아예 그곳에서 시체가 되어 잊힐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선발대의 결과가 전해진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게 맞았다.
그로부터 2개월이 흘렀다.
길다고는 못할지라도, 역시 짧다고도 하기 어려운 세월이었다.
그동안 조선은 평소처럼 과장되고 허황한 소문만이 무성할 뿐, 그들을 찾아 떠나간 선발대에 대한 소식은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것들 뒤진 거 아니야?”
왁자한 술집에서 한 선원이 주변을 향해 심각하게 말했다.
“어엉?”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기 주변에서 뒈져나가는 게 어디 한둘이야? 누가 죽었다는 건데.”
“그러니까, 조선에 간 놈들 말이야.”
“아.”
“안 돌아온 지 몇 달은 되지 않았냐?”
“아마도. …그렇네. 그것들 다 뒤졌나 본데.”
여전히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선원의 말처럼, 이 주변에서 누군가가 죽는 건 일상이었다.
사람이라면야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덥고 습한 밀림의 섬에서 자연사自然死란 보석보다도 희귀하다.
십중팔구는 칼에 맞아서, 총에 맞아서, 두들겨 맞아서, 병에 걸려서, 중독되어서, 바다에 던져져서, 그렇게 자연自然스럽지 않게 죽는다.
그리고 그런 죽음이 너무나도 흔했으므로, 아직 제 차례가 아닌 이들에게는 부자연스러운 떼죽음조차 일상에 불과했다.
해적들이 해적질하다 죽었다면 오히려 호상인 것이다.
그보다 훨씬 기상천외하고 한심하게 죽는 해적들도 차고 넘쳤으니까.
“그 배에 안 탄 게 천운이네. 수당 좀 더 준다길래 혹했는데.”
애도는 과감히 생략된 채, 한 선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타지 그랬냐?”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야?”
“아니, 네가 있었으면 그놈들 다 안 죽을 수 있었을 거라고. 아, 배에 인재가 없어서 다 죽었네.”
“?까.”
선원들이 하찮은 투닥거림에 빠져들자, 조선행한 선단을 처음 거론한 선원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 그 선단에 동행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떼고 보자면 이곳은 죽음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곳.
일일이 애도할 시간도, 여력도 없으며 무법지대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데만도 벅찼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자신 역시 그 선단에 동행하지 않은 데 안도하고, 잊어버려야 했다.
그때였다.
벌컥!
술집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짠내와 쉰내가 뒤섞인 무리가 들어섰다.
그것만으로 술집의 손님들은 새로운 배가 막 입항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몇몇은 새로운 손님들과 면식이 있었는데, 선원들은 제각기 아는 사람을 찾아 흩어졌으며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탁자에 동전들 떨어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났고 왁자한 소란이 일어났다.
한 새로운 손님은 지인의 죽음을 잊으려던 선원의 자리로 왔다.
주변에 면식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누군가가 새로운 동석자를 반겨주었다.
“이야, 안 죽고 살아서 왔네?”
“꼽냐?”
“살아 있는 거 봐서 반갑다고! 하, 이놈은 심보가 뒤틀려서 문제야.”
“너는 씨바, 면상이 뒤틀려서 문제라는 건 알고 있냐?”
“그건 내 문제가 아니지. 내 뒤틀린 면상을 봐야 하는 네가 문제지. 병신아.”
“그러네, 이 병신같은 면상아.”
자리의 선원들이 서로를 때리며 웃어젖혔고, 막 찾아온 점원에게 주문을 마치자 다른 선원이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조선.”
“어, 조선?”
안 그래도 새로운 손님이 오기 전 언급되었던 지명이었다. 두 달 전의 출항에도 여전히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는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안 그래도 조선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거기를 다녀왔다니 잘됐군!”
미지의 세계가 드러난다는 기대감에 한 선원이 환호했다.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조선을 향하긴 했는데 직접 본 건 없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선장이 가다 말고 배를 돌렸어. 앞서간 두 놈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선단이 보이니까 싸했던 거지.”
“선단? 조선의?”
“그래!”
“놈들이 뭐, 쪽배를 이백 척씩 끌고 다니던가?”
추궁이라도 되는 양 연이은 질문에, 선원은 막 나온 술을 단숨에 비워버리고는 답했다.
“아니! 거기서는 유럽과 별반 다를 거 없는 배를 끌고 다니더군. 한두 척도 아니야.”
“허.”
“그러니 그 꼴을 본 선장이 앞서나간 두 배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한 거지!”
선장들은 조선의 선박을 상대로 해적질할 것을 주문받았다.
그러니 앞서나간 두 배가 돌아오지 않은 건, 총독의 명령을 따랐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며 현재 조선이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 하나의 선박만을 이끌고 조선의 선단에 접근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적의를 가지지 않고 다가가더라도, 약간의 오해가 전멸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조선은 못 봤다?”
“배만 보고 왔지.”
“정말로 우리들 배랑 똑같이 생겼나?”
“거의. 약간은 다른데, 멀리서 보면 헷갈릴 정도로는 비슷해. 덩치도 비슷하고.”
“소문대로 잘 나가는 나라였나 보군.”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슬쩍 보고만 온 조선행인지라 경험담은 감질나기 짝이 없었고, 자리의 분위기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선원들이 각자 시답잖은 화제를 혀끝에서 굴리기만 하는 동안이었다.
“내가 어디서 들은 말인데, 조선인들은 얼굴이 희고 키도 크다지?”
“들어본 적 있기도 한 것 같고.”
“그런데 우리랑 비슷한 범선까지?”
의미심장하게 물어오니, 동석한 선원들의 눈살이 금세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가 나올지 뻔했던 탓이다.
이어진 말은 과연 중인들의 예상대로였다.
“설마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 아니야?”
“에이이…….”
여러 사람이 야유를 날렸다.
프레스터 존의 나라란, 유럽에서 돌았던 유구한 떡밥이었다.
그 내용이란, 독실한 기독교도인 프레스터 존이 아프리카에서 인도를 거쳐 아시아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으며 현재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로 이 소문이 떠돈 건 12세기 후반 중동의 압바스 왕조가 새로운 부흥기를 맞으며 예루살렘 왕국을 거듭 압박하던 시기였다.
기독교의 성지가 다시금 이단들에게 넘어가려는 위기에서 교인들은 애타게 구원을 바랐다.
이때 때마침 동쪽에서 어느 국가가 이슬람 세력을 연전연패시키고 있다는 소문은, 한 고서에 근거 없이 기재된 프레스터 존 전설에 희망 섞인 신빙성을 더해주기 충분했다.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마치 기도를 통하여 열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듯,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신봉하여 그들 자신과 성지 예루살렘이 구원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프레스터 존의 군대로 여겨졌던 ‘동방의 무패 군단’은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었다.
과연 그들은 이슬람을 신봉하던 호라즘 제국과 룸 술탄국을 박살 내고 기독교 열국의 숙적이었던 압바스 왕조마저 멸망시켰지만, 기독교인들이 절실하게 기원했던 프레스터 존의 군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몽골군은 이슬람 세계를 무너뜨린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동방정교를 신봉하던 러시아와 동유럽마저 짓밟아버렸으니까.
그렇게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전설이자 허황한 소문으로 남아버렸다.
그러나 워낙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탓인지,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탄생한 지 500년은 더 지난 오늘날에도 상식처럼 세인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간간이 조명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쉰 떡밥, 아니 쉬다 못해 썩어버린 떡밥으로서 말이다.
“뭔 놈에 프레스터 존이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면 내 부랄은 세 개다!”
“그럼 난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고 믿는다. 저 새끼 부랄 세 개 되라고.”
“미친놈!”
“아니, 부랄 세 개면 좋은 거 아니냐?”
“쓸 데도 없는 부랄 세 개든, 네 개든…….”
“낄낄!”
시답잖은 말장난과 농담으로 자리가 들뜨던 차에, 술집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대부분은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워낙 존재감이 없던 탓이다.
오직, 바로 맞은편에서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본 선원만이 눈길로 조용히 쫓다가 주변에 일렀을 뿐이었다.
“여기에 미개인도 술 처먹으러 왔네.”
“뭐야. 지금 나 놀리냐?”
“너 말고 병신아!”
선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턱짓했다.
“저기 저 놈! 지금 나가는 놈을 보라구.”
“아아.”
한 동양인의 뒤태가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러네. 있는 줄도 몰랐다.”
“일본인인가?”
“일본인은 아니지! 그놈들은 키부터 네 ?만하고 면상은 애새끼일 때부터 애미한테 파운딩 맞은 것처럼 작살났단 말이야. 그런데 그놈이 그렇게 작아 보이디?”
“씨바, 그럼 중국인이겠지.”
“그런데 중국인들은 갈매기처럼 존나게 시끄럽게 짖어대잖아.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싶으면 뻔뻔하게 끼어들고!”
그런데 막 나간 동양인 손님은, 자리에 앉은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한 중국인인 갑지!”
“아니, 씨바, 그럼 키 큰 일본인일 수도 있잖아!”
“일본인은 크기랑 생긴 것부터가 네 ?같다니까!”
“야! ?까!”
한 선원이 그 고함과 함께 달려들었고, 두 사람이 한 데 엉켜서 탁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광경에 여러 사람이 비웃었다가, 곧 시끄럽게 싸움이 일어나자 일순 긴장했다가 다시 웃어 재꼈다.
쌈박질이 벌어지는 와중 날아간 잔에 맞은 누군가 끼어들었고, 안주를 먹다가 밀쳐져서 떨어뜨린 누군가가 또 끼어들었으며, 우당탕 날아가 원탁의 잔과 그릇이 엎어지자 또 한 무리가 끼어들었다.
집기와 함께 사람 뼈가 깨지고 부서지는 와중, 사태의 비자발적 원흉이었던 동양인 손님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거리에 섞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