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19화 (319/380)

인조, 명군이 되다 319화

포르모사, 산 살바도르.

에스파냐령 포르모사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최근 포르모사 총독으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는 난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선장들에게 내린 명령을 단순했다.

네덜란드의 국기를 걸고 조선의 해역을 찾아가, 약간의 분탕질을 치고 용돈이나 벌라는 것이었다.

이에 두 명의 선장이 즉각 부응하여 산 살바도르를 떠났으나 무려 두 달이 넘도록 귀환하지 않았고 소식도 없었다.

2개월이라면 분명 긴 세월은 아니다. 하물며 해상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마냥 짧다고도 하지 못할 시간이었으며 하물며 조선은 포르모사에서 극도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흔히 알려진 열도의 바로 위가, 조선 아닌가?

작정한다면 보름도 안 되어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선이었다.

그런 곳에 뿌리를 박고 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해상에서 분탕 좀 치고 돌아오라는 단순한 명령을 두 달 가까이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막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두 선장은 이 단순하고 간단한 명령을 끝내 완수하지 못했으며, 되려 조선의 선박들에 당해 멍청한 바다귀신이 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한심하기까지 해!”

프란시스코는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는 신대륙의 광대한 대토지에 더불어서 신비로운 동방의 끝자락까지, 삼대양三大洋 사대주四大洲에 걸쳐 기치를 세운 명실상부 지상최대, 최고의 제국이었다.

이런 위대한 나라의 국민이 되어서, 그동안 존재감 하나 없이 처박혀 있던 미개 소국의 선박에 당했다는 말인가?

그나마 낯이 덜 부끄러운 점은, 그들이 실패할 때 네덜란드의 국기를 달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행보는 실패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는 열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선장들이 에스파냐인답지 못한 추태를 보여주긴 하였으나, 프란시스코에게 비책을 내려준 마닐라의 세바스티안 총독은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계획을 세워두었다.

어찌하여 선장들이 꼭 네덜란드의 국기를 달고서 분탕질을 쳐야만 했는가?

그것은 에스파냐가 불미스러운 오명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조선과 네덜란드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함이었다.

선장들이 실패했다면 큰 그림의 완성은 도리어 빨라진다.

조선의 선박들은 네덜란드의 국기를 단 해적선과 싸워 승리하였고, 많은 목격자를 남겼으니 곧 조선 전체가 네덜란드에 적개심을 품을 게 아닌가?

‘어쩌면 세바스티안 총독은 이렇게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

만약 조선이 선박 몇 척을 동원한 분탕질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나라였다면, 굳이 네덜란드와 이간질할 가치조차 없다는 증거였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이 제법 미개인답지 않은 저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네덜란드와 이간질할 가치가 있으며 에스파냐랴는 신실한 대제국이 관대하게 우호를 제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세바스티안 총독의 지시는 일종의 시험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선장들의 실패를 달래면서, 프란시스코는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선장들이 하찮은 제 한 몸 불살라 네덜란드의 악명을 퍼뜨렸다면 남은 건 수확이지.”

제대로 에스파냐의 국기를 걸고서 조선을 방문해, 그들이 몸소 깨우쳤을 네덜란드의 해악에 공감해주고 에스파냐 제국의 대의에 일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사략선 몇 척은 알아서 감당하는 수준이니 미개국일지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제국에 미미하게라도 도움 될 것이요, 제국은 그 대가로써 진리인 복음을 전파해 줄 테니 과분한 보상으로 돌려주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서로 좋은 거래 아니겠는가?

일각에서는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는 아닐까, 하는 허황하고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대에스파냐 제국의 후의를 구걸하는 한 조선을 프레스터 존의 나라로 만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는 셈이다.

“흐음……. 좋아.”

결과적으로는 제국으로서도 이롭고, 종교적으로도 올바른 셈이다.

나아가 프란시스코 개인에게는 현생에서 위업을 세우고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 길이기도 했다.

프란시스코는 창문 너머 펼쳐진 항만을 돌아보았다. 맑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안쪽으로 범선 몇 척이 틈틈이 놓인 고깃배들과 함께 출렁이고 있었다.

얼핏 평화롭기 짝이 없는 광경.

그것을 마주하며 프란시스코는 중얼거렸다.

“선장들에게 다시 양해를 구하는 건……. 어렵겠군.”

최초로 출항한 두 선장과 선박이 소리소문없이 불귀의 객으로 전락하고, 뒤늦게 출항한 세 번째 선장 역시 소득 없이 귀환하면서 선원들에게 조선행은 위험하면서 이익마저 되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나버렸다.

총독이라 할지라도 지시에 따르는 건 각 선장의 의향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에스파냐의 군인도, 포르모사 총독부의 하급자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여느 선장들과 마찬가지로 기회와 이익을 좇아 본토에서 찾아온 상인이자 해적에 불과했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을 뿐이고, 그런 공허한 지시를 내리는 건 총독의 위상에도 이롭지 않았다.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하지만, 여기서 직접 나서야 하나.’

약소한 개척지라 할지라도 대제국 에스파냐의 총독부다. 복음조차 전파되지 않은 미개국을 상대로 직접 나서는 건 제국의 위신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고 임무는 위중하며 마닐라의 세바스티안 총독께서 거는 기대가 크니 꼭 내가 나서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프란시스코는 그렇게 자신을 재차 달랬다.

* * *

결심을 세운 프란시스코는 결일缺日이 되자 거울 앞에 섰다.

마닐라의 세바스티안 총독에게는 이미 보고를 겸해 양해를 구했다.

미개국에 에스파냐 제국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진짜 ‘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조선을 네덜란드와 이간질한 뒤 우호적으로 방문하는 건 세바스티안 총독의 복안이었다.

본디 계획이 그러했으므로 세바스티안 총독은 기꺼이 ‘산 펠리페’ 호를 빌려주었다.

산 펠리페는 톤수만 700에 달하는 대양 항해용 갈레온이었다.

태평양을 통해 식민지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자원을 중미의 아카풀코나 파나마까지 운송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되는 거함이 필요했다.

그만큼 위용은 확실했으므로 비록 미개국의 미진한 항구에는 정박하지 못하겠지만 산 펠리페가 해상에 떠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미개인들은 바지에 지려버릴 게 분명했다.

“하, 게다가 필리핀 총독의 기함에 제독으로서 타게 된다니.”

아직 갑판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프란시스코는 자신이 필리핀 총독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접촉에서 좋은 성과를 낸다면, 이 기분은 단지 환상으로만은 끝나지 않을 터였다.

“고작 포르모사 총독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프란시스코는 거울 속 자신의 정복에 훈장이 몇 개 더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우쭐댔다. 그것이 머지않은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니, 이런 오만함도 딱히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미개인들 앞에서 설 예정이 아닌가. 제국의 총독으로서 위용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흐으음…….”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콧수염을 몇 번 날카롭게 말아 올린 뒤, 이미 미개인들 앞에 선 양 뻔뻔하면서도 오만한 자세로 집무실을 나섰다.

실제로 미개인들 앞에 서게 되는 건 며칠이 지난 뒤일 것이다. 개척되지 않은 항로라 세심하게 항해하다 보면 가까운 거리라도 제법 시일이 걸릴 테니까. 하지만 이 자세와 태도를 미리 몸에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관저를 나선 프란시스코는 콧대를 세운 채로 마중 나온 마차에 올랐다.

쿵, 마차의 문을 닫은 프란시스코가 말했다.

“페드로?”

뻥 뚫린 창 너머로 마부가 고개를 돌렸다.

“예, 각하?”

“출발하지?”

페드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꽈과광!

꽈과과광!

폭음과 함께 망망대해에서 자욱한 포연이 퍼지고, 그 사이로 포탄이 튀어나와 거함에 작렬했다.

퍼버버벅!

질 좋은 필리핀산 나무 수천 그루를 가공하여 만든 선체가 파편을 쏟아냈다.

그저 쇠공에 불과한 포탄이다. 거함인 산 펠리페를 위협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산 펠리페 역시 자신의 적을 향해 포탄을 쏟아냈다.

꽈과과과광!

폭음과 함께 14문 거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일제 포격에 격중한 적선은 판자를 튀겨대며 단숨에 구멍이 뻥 드러났다.

그 안에서 선원들은 파편에 휩쓸려 피곤죽이 된 채 늘어져 있었으며, 어느 대포는 밧줄 수 개의 미약한 저항을 이겨내고 스르륵 바다로 추락했다.

옆구리가 훤히 뜯겨나간 우악스러운 광경에 네덜란드의 선박들은 곧바로 타륜을 돌려 전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산 펠리페의 700톤 체급과 28문 거포의 화력을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일한 우위인 기동성을 발휘해 이탈하려는 것이었다.

“놈들이 도망칩니다! 어떻게 할까요, 선장님!”

“이 배로는 쫓아가지 못한다. 계속 포격해! 선미와 닿는 수면선을 조준해라!”

그 절묘한 약점에 적중한다면 방향타를 파괴하면서 침수까지 일으킬 수 있었다.

산 펠리페의 포수들은 선장과 사관의 명령에 따라 도망가는 패배자들의 선미에 포격을 가했다.

꽈과과광!

폭음과 함께 박력 있게 날아간 포탄들은, 대개 허망이 바다에 잠겼다.

표적들이 면적을 좁힌 채로 달아나다 보니 거듭된 포격에도 그 절묘한 약점만은 명중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선미루에 구멍 몇 개만은 만들어줌으로써, 치욕만은 확실히 안겨주었다.

선미의 피격 흔적은 패주의 증거였으며 또한 선미에는 선장실이 위치했으니까. 그들 지휘관들은 함대가 정박할 때까지 두 눈으로 패주의 증거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정박한 뒤에는 항만의 모든 사람에게 패주한 증거를 보여줘야 할 터였다.

“저놈은 쫓아가면 잡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사관이 저 멀리 반쯤 기울어진 배를 가리켰다.

산 펠리페의 일제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옆구리가 훤히 뚫려버린 배였다. 그 탓에 무게균형이 무너진 것이었다.

“배가 저 상태가 되었다면 어차피 우리가 쫓지 않아도 알아서 침몰한다. 만에 하나 항구까지 귀환하더라도 폐선행이지.”

그런 폐선을 억지로 침몰시키거나 나포하는 건 공연히 기력만 낭비할 뿐이었다.

그리고, 격전을 치른 에스파냐 함대 또한 마냥 추격전을 벌일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진 못했다.

산 펠리페의 선장이 절도 있게 몸을 돌리고서 보고했다.

“각하, 교전은 제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산 후안은 침몰하고 로자리오는 심각한 침수가 발생했습니다.”

과연 산 후안은 선원들만 토해낸 채 수면 아래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로자리오는 누가 해저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양 흘수선이 올라가 있었다.

로자리오가 더 잠기지 않는 건 선원들이 물에 잠긴 채 쏟아지는 바닷물을 맞아가며 응급복구에 성공한 덕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응급인 만큼 상태는 위태로웠다.

프란시스코는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회항해야 하나?”

“저야 일개 선장으로서 제독을 일임받은 각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만,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항행을 지속할 경우 로자리오는 확실하게 침몰합니다.”

“…그럼 로자리오만 돌려보내는 건?”

“로자리오는 이미 물에 깊게 잠겨 제 속도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혹 침몰한다면 선원은 모두 죽을 것입니다.”

선장의 냉정한 대답에 프란시스코는 날카롭게 세워두었던 콧수염이 추욱 늘어졌다.

“……지금 남은 호위함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습니다.”

“…….”

그래서 어쩌겠냐는 식의 단호한 선장의 대답에 프란시스코는 난처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조선행 선단은 기함 산 펠리페에 더불어 세 척의 호위함으로 구성됐다.

이 중 한 척이 교전으로 침몰해버렸고, 다른 한 척은 빈사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도 프란시스코는 회항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건 산 펠리페를 포함한 선단 전체가 포르모사 총독부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장 프란시스코가 제독으로서 이끄는 선단은 본래 필리핀 총독부의 소속으로, 주인을 따지자면 프란시스코의 상관인 마닐라의 세바스티안 총독의 소유였다.

승전 자체는 좋았다.

한 척의 배를 잃긴 했지만, 그건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선장의 말마따나 옆구리가 다 드러난 그 배는 그냥 폐선행이다.

그리고 선미가 피격된 다른 배들은 수리까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터.

애초에 승전 자체가 교환 이상의 무게가 있었으므로, 이건 프란시스코 본인이나 세바스티안 총독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항행의 목적이 본디 조선행이었다는 점이다. 일단 항행을 마친 다음에는 선단을 다시 마닐라로 귀환시켜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회항한다?

프란시스코는 상관에게 선단을 빌렸으나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실패에도 과연 세바스티안 총독이 두 번째 기회를 줄까?

프란시스코는 의심하고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고민이라도 하게 만드는 건 승전이라는 우발적이고도 부수적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하.”

총독의 대답이 늦어지자 선장이 단호하게 채근했다.

프란시스코는 일단 기다려달라는 듯 선장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난간으로 나아가 산 펠리페의 교전한 흔적을 확인했다.

포탄에 관통한 흔적과 함께 나뭇결에 따라 도장과 파편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역력했다.

이에 선장이 뒤에서 말했다.

“산 펠리페는 건재합니다. 이 정도 상처로 항행에 지장은 없습니다.”

대양 항해용 마닐라 갈레온으로 건조된 산 펠리페였다. 막대한 재화를 한 번에 실어나를 체급을 갖추었음은 물론이고, 내구성 또한 에스파냐 제국 선박기술의 총아에 걸맞았다.

단지 호위함들까지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을 뿐. 이 순간에도 로자리오의 선원들은 응급복구한 흔적의 틈을 타고 새어드는 바닷물을 퍼내는 중이었다.

“으으음……!”

프란시스코는 쓰게 신음하고는 투덜거렸다.

“이단이나 믿는 저지대의 해적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빌어먹을!”

그리고 프란시스코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선장에게 명했다.

애초에 프란시스코에게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불가능했으므로 그가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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