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0화
프란시스코의 지시는 하나 남은 호위함을 딸려 보내어, 빈사 상태의 로자리오를 호위 (겸 만에 하나 인양)하라는 것이었다.
산 펠리페가 홀로 남는 건 프란시스코도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거함이고 거포로 무장했을지언정 화력을 분산해줄, 전술적 행동을 실현할 우군 없이는 그저 외따로 노는 표적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프란시스코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회항할 수도 없지만 로자리오를 유령선으로 만들 수도 없다면, 하나 남은 멀쩡한 호위함을 떨쳐내고 산 펠리페 혼자서 미지의 해역을 탐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네덜란드에서 먼저 조선과 접촉한 낌새는 없다는 게 다행이다.’
선원들에게 국적이란 단지 당장 걸치고 있는 옷의 색깔에 불과했다.
어차피 여차하면 국기를 내리고 해적질이나 하는 것들이 모인 극동이다. 네덜란드에서 먼저 조선과 접촉했고, 그들과 해역을 공유한다면 제국이 이를 인지하지 못할 리 없다.
적어도 조선의 해역에서 또다시 네덜란드의 선단에 급습당할 위험은 매우 낮은 셈이다.
‘애초에, 이 망망대해에서 하필 네덜란드 선단과 마주한 것부터가 더러운 불운이었다. ……오가는 선원들을 통해서 행보가 알려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에스파냐가 오가는 선원들을 통해 네덜란드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미 에스파냐는 조선으로 선단을 보낸 적이 있고, 이번에는 필리핀 총독부 소속인 산 펠리페와 호위함들이 조선과 가까운 산 살바도르로 이동했다.
이 선단으로 에스파냐 제국이 조선을 찔러보려는 건 아닐까, 하고 네덜란드가 예측했을 가능성이 낮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급습을 설명할 가장 명료한 추측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꼬리가 밟혔다는 뜻이니 프란시스코로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난관을 극복한 지금이라면, 오히려 좋았다.
네덜란드가 굳이 급습에 실패할 것을 각오하고서 두 번째 선단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거롭고 한심하게 전력을 분산하고 패배를 각오할 바에야, 힘을 하나로 합쳐서 들이치는 게 승산을 가장 높이는 방법 아니겠는가?
그러니 네덜란드가 뒤를 밟아서 급습했다면, 그러한 시도를 물리친 지금은 외려 네덜란드의 습격에서 안전해진 셈이다.
‘좋아.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좋아.’
프란시스코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면서 콧수염을 다시 말아 올렸다.
때아닌 공격을 당해 잠시 정신이 없는 동안 그의 차림새는 많이 망가져 있었다.
* * *
며칠 뒤.
프란시스코는 과연 소문대로의 선단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선박처럼 보여 흠칫하기도 했지만, 돛을 포함해 세심히 뜯어보면 느낌이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분명해졌다.
“미개인들 주제에 제법 용은 썼군……. 하지만 이런 배는 본 적이 없을 거다.”
과연 미개인들은 산 펠리페의 위용에 압도되었는지, 항행하던 조선의 선단은 돛을 접고서 우두커니 섰다.
프란시스코는 난간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옷매무시를 거듭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선장에게 말했다.
“유의하시오. 교전한 쪽을 보여서는 안 되오.”
“유의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프란시스코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
시선을 받은 이는 이제쯤 이십 대 초반이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었다.
그는 선상의 대부분과는 달리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는데, 말단 수병이 아니라 사관인 덕이었다.
지목당한 청년은 즉각 한 발자국 나서서 당차게 답했다.
“찾으셨습니까, 각하!”
“우리가 포를 쏘기 전에 미개인들이 알아서 멈춰선 걸 보니, 그런대로 우호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내가 곧바로 나설 순 없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각하! 놈들에게로 보내주신다면 감사히 미개인들의 정체를 정탐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한창때다운 청년 사관의 호기로운 모습에, 프란시스코는 사관을 가리키고서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마닐라의 세바스티안 총독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제스쳐였다.
직접 당해본 사람으로서 그 기분을 청년 사관도 느꼈는지, 사관은 얼굴에 뿌듯함을 드러낸 채 콧대를 높였다.
프란시스코가 엄하게 일렀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 저 미개인들에게로 가서 정탐하고 와라!”
“예, 각하! 영광입니다!”
청년 사관은 갑판을 박차며 당차게 답하고는, 곧바로 한 재수 없는 선원을 지목하고서 통역과 함께 구명정에 올랐다.
청년 사관과 노잡이 선원, 중국인 통역은 구명정을 타고 조선인들의 선단을 향해 나아갔다.
쪽배가 파도를 타고 출렁이며 나아가는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청년 사관과 노잡이 선원은 해군에 오래 몸을 담았던 사람들이고, 당연히 수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프란시스코로서는 그 정도면 족했다.
구명정은 한참을 나아가 시야에서 작은 덩어리가 되었다. 사람이야 당연히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프란시스코는 망원경을 펼쳐 그들을 쫓았다.
구명정은 이내 조선의 배에 닿았고, 노잡이 선원이 구명정을 지키는 동안 청년 사관과 통역이 선측의 그물을 타고 올라갔다.
조선인들은 제법 미개인들답지 않은 온화함으로 손님들을 맞이해주었는데, 그 점만은 프란시스코가 인정해주기로 했다.
청년 사관은 장광설에 생동감 넘치는 몸짓을 더해 미개인들에게 무어라 떠들어댔다. 에스파냐 제국의 당도와 함께, 미개인들에게는 과분한 우호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동안 조선인들은 청년 사관과 함께 통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년 사관의 소개가 끝난 뒤 조선인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무어라 떠들었고, 두 사람은 그런대로 잘 대응하는 듯 보였다.
“음.”
프란시스코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에서 망원경을 뗐다. 어차피 더 지켜볼 것도 없었다.
“용감한 청년이 미개인들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지는 않겠군.”
프란시스코의 감상에 선장이 슬쩍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좋은 의미로 한 말이요, 선장.”
“알고 있습니다.”
“…….”
선장의 당당한 대답은 프란시스코를 멋쩍게 만들었지만, 프란시스코는 애써 그 기분을 밀어내고서 이어질 전개를 기다렸다.
건너편에서는 대화가 제법 잘 오갔는지 돌아오는 쪽배에는 선원이 둘 늘어난 채였다.
전형적인 동양인의 인상들.
그러나 일본인보다는 키가 컸으며 중국인보다는 말끔했다. 미개인들 치고 어떻게 범선을 흉내 낸 것처럼 문명 또한 흉내를 내본 것일까?
그렇다면 제국의 후의가 마냥 과분한 족속들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 수준에서 단 하나, 참된 복음만 더 받아들인다면 동방의 미개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족속이 될 테니까.
우호의 결과에 따라서는, 해악만 가득한 저지대 네덜란드 해적 놈들보다도 반 단계 더 높게 쳐줄 수도 있으리라.
마침내 구명정이 모함에 당도했고 끌어올려졌다.
두 조선인은 산 펠리페의 위용에 감동한 듯 보였다. 동양인 특유의 실눈이 그나마 눈으로서 인식될 정도로 크게 뜨고서 주변을 돌아보았으니까.
“아직은 교화가 많이 부족한 모습이군. 다른 미개인들보다는 낫지만, 미개인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어.”
프란시스코는 조선인들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곤 청년 사관을 돌아보았다.
“잘도 이런 놈들을 상대로 소통했네, 젊은이. 그대의 충성심과 인내심은 여러 사람의 본보기가 되겠군.”
“제국에 바쳐진 한 몸이고, 각하께 신임을 입었습니다. 충성심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올바른 태도야.”
프란시스코는 슬쩍 자신의 옷매무시를 의식하고는, 여전히 눈알 굴려대기 바쁜 조선인들을 향해 성큼 나아갔다.
미개인들을 마주하는 건 마닐라 관저에서 일할 때부터 흔히 경험해 왔다.
조선인들은 그나마 미개인들 중에서 최악에 속하지는 않았으므로, 프란시스코는 계도보다는 소통한다는 느낌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흠, 흠. 조선인들?”
이에 두 조선인이 곧바로 시선을 모았고, 프란시스코는 자신을 소개했다.
“여기 젊은 친구가 이미 말해주었겠으나 이 몸은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 유일하신 주께 봉헌된 신실한 신자이며 지구상 가장 신성하고 강대한 나라 에스파냐 제국의 포르모사 총독이오.”
거창한 소개를 통역이 전해주자, 조선인들은 제법 놀란 얼굴을 지어주었다.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귀공이 어떠한 분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과묵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두 조선인이 향한 곳은 과묵하게 선 선장이었다.
그는 단지 눈만 돌려 프란시스코만 바라보았으므로, 프란시스코는 선장이 조선인들과 말을 섞을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
“여기 있는 과묵한 신사분은 이 배, 산 펠리페를 지휘하는 선장으로서 나를 위해 수고해주었소.”
“없어서는 안 될 분이군요.”
“그렇소. 배에는 항상 선장이 필요한 법이고, 나는 항해술에 자질은 없으니 말이오.”
두 조선인이 주억거렸다.
그들 또한 각기 자신을 소개했는데, 청년 사관이 방문한 배의 선장과 제독이라고 했다.
“아.”
프란시스코는 큰 감흥 없는 진심을 미뤄두고 짧게 경탄했다.
보통 동양의 미개인들은 저열한 문명과 기술에도 이상하리만치 기고만장하여 여러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격식에 맞춰서 방문했다는 건 조금 가상하긴 했다.
제독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가 말했다.
“그대들 나라에서는 서로 손을 마주 쥐는 것으로 인사한다지요. 내가 손님으로서 이 배에 올랐으니, 그대들의 예법을 따라 인사하고자 합니다.”
프란시스코는 슬쩍 청년 사관을 바라보았다. 네가 악수를 가르쳐 주었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청년 사관은 프란시스코의 시선을 해석해내지 못했는지, 그저 눈만 동그랗게 되어 쳐다볼 따름이었다.
마치 제가 실례라도 한 게 있냐는 듯.
프란시스코는 짧은 실망감과 함께 다시 조선인을 바라보았다.
“좋소.”
미개인들과 손이 닿는다는 게 썩 꺼림칙하긴 했으나 마침 장갑을 끼고 있었고, 저들 나라와의 우호를 통해 제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감수할만한 불쾌함이었다.
프란시스코가 손을 내밀었고, 조선인 제독은 두 소매를 맞잡은 채 공손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선인 제독은 소매를 풀면서 한 손에 피스톨을 드러냈다.
팡!
폭음과 함께 산 펠리페 선장의 미간에 검붉은 점이 찍혔고, 그의 몸뚱이가 채 흘러내리기도 전에 조선인 제독은 와락 손을 뻗어 프란시스코를 붙잡아 끌어안았다.
동시에 자신을 선장이라 소개한 조선인 역시 소매를 풀고서 양손에 피스톨을 드러냈다.
조선인 선장은 한 손으로 프란시스코의 관자놀이를 겨누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돌처럼 굳어버린 청년 사관과 선원들을 겨눴다.
“오랑캐들 주제에 뻔뻔하게 대조大朝를 기만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 이것도 정당하다 해야겠지?”
즉사한 산 펠리페 선장의 후두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선원들이 충격 속에서 주춤거리자 조선인 선장은 피스톨 끝으로 프란시스코의 관자놀이를 찍어눌렀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였다간 이놈 대가리가 날아간다?”
프란시스코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었으나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런 그의 어깨너머로 저 멀리 정박해 있던 조선 선단이 산 펠리페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