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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21화 (321/380)

인조, 명군이 되다 321화

조선에서 내막을 알게 된 건 세자 덕분이었다.

세자는 구라파歐羅巴를 공부하면서 오늘날 일대까지 진출한 서반아西班牙와 화란和蘭의 복잡한 역사 또한 알게 되었다.

그들 홍모이는, 문명 못지않게 복잡한 사회와 긴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치밀한 역사를 자아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의 내막과 진상은 세자조차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홍모이는 단순히 야만하기만 한 족속들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들 해악의 위험성은 야만하기로 손꼽히는 동북면의 야인여진을 아득히 능가하였으니, 홍모이들은 온 지구에 퍼져 각지에서 분탕을 치고 혼란을 양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악 가득한 무리들이 벌이는 짓에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건 태만보다도 무책임에 더 가까웠다.

세자 본인은 장차 대위를 이을 후계자였고, 책임져야 할 건 온 나라와 만백성이었다.

범지구적으로 발생하는 분탕의 일각을 마주하고도 무책임하게 대응한다는 건 곧 부왕과 열성列聖을 향한 패륜이자 만백성을 내버리는 불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의심만으로는 무엇도 증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법.

세자는 실방사를 시켜 포도아葡萄牙의 거점인 오문澳門과, 화란 및 서반아가 각기 남북을 갈라 차지한 복이모사福爾摩沙에 잠입하도록 했다.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랑이굴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의 실체를 더 파헤치고 선단 습격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소굴을 찾아가는 게 가장 확실하고 빨랐다.

오문과 복이모사는 홍모이들의 거점이었으나 막상 실방사가 각지에 스며드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이미 두 곳 다 중국인들이 즐비하여서, 실방사의 일원들이 그들의 일부인 척 쉽게 섞여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끝에 조선은 복이모사의 북쪽, 서반아의 거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확인했다.

서반아가 조선과 화란 사이를 이간하고자 배에 화란의 국기를 달고서 해적질할 것을 선주들에게 사주했던 것이다.

이는 추후 서반아의 국기를 달고 조선을 방문해 철면피鐵面皮로 거짓된 우호의 관계를 수립하여, 장차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의 적’이 아닌 ‘적의 적’을 치게끔 기만하기 위해서였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이것이 서반아가 부린 얕고 하찮은 술책의 전말이었다.

술책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곧이곧대로 당해줄 이유가 없었다.

이에 맞서 세자는 장계취계將計就計를 세웠다.

일차적으로는 화란에 서반아의 출행을 흘려 차도살인지계를 돌려주고, 화란이 실패한다면 조선에서 사정을 모르는 척 근접하여 방심한 틈을 노리기로 했다.

이런 세자의 장계취계는 날카롭게 먹혀들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였다간 이놈 대가리가 날아간다?”

자신을 조선인 선장으로 소개한 이가 선언했다.

그의 손에 들린 피스톨은 포르모사 총독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의 관자놀이와 닿은 채였다.

난데없는 인질극이 벌어진 와중 산 펠리페의 선장은 이마에 바람구멍이 난 채 널부러져 있었고, 청년 사관과 다른 선원들은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그들의 시야에는 점차 다가오는 조선의 선단이 비쳤다.

청년 사관은 포로로 잡힌 포르모사 총독과 조선의 선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응을 시도한다면 총독의 머리에도 바람구멍이 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대응하지 않는다면, 산 펠리페는 적의 손에 떨어지고 총독은 물론 자신과 다른 선원들까지 불신자 미개인들에게 구속당할 터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청년 사관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후자의 경우 모든 걸 잃게 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잃을 건 총독 두부頭部의 완결성뿐.

적은 오직 둘이요, 총독의 머리를 날리면 저들에겐 장전된 피스톨 하나만 남게 된다. 다가오는 적의 선단이 있으나 산 펠리페의 전투력을 발휘한다면 미개인의 흉내만 낸 선단이야 거미줄처럼 찢어지리라.

그리고 자신이 살아서 귀환한다면 영웅이 되리라.

무능한 총독이 불러일으킨 희대의 위기에서, 과감한 대응으로 산 펠리페와 수병들 그리고 에스파냐 제국의 명예를 지킨 자로서 말이다.

프란시스코의 생각은 다를 테지만…….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청년 사관이 입술을 모으고서 눈을 크게 떴다. 갑판의 모두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탕!

총성과 함께 청년 사관은 얼굴에 힘을 준 그대로 쓰러졌다.

“눈깔이 너무 대놓고 굴러가는데.”

조선인 선장이 평가와 함께 빈 피스톨을 거두자, 갑판 선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신들을 노리던 총구가 비워졌으니 죽은 청년 사관보다 훨씬 유리한 도박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프란시스코가 사색이 되어서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명령이다!”

다급한 외침을 연발하는 프란시스코는 금세 혈관이 돋은 채 얼굴마저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 소란에 조선인 선장은 장전된 피스톨의 끝으로 프란시스코의 머리를 찍었다. 프란시스코는 히익, 신음과 함께 식은땀을 흘렸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장전된 총은 자신을 향한 한 자루밖에 없는데, 약은 수병들을 다그치는 자신을 되려 핍박하다니?

프란시스코는 이 순간처럼 미개인들의 우매함이 답답했던 적이 없었다. 이래서 미개인들이 미개인들로 남은 것이리라!

그러한 프란시스코의 망상은 산 펠리페에 미리 잠입해 있던 또 다른 조선인의 등장으로 깨졌다.

“네놈들 화약에는 이미 물을 부어두었다. 헛짓거리는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걸?”

중국인 통역이었다.

총독의 납치와 함께 놀라 얼어붙은 그가 일순 안색을 바꾸고서 이르자 프란시스코와 함께 선원들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네놈도 한 패였나!”

총구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찍다 못해 이미 고개마저 꺾인 상태였지만, 프란시스코는 치를 떨면서 따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네놈들처럼 어설프게 모략을 꾸미지는 않거든.”

중국인 통역으로 가장했던 이가 능숙한 에스파냐어로 답했다.

그리고 펄럭이는 양 소매에서 피스톨을 꺼냈다.

“이 안에 몇 자루가 더 있을지 자기 목숨으로 시험해보고 싶은 놈 있나? 눈 깜짝할 새에 접수해주겠다.”

그 말에 죽기 전 청년 사관처럼 눈알을 살살 굴리던 갑판의 선원들이 일제히 시선을 깔았다.

* * *

며칠 뒤, 서궐.

동궁에서 공부를 이어나가던 세자는 근시近侍에게서 권자를 건네받았다. 붉은색 비단 포장이었다.

‘실방사에서 오는 수본手本은 항상 긴장하게 만드는군.’

실방사가 개입한 문제 중에서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서반아를 향한 보복으로써 복이모사에서 진행 중인 모략은 사안이 매우 위중했다. 자칫 일이 틀어졌다간 홍모이들과 대대적인 전쟁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자라는 위치에서 독단적으로 수립하고 진행할만한 모략이 아니었다.

세자는 모략에 착수하기 전 부왕에게 문의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그 점과 사안의 중대함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이 보복은 국사國事나 마찬가지였다.

세자로서는 보고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후아.”

세자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수본을 펼쳤다.

내용은, 세자가 준비한 두 계획의 결과였다.

갑甲호 계획은 서반아와 전쟁 중인 화란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해상에서 교전이 발생하면 적선에 탑승한 실방사 요원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충신들이었다.

갑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화란이 응하기는 했으나, 충분한 전력을 동원하지 않았고 서반아의 함대에 패퇴한 것이다.

그러나 을호 계획은 성공했다.

을호 계획은 갑호 계획에도 서반아의 함대를 저지하지 못했을 때, 복이모사에 침투시킨 모든 인적 자산을 동원해 함대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반아의 함대가 대응력을 상실한 동안, 미리 배치해둔 해상 전력을 투입해 서반아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이다.

이 을호 계획은 다행히 먹혀들었으며, 상정 이상의 결과를 내놓았다.

“서반아 함대의 기함…… 선船 비이패費利佩를 나포했구나!”

딱딱하게 굳었던 세자의 얼굴이 반색했다.

그는 금실로 용을 새겨놓은 흉배를 쓸어내리고서, 자신의 성취에 감격했다.

‘서반아 추장의 이름을 딴 선 비이패는 화란의 범선들보다 배는 크고 튼튼하다고 들었다. 이런 배를 싸움 한번 없이 얻었으니, 하늘이 조선과 나를 돕는구나.’

세자는 들뜬 마음에 곧장 경운궁을 떠올렸다. 이 좋은 소식을 알린다면, 경과를 기다리고 있을 부왕께서도 무척 기뻐하지 않으실까.

깜짝 놀란 왕의 얼굴을 상상하던 세자는, 연신 심호흡을 흩뿌린 끝에 진정했다.

수본을 통해서 희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

선 비이패가 조선의 군항에 정박하고 죄인들은 모두 포박하여 한양의 의금부에 하옥시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은 그 뒤에 전해도 되는 것이다.

* * *

며칠 뒤 한양에 서반아의 복이모사 총독, 방지거方濟各와 그의 수하들이 압송됐다.

홍모이가 대량으로 압송되자 붉은 터럭은 대수롭지도 않았던 한양의 주민들조차 관심을 드러냈다.

함거는 서대문을 통해 줄줄이 들어와 의금부로 향했다. 인파는 길목의 좌우로 몰려들었고 함거와 내용물을 구경하며 떠들었다.

“얼마 전에 청래로 향하던 배가 홍모이들에게 공격받았다더니, 저놈들인가 보네.”

“해적들이었구만?”

“이 나라가 해적들을 상대하는 거라면 일가견이 있지.”

“일가견이 있는 게 아니라, 일가견이 있게 됐지! 왜놈에, 서토西土놈에, 이제는 털 붉은 오랑캐들까지! 누가 이 땅에 나 몰래 꿀이라도 발라놨나?”

“어이쿠. 내가 오래전에 꿀을 퍼먹다 조금 흘렸는데 그것 때문인가 보구만.”

함거들은 무수한 시선과 실없는 잡담을 헤치고 의금부에 다다랐다.

그리고 죄인들이 솟을대문의 문간을 넘어 더는 눈으로 좇지 못하게 되자, 즐비했던 구경꾼들은 털 붉은 오랑캐들의 흉악성과 오늘도 건재한 조선의 정의를 논했다.

“해적들도 도적처럼 싹 다 매달아야지.”

구경꾼들이 의금부를 등진 채 삼삼오오 흩어지는 동안, 프란시스코와 그의 부하들은 의금부의 뜰에서 이국의 권력자들을 맞이했다.

볕을 오래 보지 않아 흰 얼굴에 정무와 정쟁으로 찌든 날카로운 인상들이었다.

그들은 질 좋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걸쳤으며 칠흑처럼 새까만 모자를 썼는데, 생김새는 물론이고 복장의 고급스러움마저 본국의 귀족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프란시스코는 문득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예를 다해라.”

프란시스코를 붙든 무관이 엄한 소리와 함께 오금을 찼다.

“너 같은 죄인이 똑바로 서서 뵐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프란시스코로서는 이국의 말을 알지 못했으나, 강제로 무릎이 꿇리면서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의 총독인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프란시스코는 분하고 억울했다.

야만인들 따위에게 무릎을 꿇려졌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본국에서 얼마나 질타를 받을까? 총독직을 유지하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의금부에서 살아 나올 수 있을 때나 고려해야 할 문제였지만 말이다.

“주상전하 납시오!”

프란시스코의 등 뒤에서 누군가 높고 여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이국의 권력자들이 일제히 신색을 가다듬었다.

프란시스코는 군주의 등장을 직감했다. 그래서 우악스럽게도 뒤통수를 눌러대는 손바닥에도, 고개를 돌려 이 나라의 주인을 두 눈으로 보고자 했다.

무릎 꿇린 채 눈만을 억지로 돌릴 수 있었던 프란시스코의 시야에 금실로 장식한 검은 신발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비단 도포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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