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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22화 (322/380)

인조, 명군이 되다 322화

“이자들이 선 비이패에 타고 있던 죄인들이란 말이지요?”

“말단 수병水兵들은 제하고, 배 안에서 직급을 갖췄던 자들만을 추려 압송하였습니다.”

영의정 이상의가 답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마당에서 가장 가까이 무릎 꿇린 죄인은 호화스러운 정복을 갖춘 채였다.

그 뒤의 죄인들은 지저분하나 양식만은 세련된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영의정이 계속 말했다.

“맨 앞에 무릎 꿇린 자는 복이모사에서 서반아의 개척지를 총괄했던 방지거方濟各이옵니다.”

“아.”

세자에게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방지거, 그러니까 프란시스코라면 스페인인 선장들을 사주해 조선과 네덜란드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자다.

그런 인물이 군선을 이끌고 직접 조선을 방문하려 했다는 건, 소위 말하는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시도하기 위해서겠지.

거대하고 화려한 군함은 정점에 오른 기술력과 군사력의 결정체다. 포함외교란 이를 과시함으로써 배다운 배를 가지지 못한 세력에게서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2, 30년 전의 조선이었다면 영락없이 무릎 꿇었겠지.’

조선의 선박기술은 범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뒤처지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누백년 싸움질과 해적질만 해왔던 왜구들조차 이순신이 이끌었던 해군으로 물리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서양 강국의 전선은 세계적인 평균은 대조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치에 있다.

‘파나마 운하도 없는 시절에 아메리카 서부에서 유럽 끝자락까지 수십 톤 화물을 배 한 척으로 옮기는 수준이니까.’

21세기에도 드문드문 화제로 조명되는 보물선 전설의 주역들이, 바로 오늘날 서양 범선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도 만만찮다.’

현재 조선은 네덜란드의 범선을 복제하고 활용하며 양산 중에 있다.

정점에 이른 서양 강국들의 기술력이나 군사력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포함외교에 호락호락 당해줄 정도로 무기력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 결과다.

“죄인들을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

아메리카의 서부에서 유럽의 끝단까지,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아다닐 정도로 강대한 스페인 제국의 총독과 선원들이 조선 재판기관의 뜰에 무릎 꿇려졌다.

그들이 난폭하고 야만적인 포함외교를 통해, 이 나라가 보여주기를 바랐을 그 모습으로 말이다.

“당연히 고신拷訊하여 저들의 입으로 직접 죽을 죄를 실토하게 만들고, 사악한 오랑캐들의 소굴에서 어떤 흉참한 모의가 또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야지요!”

이귀였다.

병조참판이자 은행의 상임감사를 맡은 그는, 근래 모난 성격에 비해 얌전하게 직무만을 수행해왔다.

별개의 조직에서 각기 높은 자리를 겸임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리 활발하고 기력 넘치는 개라도 지쳐 쓰러질 정도로 굴려대면 집에서는 얌전해지는 법이다.

그런 이귀가 간만에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히 오랑캐 주제에 아조를 기망하고 위협했습니다! 이런 것들에게 하찮은 목숨을 연명시켜준다면, 얼마나 많은 오랑캐가 아조의 변경을 더 침탈하겠습니까!”

이귀는 주먹을 움켜쥔 채 부릅뜬 눈으로 죄인들을 노려보았다.

“남쪽 섬나라의 오랑캐 잡종들은 누백년 잊을만하면 봉기하여 삼한의 성지聖地를 침탈하고 백성들을 살해하며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 밥버러지 같은 해충들이 두고두고 분탕을 쳐대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충들의 소굴을 진즉에 쓸어버리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이귀는 제대로 뿔났다는 듯 허공을 주먹에 붕붕 휘둘러대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 난폭한 모습에도 신하들은 이귀를 말리지 않았는데, 대신 대부분이 임란의 수모와 치욕을 직접 겪었고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나 같아도 안 말리지.

옳은 말이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존재 자체를 진즉 없애버렸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있겠으며, 경술국치는 어떻게 있었겠나.

‘일본을 없애버리는 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서 그렇지…….’

그게 가능에 가까웠던 시기가 있기는 했다.

근 350년 전, 몽골 제국이 분열하며 송나라가 멸망했던 땅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제국이 있었다.

원元나라라고.

이 나라의 건국자 쿠빌라이 칸은 분열기에 상실해버린 몽골의 서쪽 절반을 되찾고자 했으면서, 동시에 그 이상을 바랐다.

그런 그에게는 동쪽의 말단으로서 반드시 정벌해야 했던 땅이 있었다.

당연히, 일본이었다.

‘두 차례나 정복을 시도했지. 두 번 다 태풍을 맞이하면서 처참하게 실패해 버렸고.’

만약 당시 일본에 그와 같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열도라는, 바다로 고립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권을 발전시켜온 일본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다고 순식간에 뿌리까지 뽑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내가 아는 것과는 크게 달라졌겠지.

‘그리고 지금 일본을 없애는 건…….’

솔직히, 늦어도 너무 늦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보다 두 배 이상의 인구와 생산력을 갖추게 됐다.

여기에 수백 년 내전으로 다져진 상무尙武 문화와 앞선 서구와의 교역은 어떤가?

도요토미가 원정에 실패하며 그에게 충성했던 다이묘들과 군대는 이역만리 땅에서 거름이 되어버리고, 열도에서는 내전이 이어져 더 많은 거름이 만들어졌음에도 빈자리는 빠르게 메워졌다.

뒤를 이어서 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그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지배 기반을 공고히 다졌기 때문이다.

‘애석한 일이지. 지금의 열도는 조선이 보유한 정예병을 모조리 동원하더라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조선은 스페인 제국의 말단이나마, 흉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을 수월하게 처단했다. 조선 역시 무시 못 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방증이다.

‘성실하게 발전해나가면 일본은 따라잡을 수 있다.’

달라진 역사에서 조선은 강대국의 포함외교를 수월하게 막아냈지만, 반대로 일본은 그러지 못했다.

일본은 흑선의 등장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해야 했으며, 조약을 개정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열강들에게 은과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세력의 우열을 뒤집을 순간이 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선은 포함을 입수했지.’

선 비이패, 원음은 산 펠리페일 스페인 제국산 최신예 거함은 삼한의 땅에 발을 디딘 왜인들이 그렇게 되었듯 마찬가지로 거름이 되어서 이 땅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죄인들도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러워졌다.

“병조참판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의 찬동에, 연신 과격한 발언을 내뱉던 이귀가 멈칫했다.

놀라기는 신하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오랑캐 따위가 아조를 기망하고 위협한 죄는 만 번 죽더라도 씻을 수 없습니다.”

냉담하게 이르니, 긴장이 역력한 가운데 이귀만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하오시면, 어떻게 해야 저들이 가진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사옵니까?”

“예로부터 병법에서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백전百戰해도 불태不殆라고 하였습니다. 참판께서 이미 저들을 통해 소굴의 내막을 알아내자고 권하셨는데, 그렇게 하여 저들 오랑캐의 사정과 습성을 뼛속까지 알아낸다면 장차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 말대로 해야겠다는 소리인지라, 이귀는 어깨가 으쓱해져서는 답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나는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일렀다.

“죄인들은 일단 의금부에 하옥시키겠습니다. 내가 저들을 심문하는 데 아주 유용할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상의가 물었다.

“누구를 하교하시는 것이옵니까?”

“세자입니다.”

“……세자가 말이옵니까?”

이상의가 커진 눈동자로 물었다.

“예.”

그렇다고 세자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자는 심문의 전문가가 아니라, 그러한 전문가를 보유한 사람이다.

내가 직접 실방사를 물려주었으니까.

그리고 실방사에는 오문과 복이모사에서 작전을 펼치며 홍모이의 언어와 풍속을 익힌 일원들이 있다.

죄인들이 올바르게 실토하는지, 아니면 당장의 면피와 어쭙잖은 충성을 위해 말장난을 하는지 쉽게 분간할 수 있겠지.

이건 의금부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실방사와 이를 소유한 세자만이 가능한 특권이다.

“세자에게 죄인들을 죽이지는 말라고 당부해두겠습니다. 설령 해적들의 하찮은 목숨일지라도, 국법에 따라서 판결하고 처분해야지 않겠습니까?”

조정과 의금부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부분이다. 중신들은 실방사의 존재감이 확대하는 걸 두려워한다.

죄인들의 처분 권한은 보호해 주어야지.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이상의가 기껍게 응했고, 나는 죄인들의 최후를 잠시 유예해준 뒤 신하들을 이끌고 환궁 길에 올랐다.

의금부를 나서는 동안 죄인들은 어리둥절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참수라도 당할 줄 알았을까?

조선은 문명국이다. 효용이 뛰어난 죄인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곧 벌어질 상황을 알았다면, 죄인들은 차라리 함부로 죽여주기를 바랐을 테지.

죄인들은, 그들이 조만간 토해낼 정보를 제하고는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나는 죄인들의 존재는 잊기로 하고 대신 산 펠리페를 떠올렸다.

* * *

산 펠리페의 운명은 가혹했다.

스페인 황제의 이름을 딴 이 호화스러운 거함은 조선이 입수한 이 시대 기술력의 정점이었으니까.

이러한 거함을 손대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게 둔 채 그대로 재활용하는 건 왕의 방식이 아니었다.

왕의 방식이란 거함을 구성한 정점의 기술력을 골수까지 흡수해, 산 펠리페 못지않은 배를 더 양산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 펠리페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황제는 조선의 해부대에 올라야만 하는 것이다.

해체는 쉽지 않았다.

산 펠리페는 육중하고 거대했다.

얼마나 육중하고 거대하냐면, 인력에 의지하여 뭍까지 끌어 올리는 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그대로 해체해버릴 수도 없다.

조사와 연구가 용이한 환경에서 배를 해체해야만 기술력을 분석하고 배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조선의 기술자들은 산 펠리페를 해체하기 위한 ‘드라이도크’부터 개발해야 했다.

거함을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없다면, 물에 잠긴 채로 격리하고 그 안의 물을 퍼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 드라이도크, 건선거乾船渠는 선박을 해체할 때 외에도 쓸모가 많았다.

“어떤 쓸모를 말씀하시는 겝니까?”

어전에서.

영의정 이상의가 질문하자, 건선거의 효용을 강조하려던 병조판서 정충신이 흔쾌하게 답했다.

“군선을 해체하기 용이하다 함은, 다르게 말해서 군선을 조립할 때 역시 유용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산 펠리페의 해체는 국가 중대사이면서도 동시에 국방과도 연관이 깊었다.

그러니 병조판서인 정충신이 경과를 주시하는 것만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나가 시찰까지 하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의외의 소득이 되어주었다.

“또한, 한 번 건조한 배를 오래도록 쓰지 못하고 몇 년마다 개삭改?하다가 끝내 폐기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다 생물과 바닷물이 끊임없이 침투하여 판자와 못을 부식시키고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건선거를 이용해 건조하게 배를 유지할 수 있겠군?”

이상의가 추측성 발언을 던져보았으나 정충신은 고개를 저었다.

“목재는 환경이 계속 변하면 내구성이 약해지니, 뭍에 띄우게 되었다면 계속 띄우는 게 맞습니다. 소관이 아뢰고자 하는 바는 개삭과 보수의 편의성이 크게 증대된다는 것입니다.”

“……편의성이 증대된다고 하여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게 있는가?”

“예.”

정충신이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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