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3화
단언한 정충신이 말했다.
“본디 국법에는 군선의 종류마다 연한을 정해두어 주기적으로 개삭하고, 사용 연한을 넘긴 배는 폐선하게 되어 있으니 말단에서는 두 가지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된 지 오래입니다.”
목선을 구성하는 판자를 교체하는 것이나, 그런 판자들을 고정하는 못을 교체하는 것이나 어느 쪽도 번거롭기는 마찬가지.
더욱이 개삭은 일정 연수마다 배의 나무못을 모두 교체하는 작업이다.
한 척의 배만으로도 개삭의 작업량은 벅찬 수준이다. 많은 수의 군선을 보유했다면,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개삭의 작업은 더더욱 고단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신분의 굴레와 마찬가지로 대대로 강요되면서도 일은 극도로 고되고 험하며 대우와 인식이 모두 나쁘다. 당연히 수군이 될 사람들은 계속 도망을 쳐서 수영에는 사람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다.
“말단이 어찌하여 죄나 지을 요량으로 국법을 위반하겠습니까.”
정충신이 아뢨다.
“다만 사정이 현실과 맞지 않아서 미루고 또 미루게 된 것인데, 이로써 배들이 적기에 정비를 받지 못하여 연한이 되기도 전에 폐기되거나 그 지경이 되어서도 억지로 숫자만 충당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이실직고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배를 관리하는 건 한 사람 임기만의 일이 아니다.
족히 수십 년 폐단이 적체되어 오늘날의 상황에 이른 것인데, 이제 막 자리에 올라 임기를 시작한 사람이 조정에 고발할 수 있을까?
자신보다 먼저 이 자리를 지나간 사람들은 다 품계도 더 높아졌고 한양에 있는데 말이다.
현실의 고발은 다 죽자는 소리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전국에 비슷한 문제가 산재했는데 그 오물길을 걸어오며 다 오물을 묻혀온 권력자들이 이제 와 태도가 달라져서 고발을 들어주기나 할까?
그렇게 말단의 실무진과 책임자들이 자기 안팎에서 설득을 당하게 되면, 수영水營에는 존재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배,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데 존재하는 배가 산재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태로 불시에 발생하는 위협과 맞설 수 있을까.
“건선거乾船渠를 도입한다고 하루아침에 은밀히 누적된 모든 폐단에 일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충신도 불유쾌하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비가 편리하게 된다면 개선될 여지가 훨씬 늘어나는 것입니다.”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영의정 이상의가 반응했다.
“병조판서의 헤아림이 그러하다면야…….”
건선거의 도입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충신 한 사람의 의향으로만 나랏일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 쪽은 오직 왕뿐이니까.
이상의가 왕을 바라보자 정충신은 물론, 여타 중신들도 똑같이 용상의 처결을 기다렸다.
“…….”
기실, 왕이라고 완전히 독재할 수 있지는 않다.
신하들이 반대하는 사안을 왕 오롯이 몰아붙이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건선거의 도입도 마찬가지.
이제 선船 비이패費利佩의 수월한 해체와 분석을 위하여 막 도입한 건선거다.
그 효용이나 결과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병조판서의 안목 하나만 믿고 전국의 수영에 도입할 수는 없었다.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선 비이패를 수상水上에서 격리하고 그 안을 건조한 상태로 만드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거선인 선 비이패가 잠기는 깊이만 하더라도 엄청났으니까.
그렇다고 바닥을 벅벅 긁어가면서 좌초시켜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병조판서의 혜안은 신용하나, 이미 선 비이패를 해체하기 위한 건선거 제작에 큰 비용이 투입되었습니다. 서두르고자 하여도 여유가 없는 마당이니, 경과를 자세히 지켜보면서 백관百官을 설득할 근거 또한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초의 건선거를 설치하고 운영하면서, 그것을 확대할 명분만 아니라 건선거 자체를 더 발전시킬 경험 또한 얻게 될 터였다.
마냥 좋다고 당장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가면서 동시다발적으로 건선거를 확대하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건선거를 확대할 이유 자체는 분명하다고 해도 말이지.’
산 펠리페는 어디서 대충 주워 온 고물이 아니다.
포르모사의 총독까지 탄 거함이 실종됐으니, 스페인 본국까지는 아니어도 누에바 에스파냐, 하다못해 스페인령 필리핀에서라도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올 터.
그리고 그들로선 불쾌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뒤따를 그들의 망상을 저지할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해상전력 확충에는 건선거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될 거고.’
그러니 정충신의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거다. 단지 지금 당장만 아닐 뿐이지.
“병조판서, 내가 말씀드린 바가 어떻겠습니까?”
“모든 하교가 이치에 부합하니 신이 어찌 이견이 있겠사옵니까. 마땅히 뜻대로 할 따름이옵니다.”
정충신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역시 성급한 확대는 바라지 않으며, 건선거의 용이함을 알린 것만으로 만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최초의 건선거가 완성되면 팔도의 검증된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그들이 직접 홍모이의 발전한 조선造船술을 익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기술자들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부분 또한 강조했다. 스페인의 우수한 해상기술을 다른 세력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조선만이 오롯이 스페인의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해야만, 극동에서 자신만의 바다를 가진 조선이 더욱 우뚝 설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일본에 흑선사건을 주역으로서 보여주어야 하니까…….’
* * *
궐에 왕과 중신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는 동안.
의금부를 찾는 손님들이 있었다.
미리 예정된 방문이었던 만큼, 의정부의 문간을 지키는 나졸들은 곧장 정문을 개방했다.
그러나 예정되지 않은 방문이었을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무나 의금부를 찾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소관이 의금부의 내부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옵니다만, 생각보다 살풍경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실방사와 조선유상의 주인.
한윤.
그의 곁에는 그가 직접 수행하는 세자도 함께했다.
“정랑께서는 어떤 환경에서 공무를 보기에 의금부가 살풍경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보통은 이곳보다 더 어둡고 습한 곳에서 정무를 봅니다.”
“어둡고 습한 곳이 다 살풍경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지요?”
세자가 빙긋 웃으면서 지적하자, 한윤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싶다는 듯 멋쩍게 따라 웃었다.
곧이곧대로 아뢰기에는 민망한 환경이다.
실방사의 요원들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고통도 불사한다. 본인들이 그럴진대, 상대방의 사정을 봐줄리는 없었다.
세간에서는 살벌하다며 학을 떼는 주리틀기나, 가죽을 벗겨내는 삼각매 정도는 실방사에서 귀여운 축에 속했다.
그리고 그런 실방사의 장관과 요원들이 의금부를 방문했다.
그 사유는, 당연히 뼛속까지 심문해야 할 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자와 실방사 일행이 감옥 앞에 이르자 나졸들은 굳은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서 벌어질 일을 쉽게 짐작했으리라.
내부는 어둡고 퀴퀴했다.
짚을 깔아둔 바닥 아래로는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흙바닥에 점점이 뿌려진 검은 자국들.
발끝으로 그것을 확인한 세자는 말 없이 미간을 좁혔다. 조선의 의술과 위생 관념을 크게 증진한 주역으로서 이런 환경은 용도와는 별개로 불쾌했다.
죄인들은 감옥 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각자 한때는 화려한 옷을 걸친 채, 이제는 화려하지 못한 몰골로 듬성듬성 자리해 있었다.
몰려드는 발소리는 전부터 들었는지 다들 웅크리거나 기댄 채로 고개만 들어서 일행을 마주했다. 멍청한 눈빛이었다.
“저하.”
한윤이 양해를 구하자 세자가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한윤이 나졸에게 말했다.
“끌어내라.”
나졸이 허리춤에서 열쇠고리를 꺼냈고, 찰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돌아가자 방 안에 갇혀있던 죄인이 식겁하며 물러났다.
“¡que!”
실방사의 일원들이 버둥대는 죄인을 끌어냈고, 죄인은 마치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Dejame! ¡Barbaros!”
죄인이 꿈틀대며 저항하자, 다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죄인들도 저마다 창살까지 다가와 무어라 외쳐댔다.
“¡dejalo!”
“¡Incredulos!”
그러나 창살 사이에서 아무리 팔을 뻗는다고 끌려나가는 죄인을 도와줄 수는 없다.
실방사 일원들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죄인을 숙이게 했고, 죄인은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외쳐댔다.
“너무 시끄럽군.”
한윤의 한 마디에 즉각 실방사 일원이 죄인의 허리를 때렸다.
손속 따위는 봐주지 않는다는 단호한 주먹질에, 죄인은 끈적한 침을 토해내고는 신음했다.
그런 죄인의 곁으로 한윤이 다가와서 말했다.
“Si sigues haciendo ruido, te desollare.”
“……!”
죄인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강제로 몸을 숙여, 붉게 물든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hablar?”
“te dije que no digas.”
실방사 일원이 다시금 죄인의 허리를 때렸고, 죄인은 신음하고는 침을 토해냈다.
한윤과 실방사 일행이 죄인을 데리고 간 곳은 의금부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바닥이 탄탄히 다져진 곳에, 주변에는 감방 하나 없었고 오롯이 한가운데 의자 하나만이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그 의자에 죄인이 내던져지고 고정되는 동안 세자가 물었다.
“의금부에 이러한 장소가 있었던가?”
중죄인의 심문은 국문鞫問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렇게 내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심문하는 건 예법에 맞지 않았다.
“저하, 불쾌한 장면이 발생할 수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심은 어떻겠습니까.”
막 놓인 탁자에 고문 도구가 차르르 쏟아졌다.
그 광경에 죄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는 시끄럽게 떠들어댔고, 그런 죄인을 실방사 일원들이 단호하게 제압했다.
세자에게는 그마저도 불쾌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눈에 더 담지 않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자신의 자시로 벌어지는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부왕께서는 사도私道를 익혀두라고 매번 강조하셨지.’
그러나 그것이 사도만을 갈고 닦아 부정한 방식에 통달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그러한 수법을 쓸 수 있으므로 익혀두어야 했고, 또 그러한 수법이 탐탁지 않다면 옳은 방법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사도 또한 배워야 했다.
자신이 학문과 경험, 실력과 재주가 부족했을 때 무슨 길을 가야 하는지 각오하고 두려워해야만, 진정으로 정도를 추구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니까.
‘지금의 나에게는 홍모이들이 일으킬 후환을 다스리는 방법으론 실방사를 동원해서 피를 보는 것 외에는 없구나.’
자신이 학문과 사고를 더 갈고닦지 못했고, 그래서 더 좋은 방법은 떠올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 결과였다.
그렇다면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심을 굳힌 세자가 답했다.
“아니요.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 단호한 표정에 한윤은 반 박자 늦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불편해지신다면 얼마든지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한윤은 재차 끄덕이고는 탁자에 놓인 고문기구 중 하나를 잡았다.
끝이 낚싯바늘처럼 날카롭게 휜 고리였다. 얼핏 보아도 끔찍한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다.
그것을 죄인 역시 깨닫기를 바라는지, 한윤은 죄인의 면전에서 고문 도구를 보여주고는 무어라 속삭였다.
죄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