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4화
죄인 대부분은 자신이 아는 것을 그대로 토해냈다.
몇몇은 황제와 제국을 향한 충심으로 오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그들이 언제 고문을 받아보았겠는가?
그들의 처참한 비명과 애걸은 평범한 수많은 사람을 칼끝 한 번 대지 않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스페인령 포르모사의 총독, 프란시스코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제기랄, 이런 제기랄, 이런 제기랄, 이런 제기랄…….”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쥔채로 끙끙거렸다.
감옥의 깊숙한 곳에서 그의 부하들은 어설프게 저항하다가 이내 울부짖거나, 혹은 중얼거리면서 되는대로 떠들었다.
그렇게 부하들이 하나둘 꺾여나가는 모습을 보는 프란시스코의 정신력 또한 조금씩 깎여나갔다.
포르모사나 필리핀에서 그를 힘들게 한 건 지독한 해충들과 그 해충들만큼이나 지독한 현지인들이었다.
그러나 해충이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본래 이유가 없으며, 현지인들과의 싸움은 차라리 영광스럽기라도 했다.
이렇게 이역만리 복음조차 전파되지 않은 미개국의 감옥에 갇혀 고문당할 순번을 기다리는 건 프란시스코가 각오했던 운명이 아니었다.
“jeonom. kkeul-eo naela!”
볕조차 들지 않는 시커먼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프란시스코는 숨마저 멎은 채 긴장했다.
그의 순번은 아니었다.
대신, 유일하게 감옥에 남아 있던 그의 부하가 빽빽 비명을 지르면서 멀어졌다.
“…….”
프란시스코는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에 심장이 옥죄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어렵사리 창살을 잡고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어둡기만 한 사방에는 이전처럼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심장 소리와 떨리는 호흡만의 외롭게 느껴질 뿐.
“…곤잘로?”
적막.
“디에고?”
적막.
“산티아고! 페드로! 로드리고! 알론소! 헤로니모! 페르난도!”
프란시스코는 자신과 함께 붙들려온 부하들의 이름을 외쳐댔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적막뿐이었다.
프란시스코는 창살을 붙든 채 마구잡이로 흔들며 발광했다.
“아무나 말을 해 봐! 나만 남겨놓고 가지 말라고! 제발! 신이시여! 신이시여! 오오! 오오오!”
프란시스코는 성난 원숭이처럼 몸을 흔들어댔지만, 바닥 깊숙이 고정된 창살은 꿈쩍 하지 않았고 애꿎은 어깨만 아플 따름이었다.
그런 광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있었다.
조용히 멀리서 프란시스코를 주시하며, 그의 순번이 오기만을 바랐던 실방사의 일원이었다.
그가 다가오자 프란시스코는 허둥대면서 물러났다. 놀람과 두려움에 바지가 흥건하게 젖어갔지만, 정신이 나가버린 프란시스코는 인지하지도 못했다.
“ige dol-atna?”
“으, 으오오!”
“jinjjalo jeongsin-i nagatun.”
이국의 불신자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하더니, 이내 감방에서 다시 멀어졌다.
프란시스코는 자신이 적셔버린 감방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다시 적막으로 가득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커먼 어둠이 손끝을 타고 프란시스코를 옥죄어왔다.
* * *
“일부러 심문 순서를 미뤄두었는데 도리어 역효과가 날 줄이야.”
실방사 일원의 보고에 한윤이 탄식했다.
방지거(프란시스코)는 서반아령 복이모사의 총독이었다. 그런 그의 특별한 위치를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심문하는 게 많은 정보를 빠르게 얻는 방법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심문의 순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방지거의 협조성이다.
그가 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서둘러서 심문에 돌입한들 쓸만한 정보를 얻기란 힘들다.
그래서 한윤은 의도적으로 방지거의 심문 순서를 늦춤으로써, 심리적인 장벽을 허물고자 했다.
자신의 부하가 심문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건, 혹은 고문을 피하고자 있는 대로 토설하는 것을 듣건, 어느 쪽이라도 방지거의 심리적 장벽을 흔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정신이 나가버릴 줄이야.”
한윤과 실방사는 방지거의 심리 상태를 꺾고자 했으나 그는 이미 꺾여 있었다.
그 상태에서 가해진 심리적인 충격이 끝내 방지거를 망가뜨린 것이다.
한윤은 당혹스러웠다.
방지거가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망가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법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오히려 꺾이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령 어른…….”
실방사의 일원이 조심스럽게 한윤의 계획을 물어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윤도 처음이었던지라, 시원하게 상책을 내어놓지 못했다.
그가 답했다.
“일단은 저하께 보고해두고, 방지거의 처우에 대해서는 천천히 고민해보지.”
“방지거의 수용은 현재 상황으로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다만 더 이상의 자극은 주지 않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식사나 식수를 전달할 때도 조심스럽게,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하라고. 더 돌아버린다면 곤란해지니까.”
무려 총독에 달하는 인물이다.
어째서 이렇게 유약한 인물이 총독에 오를 수 있었는지 미지수이나, 그만한 자리에 있었다면 머릿속에 든 게 다 허섭스레기만은 아닐 터.
“완전히 돌아버리더라도 일단 쓸만한 정보는 모두 빼낸 뒤여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실방사의 일원들이 예를 올린 뒤 물러나고, 한윤은 난처한 얼굴로 문방사우를 끌어당겼다.
그동안 실방사를 이끌면서 갖은 난국亂局이 있었다.
왕명을 받들어 요동에 침투하는 것, 그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 확장한 세력을 더욱 주변에 퍼뜨리는 것 등.
말은 쉬울지라도 도처에 무수히 깔린 눈과 귀를 모두 속이면서도, 동시에 절대 속일 수 없는 눈과 귀는 매수하건 처단하건 해야 했다.
언제 모든 대업이 그르치고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시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난관들도, 금나라를 향한 뿌리 깊은 증오심과 목숨마저 거는 독기로 끝내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돌아버릴지 모르는 중요한 정보원을 다루는 건…….’
그동안 한윤이 취해온 방식으로는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더라도 말이다.
‘부디 저하께서는 좋은 방법이 있으셨으면 좋겠군…….’
한윤은 수본에 그런 기대를 담아, 자신과 실방사가 처한 한계를 써내렸다.
* * *
세자가 의금부를 방문한 건 그날 새벽이었다.
실방사에서 붉은색 수본이 보내진 건 몇 시진 전이었으나 앞서 도달한 소소한 정무들과 예정된 일과들이 있었다.
그것을 모두 처리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떨어지다 못해 달이 중천에 뜬 뒤였다.
세자는 쌀쌀함을 느끼면서 손끝을 소매 안에 숨겼다.
“기다리셨습니까.”
의금부의 뜰에는 한윤과 실방사 일원들이 틈틈이 횃불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마치 수본을 올렸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한윤의 대답에 세자는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실방사와 그 조직의 장관이라면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기만 하지는 않았으리라. 처음부터 별 의미는 없었던 질문이다.
세자는 곧바로 감옥으로 향했다.
그를 뒤따라서 한윤과 실방사의 일원들이 들어섰고, 어두컴컴한 내부를 밝혔다.
방지거는 감옥의 거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빛에 방지거는 몇 년 만에 빛을 보는 양, 팔로 시야를 가리면서 빛을 두려워했다.
그런 방지거의 주변에는 오물이 마구잡이로 흩뿌려져 있었다.
죄인을 수용하는 공간의 환경이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주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죄인들이 오물을 난잡하게 갈겨대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청결과 지저분함은 구분할 줄 알았고 자신을 구속하는 좁은 공간을 굳이 더 더럽게 만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달리 말하자면 방지거는 그런 정상 인간으로서의 사고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모습이었고, 심각한 상태였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특별하게 먼저 조처한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미리 보고드린 대로, 죄인의 심리적인 장벽을 허물고자 순번을 뒤로 배치하고 압박만 하였을 뿐입니다.”
한윤은 정녕 그게 전부라는 듯 건조하게 답했지만, 과오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방지거는 특별한 심문 대상인 만큼, 상태의 변화를 보다 면밀하게 주시해왔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테지.
그러나 이를 시인하는 건 한윤에게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실패는 처음이었으니까.
세자도 그 부분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였다. 뭐든지 항상 그런 법이다.
“죄인이 망가진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죄인을 호전시키는 방법도 거기에 있겠지요.”
심문을 앞두고 심리적인 압박이 거듭되었고 방지거는 견뎌내지 못했다.
즉, 심리적인 압박이 방지거가 현자 상태가 된 원인이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풀어주면 되는 것 아닐까?
세자가 일렀다.
“죄인을 풀어주세요.”
주변의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다들 당혹하고 놀란 낯이었으나 세자는 차분히 덧붙였다.
“강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씻을 따뜻한 물과 식사, 그리고 깨끗한 옷을 제공해주세요. 마치 아조의 관찰사를 대하듯이 말입니다.”
한윤은 한 차례 입술을 말았다.
죄인은 감히 아조를 기망하고 위협한 인물이다. 그것만으로 백 번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거늘, 도리어 분수에 넘치는 호사라니?
그러나, 한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세자는 실방사의 주인이었다.
주인에게 재고를 권하면서 함께 제안알 대안이 없다면, 지시를 순순히 따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 과정에서 사적인 생각이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심신을 가다듬은 한윤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세자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다음에는 죄인을 서궐로 데려오세요. 통역 역시 필요합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예.”
세자는 재차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발을 돌려서 의금부 감옥을 나섰다.
세자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한윤의 측근이 물었다.
“죽여 마땅한 놈에게 호사라니요?”
다른 실방사 일원들 역시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윤은 최선을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따를 따름이다. 저하의 뜻이 그러하시니, 상책이 없다면 받들 수밖에.”
한윤은 날카로운 눈으로 방지거를 노려보다가, 이내 그러한 시선마저도 세자의 의향과는 합치되지 않는 듯하여 억지로 인상을 폈다.
“정신이 나갔다고 상팔자가 됐군. 이 미친 해충에게 분에 넘치는 배웅을 선사해줘라.”
“정랑께서는요?”
“나는 내 눈 뜨고는 이놈이 호사 누리는 꼴을 못 보겠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
“…….”
부하들이 원성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한윤은 상대하지 않고 툴툴거리면서 의금부 감옥을 나섰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하게 된 실방사 일원들로서는 부러우면서도 치사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윤은 실방사의 정랑이요, 일원들은 그의 부하.
내키지 않더라도 까라면 까는 수밖에 없었다.
미리 감방의 열쇠를 확보해둔 실방사의 요원이 마지못한 낯으로 자물쇠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