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5화
프란시스코는 어리둥절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따뜻한 물과 깔끔한 옷, 나쁘지 않은 식사가 제공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옥 깊숙한 곳에서 허둥대던 자신이다.
그런데 이런 대우의 변화는 무엇인가.
혹, 제국에서 자신을 뒤쫓아왔을까? 그래서 이 야만하고 미개한 국가와 접촉하여 협상이라도 벌이는 중일까?
‘그래. 그렇지 않고는 야만인들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바뀌지는 않겠지.’
당장 자신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제국이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확신한 프란시스코는 마음이 편해졌다.
“휘유…….”
프란시스코는 안도 섞인 탄식을 토해냈다.
조선인들은 자신을 감옥에서 꺼낸 뒤, 심문하는 대신 거추장스러운 지붕을 올린 그들의 전통 가옥으로 데려왔다.
이곳에서는 따뜻한 물과 몸을 담을 수 있는 원통형 나무 욕조가 제공되었고, 감옥에서의 묵은 때를 모두 벗겨내자 그들만의 전통의상이 제공됐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전통의상은 맨살에 닿아도 쓰리거나 따갑지 않았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급변한 대접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식사는 좋은 말로도 호평하기 어려웠다.
조선인들은 빵 대신 곡물을 그대로 쪄낸 것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짜게 양념한 채소를 곁들였다.
본국의 정찬과 비교하면 품위도 없고 지극히 야만스럽다.
하지만, 며칠이나 식사다운 식사는 하지 못한 프란시스코다. 이런 불평도 배가 부른 다음에나 떠올랐을 뿐 정작 그릇들은 바닥까지 비워진 채였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한 프란시스코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돌아보았다.
조선의 가옥 내부는 단순하고 소박했다.
가구들은 높은 품질에도 화려한 장식은 거의 달지 않았다. 대신, 틈틈이 놓인 도자기가 정물화의 한 폭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개인들이라고 미학이 없지는 않군…….’
필리핀이나 포르모사의 원주민들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동방에서 첨단의 문화라고 봐야지 않을까.
프란시스코는 수기를 남기고 싶었다. 잘만 써낸다면 동방에 거의 무지한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키리라. 공무公務에 처참히 실패하여 총독직에서 날아가는 게 예정된 수순인 한, 미래의 벌이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었다.
“푹 쉬었나?”
얇은 종이문 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프란시스코는 화들짝 놀랐다.
이 이국의 땅에서, 몇몇 조선인은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다.
얼굴을 보지 않고 듣는다면 이 땅에 선주先住한 제국민이 있는 줄 착각할 정도다.
“…….”
놀라며 바르르 떨었던 프란시스코는 겨우 심장을 달래며 진정했다.
그를 놀라게 만든 건, 비단 이국에서 들려오는 유창한 모국어만은 아니었다.
프란시스코는 감옥에 갇힌 며칠간 즐겁지 못한 경험을 반복했다. 그것이 그를 과민하게 만들었다.
프란시스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덕분에 잘 쉬었다. ……다음 일정이 있나?”
프란시스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그다음 일정이라는 게 다시 감옥에 처박히는 거라면?
이조차도 심문의 일환이라면?
협조의 대가를 체험시켜주고, 다시 지옥에 보내버려서 끝없이 좌절하게 만들려는 악독한 수작일 수도 있었다.
‘이런 제기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물어볼 것이지!’
프란시스코는 조선인들이 더 못살게 굴지만 않는다면 질문에 얼마든지 응해줄 의향이 있었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개같이 자비를 애걸하고픈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안위를 구걸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 주의 신실한 신자이자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 제국의 일원이자 총독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분으로 미개국의 불신자들에게 자비를 구걸할 수는 없잖은가?
분명, 또렷하지는 않은 감옥 속 기억에서도 그는 자비를 구걸하지는 않았다.
바깥에서 말했다.
“네 분수에 넘치는 주인을 보게 될 것이다. 의복을 정제하고 예의를 준비해라.”
프란시스코는 즉각 자신의 곁을 지나간 붉은 용포 자락을 떠올렸다.
‘이 나라의 왕을 보게 되나?’
프란시스코는 꼴깍 침을 삼켰다.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구미가 당기는 건 총독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이 나라와의 교섭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외부에서 이미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프란시스코의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렇게 갑자기 대우가 반전될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조선의 왕은 나를 통해서 제국의 사정을 파악하려는 건가?’
주어진 정보로만 판단하기에는 현실성 높은 추측이었다.
‘물어본다고 다 답해서는 안 되겠구나.’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방침을 정한 뒤 의복의 상태를 확인했다. 옷의 소재와 만듦새가 좋아, 억지로 더 꾸밀 것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거울이 있으면 좋겠는데.’
방을 몇 번이고 살펴보았으나 역시 거울은 보이지 않았다.
질 좋은 유리에다 수은이나 은을 처리하여 만드는 거울은 유럽에서도 귀한 기물에 속했다. 미개한 동방에 그런 귀물이 나돌아다닐 리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프란시스코는 만약에 허세를 겸하여 밖에다 물었다.
“혹시, 거울이 있나?”
“기다려라.”
기다려라.
그 말이 프란시스코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거울은 잠깐의 시간이 지나, 방문 너머 차가운 인상의 사내에게서 찬 공기와 함께 건네졌다.
그가 건넨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에는 뚜껑의 형태로 거울이 달려 있었는데, 소재가 유리가 아닌 듯했다.
“귀한 물건이다. 흠집이라도 낸다면 그 자국 그대로 뼈에다가 새겨주겠다.”
절대 과장이 아닌 살벌한 경고에 프란시스코는 꼴깍 침을 삼켰다.
“……조심하겠다.”
차가운 인상의 무서운 사내가 돌아갔고, 프란시스코는 서둘러서 방문을 닫아버린 다음 거울을 확인했다.
역시나 소재가 유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겨울 시냇물처럼 투명한 것이, 질 좋은 수정을 쓴 듯했다.
‘동방에 거울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세공기술은 더욱 놀랍군. 가져갈 수 있을까?’
프란시스코는 불쑥 욕심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살벌한 조선인이 흠집이라도 내면 그대로 뼈에도 새겨주겠다고 경고한 걸 보아, 제공을 요구하거나 절도를 시도했다간 신체에서 뼈 자체를 발굴 당할지도 몰랐다.
‘아쉽군.’
프란시스코는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자신의 몰골을 가다듬었다. 지난 며칠간 고생을 있는 대로 한 탓인지, 반쯤은 야생에서 살아가는 야인野人과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이런 상태였다고? 야만인이 따로 없군!”
동방에서도 거울의 용도는 잘 알고 있는지 거울을 뚜껑 삼은 함에는 치장을 위한 작은 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프란시스코는 그동안 꾸미지 못한 것을 복수라도 하겠다는 양 최대한 기술을 발휘했다.
프란시스코가 방을 나서자, 바깥을 지키는 조선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놀랐겠지. 하지만 이게 진짜 내 모습이다.’
프란시스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감옥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었다고 말이다.
“자, 준비되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따라와라.”
조선인이 대문을 열자, 흙길로 된 거리와 함께 문 앞에 놓인 가마가 보였다.
그러나 가마의 크기는 매우 작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예물을 담는 함처럼 보일 정도였다.
“설마, 저기에 들어가라는 건 아니겠지?”
“그래.”
조선인의 딱딱한 수긍에 프란시스코는 가마 앞에 섰다.
조선인이 가마의 문을 열어주었고, 비좁은 내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여기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직접 시험해볼 생각이 없다면, 내가 시험해보지.”
프란시스코는 경악한 얼굴로 조선인을 돌아보았으나, 조선인은 돌을 깎아서 만든 인간인 양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다만 그 돌 같은 인상 그대로, 돌덩어리 같은 우악스러운 완력을 발휘해 사람을 마구잡이로 접어 가마 안에다 쑤셔 박을 기세였다.
“…….”
프란시스코는 그에게 신체의 유연함을 강제로 시험당하기 전, 직접 자신의 유연함을 시험했다.
비좁은 가마에 두 다리를 들이밀자 공간이 반쯤 차버린 듯했다.
그래도 억지로 하반신에 이어 상체까지 잔뜩 웅크린 채로 밀어 넣으니, 어떻게 좁은 공간에 사람 하나가 수납되긴 했다.
‘젠장. 빠져나올 때는 가마를 옆으로 기울여달라고 해야겠는데?’
도저히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설마, 이게 이 나라의 고문 방식인가?’
문득 든 생각에 프란시스코는 숨통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래서 팔을 지렁이처럼 꼬아가면서 손끝으로 창문처럼 보이는 것을 밀어냈다. 다행히 경첩이 돌아가며 환기구가 만들어졌다.
“후욱.”
프란시스코는 차가운 공기를 맡다가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가마가 불쑥 들어 올려졌고, 창문 너머의 비좁은 시야에서 거리가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흰 담장과 흔히 보이는 거추장스러운 흑색 기와지붕들. 새벽이 지나 밝아져 오는 거리. 그리고 담장과 담장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지평선의 시야와 여명이 젖어 오는 하늘.
풍경만은 나쁘지 않았다.
* * *
“내려라.”
가마가 멈춘 자리에서 살벌한 조선인 감시인이 명했다.
“…….”
프란시스코는 기꺼이 지시에 응하고 싶었다. 자력으로는 되지 않아서 문제지.
의금부에서 서궐까지 오는 동안 프란시스코는 가마와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허리는 시위를 풀어놓은 활처럼 굽어버렸고, 다리는 백숙을 앞두고 묶어놓은 닭의 다리처럼 꼬였으며, 두 팔은 나머지 신체부위가 차지하는 공간을 피해 마구잡이로 찌그러졌다.
그 광경을 조선인이 찌푸린 눈살로 마주하자 프란시스코가 억지로 말했다.
“도, 도와주게.”
공간이 너무 좁아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끔찍한 상태에서, 조선인은 프란시스코가 쑤셔박힌 공간의 틈으로 두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프란시스코를 마저 접어버리면서, 그가 고통을 호소하거나 말거나 상자에서 물건 꺼내듯이 프란시스코를 가마에서 빼냈다.
“으, 으억!”
프란시스코는 두 발로 땅을 디뎠으나, 한참이나 억지로 접혀 있던 그였기에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후들거리면서 가마에 기댔다.
프란시스코는 찬 공기에 차갑게 식어버린 가마 지붕에 뺨을 댄 채로 신체적 자유가 주는 기쁨에 감동했다.
“……제발, 자네 족속들의 신체적 학대를 중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마는 크게 만들게.”
“이건 여성용이다.”
“…뭐?”
“호들갑 다 떨었으면 일어나라.”
조선인의 엄한 지시에 프란시스코는 마지못해 가마를 짚으며 제대로 일어났다.
억지로 처박혀 있었던 탓에 왕을 본다며 기껏 가꾼 머리도, 수염도 다 망가진 채였다. 이게 다 여성용 가마에 억지로 태워진 탓이었다.
‘대우는 나아졌어도 여전히 야만하고 무례한 건 달리지지 않는군. 내게 여성용이라니…….’
실방사에서 사방이 막힌 여성용 가마를 준비한 건 해적 두목이 분수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을 세간에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프란시스코는 태평하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여전히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서궐로 향했다.
서궐은 프란시스코가 동방에서 마주한 그 어떤 건물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바닥은 백토를 다져놓아 희고 말끔했으며, 담장은 석회를 이용해 벽돌을 차곡차곡 쌓은 것이었는데 잘 관리되어서 황실 궁전의 담장 못지않았다.
정점은 각 건물의 지붕이었다.
그동안 프란시스코가 봐온 지붕은 모두 흑색 기와만을 얹어놓아 거추장스러우면서도 칙칙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서궐의 지붕은 모두 매끄러운 청록색 기와로 덮어놓았고 그 색상은 마치 맑은 하늘과 숲으로 가득한 산을 섞어놓은 듯했다.
진정 나라의 주인이 기거하는 장소다운 품위와 화려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