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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26화 (326/380)

인조, 명군이 되다 326화

방대한 서궐을 가로질러 프란시스코와 그를 감시하는 실방사 일원이 도착한 곳은 동궁 권역이었다.

조선의 후계자가 기거하는 이 장소에서, 세자는 소식을 듣고 다과상을 준비해둔 채였다.

“저하.”

실방사의 일원이 예를 표했고, 프란시스코 또한 왕실의 주인을 대하는 예법으로 공손히 인사했다.

“Alteza.”

그 모습에 세자가 미소지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세자는 내심 실방사 일원들이 죄인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의 상태는 세자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호전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예법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역시나 정반대로 해주는 게 정답이었어.’

세자는 결과로 증명된 이 현상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심질心疾로 고생하는 게 고작 눈 앞의 죄인 한 사람뿐이겠는가.

그러나 당장은 심병의 치료법을 궁리할 때가 아니었다.

세자는 안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어디, 그가 얼마나 협조적인지 확인해 봅시다.”

실방사의 일원이 세자의 뜻을 전해주자, 프란시스코는 굳은 얼굴로 세자의 뒤를 쫓았다.

* * *

프란시스코는 세자와 만나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단순한 정보들만 물어보는 거지?’

스페인의 왕은 누구냐. 스페인의 역사는 무엇이냐. 현재 유럽의 상황은 어떻냐.

프란시스코는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해주었다. 그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스페인을 다스리는 분은 펠리페 4세로, 포르투갈의 왕과 저지대의 주인을 겸하고 계십니다.

-스페인은 718년 펠라기우스 왕이 건국한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오랜 세월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이교도가 지배하고 있었던 이베리아를 회복해왔습니다. 그러다 오늘날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대에 이르러, 분열되어 있던 반도가 통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유럽은 이단이 발흥하여 주를 믿는 신실한 국가와, 신의 뜻을 곡해하는 모독적인 무리가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주를 쫓는 지구상 가장 신실하고 신성한 국가로, 과거 이베리아에서 그러했듯 유럽에서도 이단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프란시스코에게 이러한 정보는 꼭 자신이 아니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게 제국과의 협상에서 유용한 부분이라도 있나?’

심문이나 추궁보다는 단순한 대화같았고, 오히려 그런 가벼움이 프란시스코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국의 군주에게 무턱대고 질문하려니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까이서 통역해주는 험한 조선인 사내가 의식되어 쉽사리 나서지 못했는데, 그것을 관대한 이국의 군주가 알아 봐주었다.

“총독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까?”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마주한 사람이 간절한 얼굴에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자꾸 눈치만 보는데, 어떻게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세자가 질문을 허락하자 프란시스코는 굶주린 사람이 떨어진 음식을 급하게 주워 먹듯 다급히 물었다.

“제국과의 교섭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제국과의 교섭이라니요?”

“…….”

“그대 이외에 스페인과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조만간 생길 수도 있겠지만요.”

“어어…….”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빙성 없는 말입니다. 총독이 머무르고 있던 환경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희망에 취해 만들어진 헛소리 같습니다.”

프란시스코는 머리에 한 대 맞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세자의 발언을 의심하는 질문이었다. 프란시스코도 이게 예법상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사나운 조선인 사내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허리를 반대로 접어버릴 눈빛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어째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세자에겐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환상을 부정당한 프란시스코는 아니었다.

“…그럼 어째서 저를 갑자기 잘 대해주십니까?”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나와 여러 사람이 그대에게 기대하는 건 미치광이의 중얼거림이 아닙니다.”

세자는 프란시스코를 괴롭힐 의도는 없었지만, 프란시스코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

제국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은 돌풍 맞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프란시스코는 쓰러질 것 같았다.

이미 앉아 있지만 않았다면.

세자가 물었다.

“총독이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그대가 아조를 시험하려다 실종하게 되었는데, 과연 귀방에서는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 * *

세자는 민감한 질문을 이어갔다.

포르모사의 병력은 얼마나 되며, 보유한 군함과 각기의 체급은 어떻게 되는가.

상급자인 필리핀 총독은 어떤 사람이고, 필리핀 총독령의 무장 상태는 어떠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기실, 실방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해두고는 있었다.

그러나 ‘어렴풋’한 상태로는 부족하다.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면 백전 불태라. 잠재적인 적의 사정을 상세하고 면밀하게 파악할수록 대응도 공략도 수월하게 수립할 수 있다.

실방사를 통해 파악해둔 흐릿한 정보들의 효용은 여기에는 있지 않았다.

그 정보들의 가치는 프란시스코의 대답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데 있었다.

세자는 자신이 보고받은 것과 프란시스코의 발언을 대조해나갔다. 그 결론은 이러했다.

‘이자가 대답을 매우 교묘하게 왜곡하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이 아는 건 있는 그대로 답하고 있구나.’

프란시스코는 제멋대로 환상과 기대에 취했다가 다시 냉혹한 현실로 추락했다. 대우가 이전처럼 처참하지는 않았기에 다시 돌아버리지는 않았으나, 정신은 완전히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귀국이 나포한 산 펠리페를 깃발만 바꿔 달고 포르모사를 찾아가도, 포르모사는 함락될 것입니다.”

포르모사에 상주하는 병력은 고작 4개 중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 필리핀 총독령의 거함인 산 펠리페가 적으로 찾아온다면 누구도 저항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으리라.

“필리핀 총독령은 어떻습니까?”

“세바스티안은 호전적인 사람입니다. 열세의 전력에도 주변 술탄국들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으며, 격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찾아가더라도 쉽게 항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피를 봐야만 하는 사람이로군요.”

“혼자만 피를 볼 사람 또한 아닙니다.”

“그가 복수하러 아조를 찾아올까요?”

“…최소한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상기한 대로 세바스티안의 필리핀 총독령은 주변의 술탄국들과 대치하는 중이니까.

여기서 산 펠리페마저 나포해버린 조선을 공략할 정도의 무력을 차출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포르모사를 점령한다면 세바스티안은 어떻게 나올까요.”

“그래도 당장 나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포르모사는 일개 요새에 불과했다.

그리고 포르모사의 총독인 프란시스코와, 그가 빌린 함대는 이미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

세바스티안이 호전적인 인물이긴 하나 이런 부스러기들을 위해 전선을 더 늘릴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세바스티안은 육군과 기병대에서 여러 해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필리핀 총독 이전에는 파나마에서도 총독을 지냈다. 이 정도의 지위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용맹과 무모를 분간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반전하여 술탄국들과의 전쟁이 크게 호전된다면 반드시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향할 군대를 꾸릴 것입니다.”

“아조가 포르모사를 점령하지 않는다면요?”

“마찬가지로 군대를 꾸릴 것입니다.”

황제의 이름을 딴 거함의 상실과 총독의 신변을 빼앗긴 건 제국의 위신만 아니라, 세바스티안 본인의 경력에도 위협이 되는 사건이니까.

총독의 지위를 이용해 당분간은 묻을 수 있겠지만 언제고 본국에서 추궁하고 문책할 수 있기에, 이런 화근을 남기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아조가 포르모사를 점령하지 않더라도 세바스티안은 전황이 호전되면 반드시 복수할 거라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아조가 포르모사를 점령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프란시스코는 답하지 못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총독. 그대의 성실한 답변 덕에 아조는 향방의 폭을 크게 좁힐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대응이 정해져 있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건 매우 쉬우니까.

세자의 감사에 프란시스코는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에게 이건 황제와 제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코에게 추궁을 저항할 심리적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비통할 뿐이었다.

“총독이 너무 침통해 하는 걸 보니, 내가 더 애석하군요.”

“…….”

“이참에 생각을 바꿔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프란시스코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천주天主를 믿는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대는 천주의 신실한 신자입니까?”

세자의 질문에 프란시스코는 밟혀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은 기색으로 답했다.

“명백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저는 주께 봉헌된 신실한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 또한 명백하겠군요. 천주는 전지전능하고, 신자들을 위한 계획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대가 천주의 신실한 신자라면, 아조까지 흘러들어와 이 자리에 있는 것 또한 천주의 계획 아니겠습니까?”

“…….”

프란시스코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옳다고 시인할 수도, 이것이 주의 안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는 진정 신실한 신자였다. 조선에서 신하가 왕의 마음을 함부로 확언할 수 없듯이, 프란시스코 역시 그러했다.

세자가 미소지었다.

“나와의 대화로 이미 그대 나라와 황제를 배신한 당신입니다.”

“….”

“그대가 천주마저 배신하지는 않겠다면, 나는 그대가 믿는 진리를 이 땅에 퍼뜨릴 수 있도록 허락해드리지요.”

프란시스코는 세자의 말을 곧장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진리를 퍼뜨리게 해주겠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포교를 허락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대가 그대의 천주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절대로, 주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대가 천주의 인도로 이 땅에 이르렀으며, 스페인과 펠리페를 배신하게 되었고, 대신 이 나라에 충성하게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빙자하여 나를 매수하겠다는 말입니까?”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거는 것마저 불사한다고 들었습니다.”

“…….”

프란시스코가 주저하는 동안 세자가 너그럽게 물었다.

“이미 배신해버린 그대 나라와 황제를 향한 잔정으로 신앙을 성취할 기회를 저버리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그대가 말한 천주의 계획이 아니라면, 그대는 어째서 나라와 황제를 배신했습니까? 단지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입니까?”

“…….”

“아니면, 이미 배신해버린 나라와 황제를 향한 잔정이 천주를 향한 신앙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까?”

프란시스코는 좌절과 혼란, 자기부정과 유혹의 파도속에서 생각했다.

이자는 진정 신의 사자거나, 아니면 사탄의 현현이라고 말이다.

* * *

방지거와의 대담이 끝나자, 한윤은 방지거를 먼저 내보낸 뒤 세자에게 물었다.

“저하께서는 진정 서학의 설파를 허락하고자 하십니까? 구라파 오랑캐들은 그 간교한 이설을 팔아 각국을 교란하고 침탈을 정당화해왔습니다.”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윤의 격정적인 반응에, 세자는 조금 느리게 답했다.

“단지 말만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

한윤은 입을 닫았고, 세자는 씁쓸한 낯으로 부언했다.

“방지거가 가진 정보의 가치는 막대합니다. 복이모사에 총독을 지내기 이전에는 비율빈(필리핀)에서 공무를 수행했지요.”

세바스티안과 스페인령 필리핀이 조선의 적으로 남아 있는 한 프란시스코는 살려두고 계속 이용하는 게 좋았다.

세자는 그 대가로 천주를 팔았다. 어차피 그는 이설이나 괴력난신은 믿지 않았다. 걸리는 구석이 있다면 오직 오랑캐일지라도 사람을 속였다는 것뿐이다.

“탐탁지는 않으나 이것이 나의 최선입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부왕이 거듭 강조해온 가르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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