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7화
“아이고, 잘 컸다!”
세자가 장계를 보내왔다.
자신이 해적 두령을 직접 신문하여 알아낸 정보와 이에 대한 분석이었다.
포르모사나 필리핀의 상황에 대해서는 나 또한 보고를 받아 대략적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직접 총독을 지낸 자가 가진 정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당장 포르모사를 지키는 스페인 측 병력은 육군 4개 중대에 필리핀에서 빌린 반파한 전투함 한 척뿐이라거나.
필리핀의 세바스티안 총독은 여차하면 복수를 꾀할 게 확실시되니, 조선에서 포르모사를 점령해버리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던가.
‘죄인이 미쳐서 사방에 똥칠을 해놨다는 데도 말이야.’
어떻게 잘 구슬려서 알맹이를 잘 뽑아냈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죄인을 조선에 충성하도록 설득했다는 점이다.
그 죄인이 적국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용하기 좋은 민감한 정보를 많이 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다.
이래서야 세자의 장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잘 컸네, 잘 컸어. 누구 자식이라서 이렇게 똘똘한 거지?”
내 자식…… 이라기보단 인조의 자식이라고 해야겠지.
세자는 살아 있는 견부호자의 사례였다.
“보아라.”
나는 맞은편에 앉은 둘째, 봉림대군에게 세자의 장계를 건넸다.
팔도를 반쯤 유람하고 온 봉림대군은 전보다 덩치가 반 배는 커져 있었다.
얌전히 경치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었고, 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건 봉림대군의 왕족답지 않은 투박하고 거친 손이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다 새겨진 굳은살은 어지간한 무관을 능가할 정도.
봉림대군이 자랑스럽게 말하기를, 진짜 명승은 첩첩산중에 숨어 있으며 그런 장소는 보통 말을 탄 채로는 찾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봉림대군이 간만에 한양으로 귀환한 이유이기도 했다.
‘수행하던 장만이 골병들어서…….’
봉림대군은 우화등선이라도 하려는지 작년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했다.
본인이야 한창때 나이에다, 원체 체력까지 좋으니 잘도 그러고 살았다만 은퇴까지 한 노인인 장만이 산꼭대기 생활을 버티겠는가?
결국, 장만을 위시하여 몇몇 수행원이 이러다간 죽겠다며 배 째고 드러누웠다. 봉림대군이 수 해 만에 한양을 찾아온 연유였다.
“아바마마의 성세에 이르러 사해의 오랑캐가 모두 토벌되니, 진정 조선이 당금의 치세에서 천자국이 되려나 보옵니다.”
봉림대군이 투박한 손으로 장계를 받쳐들었다.
나는 둘째가 바친 장계를 가져오며 답했다.
“남쪽의 난쟁이 오랑캐들이 버젓이 명맥을 유지하고, 구라파의 홍모이도 서반아만 있는 게 아닌데 무슨 오랑캐 토벌이냐.”
둘째의 빈말이 과했다. 그런 지적에도, 봉림대군은 반쯤 신선이 되었는지 능글맞은 미소로 답했다.
“그런 잔당들이야 길어도 형의 치세에는 정리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나 또한 그렇기를 바라고는 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봉림대군은 제가 보장이라도 하겠다는 양 확신했다.
“그래, 둘째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은 좋구나. 한양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마마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픈 마음입니다.”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급하구나.”
“어렵게 백두산을 등지고 나왔으니, 이번에는 지리산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대단하구나.”
오늘날의 첩첩산중은 그야말로 야생 자체다.
조선의 명물인 호랑이는 물론이고 표범이나 곰마저 서식하고 있으니까.
이런 맹수들은 사람이 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직접 찾아와서 해를 끼치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들리는 소문이 어디의 누군가가 호랑이에 물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첩첩산중을 찾아가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만류하기엔, 봉림대군은 잘 살아 있는 것으로 자신의 생존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백두산 이전에는 강원도의 태백산을 다녀온 봉림대군이다.
이제 지리산을 찾아간다고 특별히 더 위험해진다고는 할 수 없겠지.
얼핏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곰과 맨손으로 싸워 이겼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봉림대군이 강해진 것도, 여차하면 맹수들과 대적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산행이 급하다니 억지로 붙들지는 않으마. 대신, 떠나기 전에 어머니와 셋째는 보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
중전 또한 봉림대군을 못 본 지 몇 년이 되었고, 그건 셋째 인평대군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사옵니다. 셋째는 어디에서 지내고 있습니까?”
“네가 한양을 떠난 뒤에 경복궁의 관상대를 중건했다.”
속으로 조선스웹 작전이라 명명한 이 사업으로 관상대는 천문대로서 중건됐다.
그리고 선조가 조져놓은 역법을 고쳤고, 만리경이라는 선진 관측기구를 개발해 천제의 운행을 규명하고 정체되어 있었던 우주관을 진전시켰으며, 명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조선이 가진 기술력의 우위를 과시했다.
조선스웹 작전으로 실용적, 정치적 이익은 다 취한 셈인데 인평대군은 여전히 천문대에 남아 그곳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매양 느긋하고 능글맞았던 봉림대군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셋째가 관상감의 직사職事라도 맡은 것입니까?”
놀랄 만했다.
세자 이외의 종친이 공무를 수행하는 건, 성종成宗 재위 초반 영의정까지 지낸 구성군龜成君 이준李浚의 숙청과 함께 도입된 종친사환금지법으로 막혔으니까.
그런데도 봉림대군이 혹시나, 하고 물어오는 건 내가 선왕인 선조를 대놓고 병신이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왕이어서겠지.
“정식으로 직사를 맡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관상감원들의 일을 돕고는 있구나.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인평대군이 반쯤은 관상감 영사나 다름없다고 해야겠지.”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흥, 그러는 둘째야말로 한양 밖을 싸돌아다니는 건 되고?”
봉림대군은 영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닫았다.
파격적이기도 따지자면 인평대군의 행보보다는 봉림대군이 받은 특혜가 압도적으로 파격적이니까.
조선이 건국된 이래 어느 왕자가 도성 밖을 자유롭게 나돌아다닐 수 있었나.
인평대군 정도라면 아비로서는 오히려 고맙고 미안했다.
바로 손위 형인 봉림대군은 한양을 떠나 팔도를 종횡무진하는 자유를 얻었지만, 본인마저 그런 특혜를 받는 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라도 인평대군의 거취나마 더더욱 강제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평대군이 천문대에서 그냥 공간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셋째가 제법 똑똑하더라. 우리 봉림대군이 백두산 천지에서 수양하느라 소문을 들었을지는 모르겠다만, 인평대군이 성취한 게 작지 않아.”
천문대를 통해서 얻은 실리적인 이익은 거의 인평대군을 거쳐서 이루어졌으니까.
역법을 회복하고 개선하며 우주관을 진전시킨 건 물론이고, 전임 영의정인 이원익과는 합작하여 천문경과 천문판까지 개발해 냈다.
천문경과 천문판은 밤하늘을 관측하고 절기에 따른 별자리를 대조할 수 있게 하는 기구들이다.
자신의 위치를 지상의 정보로는 유추할 수 없는 망망대해의 선원들에게 이 두 가지 물품은 그야말로 구명줄과 마찬가지였고, 범선의 원양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비기이기도 했다.
“아조가 바다 건너인 산동 반도를 개척한 데 이어 오늘날까지 긴밀하게 연계하며 유지할 수 있는 건 인평대군의 공이 9할쯤 된다고 봐야지.”
“그 정도이옵니까?”
“그 정도다.”
나의 확언에 봉림대군은 드는 생각이 있었던지, 금세 가시방석에 앉은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느냐. 이제 와 눈치라도 보는 거냐?”
책망하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가볍게 물어보니, 봉림대군이 끙끙 앓았다.
“형도 동생도 모두 큰 공을 세워 아바마마의 성세를 더욱 빛냈는데 소자만 유람을 다녔으니 민망합니다.”
“이제 와서 붙들어놓으면 얌전히 지낼 수는 있고?”
“……그건 아니옵니다.”
봉림대군이 실소하면서 솔직하게 답했다.
거동의 자유를 이토록 맛보았는데, 한양 전체는커녕 서궐과 천문대에서 살아가는 세자와 인평대군의 흉내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네게 세자와 셋째의 이야기를 해준 건 형제가 어떻게 사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이지,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말만으로는 진심이 닿지 않을 듯해, 나는 용상에서 일어나 무릎 꿇은 둘째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투박한 손을 잡고서 말했다.
“나는 네가 즐겁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운명을 빼앗긴 것을 아쉬워하지 않기를 원한다.
“물론, 이 아비가 어째서 너에게만 이런 편의를 봐주는 건지 스스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그러하옵니다.”
봉림대군이 조금은 침울하게 말했다. 이례적인 특혜와 자유다. 그런데 당사자는 왜 이러한 수혜를 입는지 알지 못한다.
본인이 그저 저 즐거운 맛에만 사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봉림대군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역사에서는 인조가 망쳐놓은 조선을 자신의 치세 전체에 걸쳐서 회복시켜 낸 봉림대군이다.
분명 왕재가 있었고, 이유 모를 특혜를 그저 즐기기만 할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봉림대군의 손가락 마디마다 박힌 굳은살을 매만졌다.
“지금 생활은 편하느냐?”
“더없이 편합니다.”
“세자나 인평대군의 삶이 부러우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덕이 부족하여서 차마 사정을 다 이르지는 못하겠구나.”
만약 다른 역사에서 자신은 왕위를 이었고, 내가 그러한 역사를 바꿔 세자에게 왕위를 주기로 했으니 미안한 마음에 특혜를 주는 것이라 이실직고한다면, 과연 봉림대군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설령 받아들이더라도, 봉림대군에게 형님인 세자가 왕위를 잇는 건 굳이 자신에게 양해까지 구할 일이 아니라고 여길 터였다.
천기누설하더라도 봉림대군에게는 여전히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셈이다.
오히려, 알려주지 않는 것 이상으로.
“다만 이 아비가 아무런 이유 없이 너에게 특혜를 내려준 것이 아님을 믿어주겠느냐?”
봉림대군이 어렵사리 답했다.
“……예.”
나는 봉림대군의 손을 감싸쥐고서 말했다.
“네가 크게 변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이 아비가 적잖이 놀라긴 했다만, 그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더없이 즐거우며 다른 삶이 부럽지 않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오직 그것만이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
봉림대군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말해보아라.”
“소자도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봉림대군이 강하게 손을 맞잡아오며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청했다.
자신 역시 형제처럼 공을 세워야, 편한 마음으로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이 봉림대군이 원하는 것이라면 들어주어야겠지.
“알았다. 네게 어울리는 사명을 내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