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8화
봉림대군은 첩첩산중을 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비밀스러운 장소를 많이 알고 있었다.
범부들의 시야와 손길이 닿기 어렵다는 건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다.
“너에게 숭고한 사명을 내릴까 하는데, 반대로 공로를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너를 옥죄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소자의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면, 되려 온전히 이생을 즐길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래. 알았다.”
나는 봉림대군의 투박한 손을 쓸어내리고는 일렀다.
“봉림대군은 한양 한복판에 궁궐 못지않은 커다란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보았사옵니다.”
“그것은 도서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식을 한곳에 모아, 학문을 구하는 여러 사람이 쉽게 지식을 찾고 수학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는 공간이지.”
“실로 밝고 아름다운 사업이옵니다.”
“내 생각은 아니었다. 도서관의 건립을 최초로 건의한 건 현 영의정인 이상의였지.”
이상의는 먼저 내게 좌의정 남이공의 부탁을 대신 전했다. 요즘 책 구하기가 어려우니 몇 권만 따로 챙겨달라는 것이었다.
교묘한 밑밥 깔기였다.
이상의는 뒤이어 아뢰기를, 좌의정마저 이토록 책 구하기가 어려운데 민간에서는 오죽하겠느냐고 했으니까.
“썩 내키지는 않더구나. 내수사의 큰 수입 중 하나가 책을 발행하는 것이었거든.”
책을 무상으로 볼 수 있는 도서관은 출판 수입에 장애가 된다.
21세기와 달리, 조선 시대에 책을 필요하는 곳이 도서관만은 아니니까.
“하오나, 영의정의 뜻을 가납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이 많은 사람이거든.”
특별히 드러난 업적은 없으나, 꼭 그런 것만이 공로는 아니다.
즉위 이래 천하는 조선 안팎으로 빠르고 급격하게 변해왔다. 격류와 같은 이 시대에서는 휘말려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이상의는 자신의 천수天壽마저 능가하며 내가 즉위한 이래 지금까지 의정부에서 굳건하게 중심을 지켜왔다.
오늘날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로서 백관을 대표하고 그들 사이를 중재하며, 왕권을 떠받들고 있다.
굳이 송곳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와야만 인재는 아니다.
“대들보와 기둥, 주춧돌 없이는 건물 역시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조선이라는 나라를 묵묵하게 떠받쳐온 공로는 말도 다 표현하기 어렵지……. 그렇다면, 치하 역시 그래야 하는 법이야.”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 더 오를 자리가 없는 이상의에게 승진은 무의미하다.
공신으로 삼는 건, 내가 애초에 그런 식의 포상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명분 또한 부족하다.
대신 나는 내수사의 잠재적인 수익을 희생했고, 그의 뜻대로 국가의 공공을 증진했으며, 그 뜻이 이상의에게서 발원했음을 만민에게 드러내고자 도서관에 그의 호를 달았다.
그러니 도서관의 정식 명칭은 ‘소릉少陵 도서관’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앞에 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바로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이 아비가 수수께끼를 내어보고 싶구나. 이 나라의 지식 상당분을 한 곳뿐인 도서관에 모아둔다면 장차 어떤 위험이 있겠느냐?”
봉림대군에게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었는지, 둘째는 짧은 탄식과 함께 답했다.
“화재라도 나서 도서관이 상실된다면, 많은 지식이 일거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
미래와 달리 오늘날의 지식은 디지털화하여 물리적, 비물리적으로 저장할 수도, 각처에 세워진 무수한 도서관마다 공장에서 찍어낸 사본들을 퍼뜨릴 수도 없다.
인쇄기의 개발로 인쇄기술이 크게 증진했다고는 하나 한 장, 한 장 종이에 먹물을 찍어내는 방식으로는 많아야 한 번에 수백 권의 책을 복제하는 게 전부다.
“인쇄소에서 출판한 도서 대부분은 민간으로 흩어져 시간과 다양한 사건 사고를 통해 소실될 테고, 기록을 통한 추적과 정기적인 관리를 보장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한 곳뿐인 도서관이 전부지.”
지식의 보호와 보전을 생각하면 매우 위태로운 셈이다.
“몇몇 관청에 장서각藏書閣이 있어 중요한 기록과 공문서, 일부 서적을 보관하고는 있지만, 양이 많지는 않아.”
그리고 장서각에서 보관하는 중요 서적들은 틈틈이 참고하고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 지식을 보호하는 용도를 겸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나는 인쇄소의 여타 도서들 또한 실록처럼 여분을 복제해서 비처에 숨겨두었으면 하는구나.”
“비용과 품이 많이 들 것입니다.”
“지식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단순히 지식의 가치를 높게 여겨서만은 아니었다.
조선은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중에서도 실록은 특히 우대하여서 춘추관만 아니라 팔도에도 사본을 만들어 흩뿌려 놓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임진왜란 때는 유일하게 전주 사고본만이 겨우 살아남았고, 광해군이 다시 복제하여 여러 산중에 숨겨놓았으나 병자호란과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거치면서 특정 사본들은 완전히 소실되어버렸다.
‘역사까지 바뀌어버렸으니 이 역사의 후대에는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
그렇게 조선의 지식과 기록이 완전히 소실 당한다면 조선의 문명 역시 퇴행하게 된다.
그 여파는 족히 수백 년에도 달할 수 있다.
일말의 과장 없이 말이다.
‘고대 지식의 보고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는 전근대에 이르러서야 재발견된 지식을 이미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시간과 전쟁, 종교와 재난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보관하고 있던 방대한 지식과 함께 완전히 유실되어버렸다.
그 여파로 인류는 기원전에 이미 발견한 것들을 천 년, 이천 년이 지나서야 다시금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어떤 지식은 영원히 재발견할 수 없기도 하지.’
조선은 그들이 멸망시킨 고려의 역사를 자신들 것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비록 춘추관에서는 계속 보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유일한 고려실록이었고 결국 임진왜란 때 춘추관 자체와 함께 불타 사라지고야 말았다.
이런 기록은 수백, 수천 년이 흐르더라도 복구할 수 없다. 시간을 역행하는 기술이라도 개발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러니 지식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수 개의 사본에도 완전히 소실할 뻔한 실록은 물론이고, 도서관에서 비축할 각종 학문과 지식 그리고 기록과 서적들 역시 사본을 만들어 비처에서 보호한다.
이것이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열망이었다.
“때마침 봉림대군이 첩첩산중에 숨어 있는 비처를 알고,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자 하니 이 아비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
“마땅히 수행하고자 하옵니다.”
봉림대군이 각오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따로 빼두어 보관 중인 책들이 많다. 지리산에 올라 지식을 숨겨두기 좋은 비처를 발견하거든 가까운 곳에서 내수사 사람을 찾거라.”
“예.”
봉림대군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지식의 보관은 얼마나 은밀하게 이루어지옵니까? 틈틈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다면 습기가 슬어 곰팡이가 피거나, 혹은 야생동물에 의해 손상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산에 숨겨놓은 실록 사본들 역시 포쇄曝?라는, 3년마다 볕에 말리는 작업을 거친다.
3년이라는 주기가 제법 넉넉하기는 하지만 비축된 도서의 분량이 많아질수록 포쇄의 고됨은 크게 늘어날 터.
당연히 봉림대군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고생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식을 훼손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잘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존재 자체가 잊힌다면 그 지식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내수사에서는 불가피하게 비처 장서각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으니 관리 역시 내수사에서도 하는 게 맞다.”
다만 비처에 장서각을 설립하고, 초창기 관리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는 봉림대군이 주도권을 가지는 게 좋겠지.
“당분간은 네가 전담하거라.”
“소자가…… 내수사의 사람을 부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내수사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는다면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양에만 있는 이 아비는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받들겠사옵니다.”
“이제, 마음은 좀 편해졌느냐?”
“예.”
봉림대군이 환하게 웃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와 셋째는 보고 가고.”
“알겠사옵니다. 강녕 무탈하시옵소서, 아바마마.”
봉림대군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인사가 극진한 걸 보아 당분간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기야, 당분간은 외지를 다니느라 더 바빠지겠지.
그것을 본인이 원하는 바라니, 아비로서는 걱정이 되지만 제가 즐겁기만 하다면 이 아비 역시 더 바랄 게 없었다.
모든 아기 새는 언젠가 둥지를 벗어나는 법이고, 홀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세자는 서궐로, 막내는 천문대로.
둘째 봉림대군은 지리산으로…….
* * *
“봉림대군이 왔다가 갔다는 말입니까?”
서궐에서 뒤늦게 소식을 접한 세자가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정식으로 전하를 배알한 게 아니라, 비밀리에 궐을 오간 탓에 파악이 늦었사옵니다.”
“굳이 번거롭게 기밀을 유지해가면서 부왕을 뵈다니? ……하긴, 별수 없겠구나.”
봉림대군은 한양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된 이래 왕가와는 크게 멀어지게 됐다.
봉림대군은 부왕의 차자次子로, 세자 바로 다음의 왕위 계승 서열을 가진 탓이다.
이러한 인물이 왕가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외부에서 조력자를 모집하고 다닌다면 세자의 승계에 있어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올 터.
그래서 봉림대군이 한양을 나서기 전, 부왕께서는 세자 자신과 둘째 앞에서 선원록璿源錄에서의 배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특혜를 허락하는 대신 왕실 족보에서 축출하고 대군의 특혜를 몰수함으로써 화근을 미리 없애려 하신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봉림대군의 존재는 왕실의 질서와 안녕이라는 관점에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분명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지 자체는 충분했다.
부왕이나 세자 자신에게는 사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부왕도 비밀리에 뵙고, 내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인가.’
봉림대군이 사적으로 부왕이나 세자 자신에게 불편한 감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
하지만 국가의 질서와 왕실의 안녕이라는 막중한 가치 앞에서 부자와 형제 사이의 우애는 사사로운 것일 따름이다.
“애석하구나.”
세자의 감상에, 그를 수행하는 동궁내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일개 신하인 그가 왕가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
대신, 본궁本宮에서 가져온 성지聖旨를 전달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글입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손으로 공손하게 왕명을 받아들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하나는 봉림대군에게 관한 것이었다.
국가의 지식과 기록을 보관할 추가 장서각의 건립과 감독을 봉림대군에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사소하게 여겨 넘어갈 수 있음에도 내게 밝히신다는 건, 아바마마께서도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시겠다는 뜻이겠지.’
봉림대군이 어떤 임무와 역할을 맡았는지 미리 알고 있어야, 혹 봉림대군이 변심할 경우의 대비책을 세우기 쉬우니까.
다른 하나는 세자 역시, 각오했던 것이었다.
‘아바마마께서 복이모사를 평정하고자 하시는구나.’
그리고 원정군의 작전권을 세자 자신에게 맡기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