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9화
어좌 앞에 중신들이 자리했다.
저마다 낯에 숨기고 꺼리는 기색을 보아, 다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있는 듯했는데 막상 거론되지는 않았다.
‘봉림대군에 관한 건가.’
봉림대군이 장만의 은퇴를 위해 한양을 방문하기는 했으나, 왕자가 방문했다고 하여 공식적인 행사가 갖춰지지는 않았다.
봉림대군은 왕가의 살아 있는 역린.
후계자가 편집적인 인물이라면, 부왕인 내가 눈을 감았을 때 칼부터 빼들고 볼 존재다.
그러니 공식적인 자리야 당연히 만들어줄 수 없다.
모두의 눈앞에서 대놓고 한양을 활보하며 정궁正宮을 출입한들, 역시 없는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신하들도 쉬이 입을 열지는 못하는 거겠지.’
왕이 먼저 거론하지 않는다면 부외자이자 신하에 불과한 그들이 먼저 입을 열 수는 없는 주제였다.
‘이런 걸 가지고 질질 끈다면 피차 불편해질 따름이다. 여기서부터 화제를 돌려줘야겠구나.’
나는 제신의 이목을 환기하고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최근 서반아西班牙에서 군선을 화란和蘭선으로 위장하여 아조의 선단을 공격하고, 나아가 거함까지 끌고 온 것은 경들 모두 알 것입니다.”
봉림대군의 건에 관해서 여러모로 호기심이 많았을 중신이겠으나, 서반아가 거론되자 곧장 귀를 기울이고 눈을 밝혔다.
어쩌면 외침의 단초일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세자가 알아 온 정보에 따르면 서반아는 구라파歐羅巴 말단에 자리 잡은 나라로, 본디 선주하던 족속을 몰아내고 전쟁과 정복을 거듭하며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이귀가 평했다.
“그들이 아조와 격식을 나누기도 전에 사악한 계략부터 걸어오고, 또 무고한 생명을 거리낌없이 공격해 대는 건 그런 천박한 태생과 연관이 없이 않을 것입니다!”
이귀의 말에 몇몇 중신이 이래서 오랑캐는 안 된다며 찬동했다.
그런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건 이상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긴 하지만…….
‘정말로 이 시대의 오랑캐들은 상종 못 할 것들이 맞으니까.’
스페인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영국 등 극동까지 진출한 국가 중 조선이 연루되어서 좋을 세력은 하나도 없다.
조선에서는 저들만이 문명이라는 선민사상에 도취하였다면, 서양 강국들은 여기에다 종교적인 위해성마저 갖추었으니까.
‘경계하고 멀리하는 게 맞지.’
단지, 모든 불운과 악재가 다 그러하듯 우리만 조심한다고 저들이 안 찾아오는 게 아닐 따름이다.
“또한, 세자가 알아 온 바에 따르면 서반아는 유구국流球國 남쪽 너머인 비율빈比律賓에 진출하여 각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이에 이귀가 재차 평했다.
“그들의 야만스런 호전성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옵니다.”
가는 곳마다 싸움과 전쟁이 따르는 것은.
게다가 스페인은 필리핀에서는 외부의 세력이기까지 하다.
밖에서 굴러온 돌이 화평이나 조화는 생각지도 않고 사방을 멸시하며 사방에 시비를 걸어댄다면, 이게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이귀의 말마따나.
그러나 서반아의 위험성은 저들의 야만하고 호전적인 습성에만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서반아는 백 년 가까지 비율빈의 열국과 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 오랑캐들이 만만치 않은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중신들이 쓰게 침음했다.
“더욱이 비율빈은 구라파 말단에 위치한 서반아에 있어 지구의 절반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입니다. 이 같은 원경遠境까지 세력을 뻗쳐 그곳에 선주한 열국 모두와 전쟁을 지속했다는 건, 더더욱 서반아를 얕봐서는 안 된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토르데시아스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세상을 반분하여 지배하기로 약조한 놈들이다.
현재는 그런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맺은 상태이기까지 하고.
비록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와의 독립 전쟁, 그리고 포르투갈 권력자들의 축적된 불만으로 안에서부터 무너져가곤 있다지만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가는 법.
명나라가 연이은 암군의 치세로 휘청인 지 꼬박 한 세기가 지나서야, 새롭게 발흥한 외부 세력에 의해 멸망했다는 건 시사하는 점이 많다.
당장의 스페인 역시 그러한 존재였다.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모두 이탈한 뒤에도, 필리핀에서는 2세기나 더 전쟁을 이어가지…….’
동방의 불청객 스페인은 3대가 아니라 3세기간 안 망하는 부자인 것이다.
중신들 역시, 그러한 사실이 새삼 와닿았는지 저마다 탄식을 토해냈다.
“……으음.”
“끄응.”
“허어어!”
나는 난처해하는 중신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옛 병법이 이르기를 지피지기하면 백전하여도 불태라고 하였습니다. 저들 서반아 오랑캐들의 저력을 우리가 모르고서 대응하는 것보다야, 알고서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대처하는 게 더 이롭지 않겠습니까?”
“실로 그러하옵니다.”
병조판서 정충신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저들 서반아가 무력은 뛰어나다곤 하나, 본질은 문명을 거부하고 천지 사방과 다투는 오랑캐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러한 족속들은 예로부터 무수히 발흥하고 이 땅의 문명 또한 위협해 왔으나 끝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충신이 자답했다.
“몽고와 여진, 왜 모두 파죽지세 같았던 발흥이 꺾이자 다시 그들의 미개하고 지저분한 소굴로 쫓겨나, 한심한 여생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오랑캐들과 많이 엮인 당사자이기 때문일까. 정충신은 그들의 현실을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왜는 아직 기세등등하지만.’
마찬가지로 당한 게 많은 중신들은 옳다며 호쾌하게 긍정했다.
정충신이 덧붙였다.
“서반아라고 어찌 그들과 다르겠습니까? 잠깐의 무력을 발휘하여 아조를 위협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이 없는 오랑캐들은 결국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아조의 역할은 그러한 진리가 빠르게 실현되도록, 침착하면서도 날카롭게 서반아를 대처하는 것입니다.”
정충신의 결론은 스페인이 당장은 기세등등하다고 두려워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병조판서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고래古來에서 다 그랬듯, 오랑캐는 꺾이기 마련이고 아조는 항상 이겨내 왔지요.”
중신들이 벅찬 얼굴로 끄덕였다.
“다만 대처를 잘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입을 피해가 달라집니다. 이 땅에서 벌어진 몇몇 전쟁은 무고한 양민들의 삶을 심각하게 훼손했지요.”
천하의 몽골 제국조차 한반도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지만, 조정이 강화도에 웅거하며 명맥만 유지하는 동안 삼한의 땅은 몽골과 왜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비슷하면서 가까운 사례로는 임진왜란이 있다.
조선이 끝내 왜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조선의 행정과 백성들의 나라를 향한 신용은 파탄이 나버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와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면서, 오랑캐에게 대처하느냐입니다. 마침 세자가 알아 온 정보가 더 있습니다.”
중신들이 다시금 이목을 집중했다.
“비율빈의 서반아는 이른대로 주변 열국과 전쟁 중이며, 그래서 한 세기간 싸움을 지속해온 뛰어난 무력에도 쉽사리 아조를 다시금 침탈하지는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하들이 금세 들떠 무어라 나서고자 했지만, 나는 손바닥을 보이고서 마저 일렀다.
“서반아는 명나라의 남쪽 바다에 있는 섬 복이모사福爾摩沙까지 진출하여 북단에 요새를 지었으며, 선船 비이패費利佩 또한 이곳에서 출항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적의 전진기지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한 줌에 불과하여, 소수만으로 능히 점령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포로로 잡힌 포르모사 총독이 자기 입으로 시인했다고 한다.
거점인 산 살바도르가 요새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수비군의 숫자는 고작 4개 중대.
인원만 따지자면 300명이 채 안 된다.
포르모사는 조선을 적대한 스페이 전진기지로 경유할 수 있는 거점인데, 이토록 방위가 약하다면 역으로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깃발을 꽂고 우리의 전진기지로 삼는 게 맞지 않을까?
‘때마침 스페인은 필리핀의 열국들과 전쟁하기 바쁜데, 심지어는 우리가 나포한 산 펠리페마저 필리핀 총독령에서 한시적으로 빌려준 것에 불과하다.’
포르모사에 완전히 내어준 게 아닌, 포함외교를 위한 일시적인 대절.
그만큼 필리핀 총독령의 사정이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조선이 포르모사를 장악하더라도 스페인은 대응할 수 없다. 손 놓고 봐야만 하는 것이다.
사정이 나아진다면 필리핀 총독부에서는 반드시 보복을 시도할 거라 했지만…… 글쎄?
나는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부가 주변의 이슬람 열국을 두 세기나 더 오랫동안 몰아내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쉽게 말해서, 포르모사는 빈집이다.’
그리고 난 이 빈집털이 계획을 정식으로 착수하고, 이를 세자에게 일임할 생각이다.
극도로 혼란하여 열국이 각자의 야만성을 과시하며 다투는 17세기.
이러한 시대에 일국을 이끄는 군주라면 마땅히 군재를 지니고, 이를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때마침 시비를 걸어온 포르모사는 그 군재를 시험하고 증진할 좋은 기회였다.
‘겸사겸사 세자에게 공도 밀어주고.’
이러한 나의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신들은 보복의 실현 가능성과 점령지의 장기 유지 가능성을 두고 왈가왈부 떠들었다.
“복이모사는 남명 너머에 있는 섬입니다. 과연 그런 곳을 점령하더라도, 오랑캐의 토벌 이상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랑캐 토벌만으로 족하지요!”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들의 소굴에 불을 놓고 기둥을 부수어 잠시 조용하게 만들 순 있겠지만, 더 많은 독기를 품고서 보복을 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망상 따위 실현할 수 없도록 무자비하게 다스려야지요!”
이귀가 다 죽여버리자는 식으로 주장하니, 남이공이 반대로 말했다.
“섬멸한다면 화근의 말단만 잘라놓고서 안심하자는 격이요, 오히려 복이모사의 오랑캐들을 잘 회유하여 그들을 번호藩胡로 삼아 서반아가 누리던 이점을 고스란히 차지한다면 실익이 배가되지 않겠습니까?”
“말단일지라도 화근은 화근이요! 굳이 생명을 남겨두어 후대의 우환으로 삼고자하시외까!”
신하들은 다시금 웅성거리며 저마다 의견을 쏟아냈다.
그것이 갈수록 격화하여, 끝내는 용상에서도 귀가 따갑다고 느껴질 즈음에 영의정인 이상의가 나섰다.
“자, 자!”
이상의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소란을 저지하자 중신들이 쓰게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서반아와 복이모사의 평정이 가벼운 일이 아님은 알고 있으나, 어전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 되겠습니까?”
“…….”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 사람은 이걸 쉽게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이귀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뭡니까?”
의견이 다 천태만상인데 어떻게 쉽게 해결한다는 말인가.
“성상께서 누차 하교하셨듯이 복이모사와 비율빈의 사정은 모두 세자가 알아낸 것입니다.”
“…….”
“과연 이 문제에 있어 세자만 한 전문가가 있겠습니까?”
이상의가 느긋하게 중신들을 둘러보니, 다들 이견이 없었다.
과연 왕은 누차 세자의 공로를 강조했다.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기란, 오래 녹을 먹은 그들에겐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제공에게 다 이견이 없고, 전하께서도 윤허해 주신다면, 이 문제는 세자에게 일임함이 어떻겠습니까?”
역시나 이견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