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0화
이상의가 제법 눈치를 보아준 덕으로, 신하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세자에게 포르모사의 처우를 일임하는 데 동의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뜻대로 하는 데 동의했다.
‘내가 세자를 밀어줄 요량으로 말을 꺼냈다는 건 다들 알았고, 명확한 대안은 없는데 여차해서 일이 잘 안 풀리기라도 한다면 손해 볼 건 없으니…….’
내가 생각해도 오늘날의 왕권은 마천루의 꼭대기에 올랐다.
더 오를 데도 없다마는, 신하들로서는 꽤 빈정 상할 상황.
어느 정도냐면 실방사라는 왕의 첩보 조직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심지어는 전통의 삼사三司와도 기싸움을 하는 판국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불만을 품은 사람이야 많겠지만, 그래서 어쩌겠냐는 거다. 나는 업적으로 봤을 때 걸고넘어질 구석이 없으니까. 트집도 못 잡는데 경쟁자로 제시할 대상도 없고, 대안마저 없다.
그러면 왕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내가 넘어져서 코가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나는 신하들은 물론, 세자보다도 포르모사나 스페인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
제신들 딴에야 만에 하나, 라고 생각할 테지만 스페인의 현실과 미래를 나는 나로서는 그런 만에 하나 따윈 없다.
그저 세자가 포르모사 정벌과 정복에 성공할 따름이다.
‘변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역사의 변화 자체가 변수가 되었듯, 조선이 포르모사를 점령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가까운 변수로는 포르모사 남단을 지배하는 네덜란드가 있는데, 그 점에서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들어가는 셈이다.
이놈들은 스페인과는 독립 전쟁을 벌이는 철천지원수니까.
그런 스페인을 몰아내고 대신 자리를 잡았으며, 더 남쪽인 필리핀에서는 아직 스페인의 세력이 건재하니 네덜란드와는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들어갈 수도 있다.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긴 한데…….’
실방사가 이미 남경南京과 일대 요충지에 조선유상 지부를 차려놓고 수입을 올리는 중이니까.
다 망해가는 남명에 빨대를 꽂았다는 점에서는 조선이 네덜란드와 경쟁하는 관계라고는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네덜란드가 일대 해역을 저들만의 영역으로 여겨, 조선이 가까운 바다까지 진출한 게 너무 아니꼬워서 반드시 지랄을 해야만 되겠다, 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극단적인 경우를 현시점에서 걱정하는 건 적절하지 않지.’
세자가 나의 의향을 이미 알고 있으니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나, 길일吉日을 맞춰 부월斧鉞을 내리기로 했다.
필요한 절차이긴 하다.
정치적으로 세자의 군령권을 공인하는 행사니까.
“세자가…….”
중전이 말했다.
“전장을 찾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따로 알리지 않았음에도 중전이 편전으로 찾아와 따졌다. 내명부內命婦도 눈과 귀는 있다는 거겠지.
“내가 세자가 상하기를 바라여서 군권을 맡기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인 법이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법이지요.”
“…….”
“세자는 강해져야만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저 성심聖心으로 선정만 펼친다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아요. 중전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선조 때는 왜가 침입했고, 나 때는 여진이 침입했다.
다른 역사와는 다르게 나는 여진족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속박의 굴레를 씌웠으나, 그럼에도 조선이 항구적인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조선에서 먼저 실리를 얻고자 싸움터를 찾아간 적도 있지만, 외부에서도 조선의 상승한 명성과 입지 그리고 부에 현혹되어 찾아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포나루에서 드문드문 보인다는 홍모이나 왜인 같은 경우라면 오히려 양반이다.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부처럼 대뜸 계략부터 걸어오고, 전함을 위시하여 협박하는 세력도 있으니까.
“복이모사는 물론, 그 너머 비율빈에서도 서반아를 물리친들 전쟁과 분쟁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네덜란드와 일본, 나아가서는 영국과 러시아 등 여러 세력이 뻗쳐올 테니까.
당장은 눌러놓은 후금이나 이들에게 패퇴하여 물러난 순나라, 아직은 먼 나리인 서나라 또한 훗날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먼 미래, 드넓은 북아메리카 중부를 홀로 차지하고서 명실상부하게 강국의 반열로 오를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대양을 두고 떨어진 구대륙에서의 대전쟁은 외면하며, 대신 뒤에서 물자만 팔아먹으면서 이익을 누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끝내 이 나라는 두 차례나 거듭 벌어진 구대륙의 대전쟁으로 불려와 수많은 인명을 버려야만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고립주의는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야만의 시대에서 진정한 평화와 고립인 ‘내’가 아니라 ‘네’가 바라야 한다.
그것을 내가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중전이 원치 않으신다고 세자를 영원히 안락한 곳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자 또한, 언젠가는 천수를 다하겠지요. 그전에는 우리가 천수를 다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세자가 자립하고 자신을 지키며,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무력과 실력을 갖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자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삼한에서 이어지고, 열성께서 물려주신 이 땅과 백성들 또한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나라고 이러한 선택이 즐겁지는 않습니다, 중전.”
단지 시대가 이럴 따름이다. 거기에 유감을 가질 수 있을지언정,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 왕이기 때문이다.
세자 또한 그런 왕이 될 존재.
“역경과 고난이 있다고 대신 치워줄 수 없으며, 대신 짊어줄 수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 모든 걸 직접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용상에서 일어나 중전의 곁으로 가 앉았다.
중전의 손은 모진 세월에 더 가늘어진 채였다. 나는 그런 중전의 손을 감싸 쥐고서 말했다.
“세자에게는 중전의 우려를 전해주겠습니다. 나 또한, 세자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이러한 마음을 안다면 세자도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겠지요.”
“…….”
중전은 눈을 감았다가, 한참이나 그 상태로 뜸을 들이고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말씀이 옳지요. 가혹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나는 중전이기 이전에 어머니입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중전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중전이 말했다.
“……그럼, 세자에게는 전하께서 잘 말씀해주실 것이라 알고 있겠습니다.”
“예.”
“늦은 시각에 심려 끼쳤습니다.”
“아니에요. 걱정은 쌓아두면 독이 되는 법이지요. 이렇게 찾아와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중전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는지 입술을 연신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손을 빼내며 일어났다.
나 역시 뒤따라 일어나 중전을 배웅했다.
경운궁은 본디 행궁에 불과했던 궁궐이고, 편전에서 침전까지의 거리는 지척에 불과했다.
만류하는 중전을 굳이 침전까지 데려다주었다.
“날이 춥습니다. 속히 안으로 듭시옵소서.”
“이런. 나는 편전에서 공무만 보는 것이 갑갑하여 억지로 따라 나온 것인데, 중궁께서 매몰차게 발길을 서두르시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앓는 소리를 내자 중전이 희미하게 웃었다.
“혹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천천히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때는 내가 갑자기 길을 잃어, 대전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모른 척, 작정하고 산책하겠다는 말에 중전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는 예를 올렸다.
나는 물러나는 중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돌렸다.
그리고 골목을 돈 뒤에는 발길을 재촉했다. 원정을 앞둔지라 일감이 많았다.
* * *
“세자야.”
길일에 이르러 행사를 치렀다.
“예, 아바마마.”
부월을 쥔 세자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후계자에게 일부나마 군권이 주어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후대의 치세에 장애가 될 수 있을 민씨 가문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태종조차, 자신이 양위하여 상왕으로 물러나고도 정작 군권만은 주지 않았다.
전근대의 시대에 왕의 권력을 증명하고 보호하는 수단이 바로 군권이었으니까.
이를 모를 세자가 아니었다.
“복이모사의 평정은 순전히 세자의 보고에 따른 결정이었다.”
“망극하옵니다.”
“그러니, 만약 전황을 보아 평정이 여의치 않는다면 군사를 거두고 물러나도 좋다.”
“…….”
“알겠느냐?”
“예, 아바마마.”
“네 어머니가 많이 걱정하더구나. 이 아비가 시킨 일로 인하여 혹 네가 상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세자가 어떤 성격인지는 잘 알고 있다.
책임감이 유난히 강하다.
만약 자신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복귀한다면, 그것이 온전히 내게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
그래서라도 반드시 성공하려 들 테고, 나 역시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하지만, 중전의 말마따나 세상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만약 세자가 몸에 생채기라도 입는다면, 네 어머니만 아니라 이 아비 또한 상심이 클 것이다. 그 이상이라면, 상상조차도 하기 싫구나.”
“…….”
“그러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라. 세자의 안위에는 부모의 걱정만 달린 게 아니라, 열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직과 이 땅 백성 모두가 걸려 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세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확언을 들어도 마음이 다 놓이지 않았다. 중전의 말마따나, 나 역시 왕 이전에 아버지이기 때문일까.
손을 내밀자 세자가 엉성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세자의 손을 마저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쩍 커진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느냐? 서궐西闕에 계속 머무르지는 않을 듯한데.”
“나서지 않고 군사들을 다스릴 수는 없다고 배웠습니다.”
“……옳은 말이구나.”
“윤허해주신다면, 복이모사가 있다는 명나라의 남쪽 바다로 나가볼까 합니다.”
역시 세자는 바다로 나갈 생각이었다.
혹 통영統營까지만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세자가 바라는 게 아니겠지.
복이모사와의 거리를 따지면 한양이나 통영이나 오십보백보나 마찬가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전한 서궐에 있는 게 낫겠지.
애초에 세자의 성정이라면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가진 책임감에는 자신이 지휘하게 될 군사들 또한 예외가 아닐 테니까.
‘신속하고 적절한 용병用兵만이 최상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지. 그리고 그것이 인명 또한 최대한 아끼는 방법이다.’
그러한 진리를 외면하고 세자에게 자신조차 믿지 않는 신념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 조심해라. 무탈하고.”
“예,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도 강녕하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으마.”
세자는 당분간 서궐에 더 머무를 거다. 출정이 예정되었다고는 하나, 준비해야 할 게 더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인사를 마지막으로 세자가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거늘 걱정하는 마음은 더 커지기만 했고 어깨를 붙든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하…….”
쓰디쓴 헛웃음이 나왔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니 세자가 성큼 물러나서 허리를 숙였다.
“……그래. 그래…. 그래. 다녀와라. 배웅은 하지 않으마.”
배웅하러 나갔다간 또 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테니까.
세자가 예를 올리고 물러나자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