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31화 (331/380)

인조, 명군이 되다 331화

세자는 병조판서 정충신과 그를 대신해 도원수에 오른 이완,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具仁?와 함께 건선거를 방문했다.

육해陸海상에 군권을 지닌 모두가 회동하자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이들의 관심사는 그런 데 있지 않았다.

“소관이 건선거를 보는 건 처음이옵니다만…….”

구인후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아주 장대하고 유용한 시설인 듯합니다.”

건선거는 군항에 정박한 선 비이패를 중심으로, 바다와의 격벽隔壁을 두르고 안쪽의 물을 모두 빼냄으로써 만들어졌다.

격벽 너머에서는 바다가 출렁이는데 안쪽에서는 깊은 바닥을 드러내고서 선 비이패를 받침으로 반쯤 띄워놓고 있으니, 그 광경은 위태로우면서도 웅장하여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더욱이 반쯤 열린 선 비이패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기술자와 일꾼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마치 소인국小人國의 자그마한 백성들이 거인국巨人國 배의 내부를 탐사하는 듯이 보였다.

병조판서 정충신이 그러한 광경를 가리켰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품이 많이 들어갔소이다. 선 비이패가 잠기면서도, 아래에서는 받침을 둘만큼 바닥이 깊은 곳을 물색하고 그 깊은 바닥부터 격벽을 올려야 했으니.”

“으음.”

“그 작업을 하던 중에 군사와 기술자들이 여럿 상할 뻔하였소. 귀신이 된 사람은 없어 천만다행일 따름이외다.”

통영統營에서 쉽게 흉내 낼만한 시설이 아니었다.

통영이 조선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수군인 삼도수군을 통합해 지휘하는 군영일지라도 말이다.

통제사 구인후가 물었다.

“비이패의 해체가 끝난 다음에는 자유로워진 기술자들을 수배해 흉내 정도는 내 볼 수 있겠지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봅시다.”

기실 정충신도 건선거의 유용함과 확대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다.

다만, 건선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소모된 비용과 인력을 생각해보고 통영 단위에서 이를 흉내 낸다는 건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더욱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도 했다.

“저하.”

정충신이 발을 돌리고서 예를 표하자 세자가 말했다.

“통영에 건선거를 설치하는 건 내가 당면한 대사大事를 모두 완수한 뒤에 논해보도록 합시다. 시설이 유용하긴 하니, 전하께서도 극구 반대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구인후가 감사의 뜻으로 허리를 숙였고, 세자는 마저 일렀다.

“복이모사의 총독이었던 방지거(프란시스코)가 내게 복이모사를 쉽게 점령할 계책을 내어주었습니다.”

“그 해적 두령이 말입니까?”

도원수 이완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고,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 두령이라고는 하나 신실하게 믿는 바가 있고, 그 믿음을 나 또한 신뢰하니 해적 두령이 나를 따르기로 약조했습니다.”

물론, 세자가 신뢰했다는 건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켜주겠다는 확약이 아니었다.

프란시스코의 믿음 그 자체를 믿고서 공언空言으로 회유했을 뿐.

“과연 그의 믿음이 진실로 신실한지, 아니면 단지 그런 척만 했을 뿐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요. 아무튼, 그가 내게 제안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프란시스코는 필리핀 총독 세바스티안의 지시를 따라, 배에 네덜란드의 국기를 달고 조선의 해역에서 해적질을 사주했다.

그는 그것을 반대로 이용하자고 했다.

조선의 배에 스페인의 국기를 달고서 포르모사에 입항하면, 요새화된 의미도 없어지고 4개 중대에 불과한 수비군으로는 조선군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세자가 프란시스코의 계획을 알리자 구인후가 평했다.

“홍모이들은 기만이 기본인가 봅니다.”

“몇몇 사람이 듣는다면 꽤 속상해할 말이로군요.”

세자는 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듯 실소하며 답했지만, 내심 동감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이 땅에 최초로 표류하여 신민이 되기로 한 자들도 원래는 해적 출신 아닌가.

사례가 많지는 않으나 수차례 누적된 경험을 비추어 보면 홍모이 족속들은 왜와 마찬가지로 해적질에 기만을 일삼는 독종이었다.

과연 프란시스코의 작전이 먹혀 복이모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그 땅의 홍모이들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세자는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 앞선 걱정이기도 했다.

“제공께서는 방지거의 계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능성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답한 사람은 병조판서 정충신이었다.

“방지거가 아조에 충성하기로 약조했으며, 저하께서 그 뜻을 의심하지 않는 한, 그 작전마저 우리를 속이기 위한 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승산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방지거는 복이모사의 총독이기도 하였으니, 가장 승산이 큰 방식을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제사 구인후를 바라보았다.

“저하께서 방지거의 계책에 응하신다면 통제영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옵니다.”

포르모사의 현재 방비 상태가 어떻건, 그 일대의 해역에 진입한다는 건 적지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조의 바다인 발해渤海를 오가는 것과는 위험성이 차원이 달랐고, 안전하면서도 능숙한 항해를 위해서는 당연히 통제영의 적절한 지원이 필요했다.

“도원수께서는요?”

세자의 시선이 이완에게로 향했다.

포르모사는 섬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데 성공한다면, 남는 건 요새의 주인을 두고 공방을 다투는 과정뿐이다.

그것을 배가 뭍으로 올라가서 수행할 수는 없었다.

육전陸戰의 전문가가 육군을 이끌어서 수행해야 한다.

“소관이 복이모사의 지형과 상황은 상세히 알지 못하니 당장 성패를 거론하는 건 성급할 수 있습니다.”

이완은 이런 정론이야 다들 알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 곧바로 덧붙였다.

“그러나 적진을 지키는 병력이 고작 수백에 불과하고, 아군은 수군의 도움을 입어 요새를 쉽게 돌파한다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세 사람에게 말했다.

“얼핏 포르모사의 평정은 어렵지 않은 목표로 보입니다.”

적의 본거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까운 스페인령 필리핀에서도 지원은 없을 것이라 예상하니까.

“그러나 세 분이 저마다 강조하신 대로, 방지거의 충성과 수군의 협력, 육군의 분전이 모두 성공해야만 복이모사를 수월하게 평정할 수 있습니다.”

세자가 염려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무엇 하나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복이모사의 평정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모여 각자에게 견해를 묻고 역할을 분명히 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방지거의 계책을 따르고자 합니다. 앞서 알아본 복이모사의 상황과 대조해보면, 그의 자백에는 어긋남이 없으며 계책 또한 승산이 높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조의 범선을 서반아의 선박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국기와 돛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국기의 자세한 형상을 알지 못하며, 또한 아조의 돛과 돛대 또한 그들과는 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국기라 함은…….”

통제사 구인후가 말끝을 늘어뜨렸다.

“어기御旗가 전하가 계신 곳을 의미하고, 수자기帥字旗가 장수의 위치를 의미하듯, 국가의 일원이 있다는 깃발입니다.”

“기이합니다. 방지거는 복이모사의 총독이었으니, 총독기를 지녀야지 않습니까?”

구인후가 의문을 표했다.

과연 조선에 있어 국기란 생소한 개념.

동방에서는 고작 문장 따위로 국가를 상징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동방에서는 군주가 곧 국가였으며, 군주가 국가의 주인이자 상징이었으니까.

억지로 조선의 국기에 끼워 맞출 깃발이 있다면, ‘왕이 이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태극팔괘의 어기御旗 정도일까.

“국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괄적으로 국기를 지니게 한다면, 상하와 지위의 분별은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구인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자 병조판서 정충신이 답해주었다.

“오랑캐의 습속일 뿐인데, 이유를 따지거나 연연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없지요.”

의문이 대강 정리되자 세자가 덧붙였다.

“국기만 아니라, 돛에서도 아조의 범선은 홍모이들의 범선과는 다릅니다.”

네덜란드인 표류자들의 도움으로 범선을 개발, 건조하였으나 사람의 기억이 온전할 수는 없는 법.

형상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으나 이는 기실 큰 차이점은 아니다. 어차피 서양의 범선들이라고 모두 일괄적인 형태를 갖춘 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소재에 있었다.

서양식 범선의 돛을 구성하는 캔버스는 동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소재였다. 재료야, 삼麻으로 조선에서도 흔한 작물이나 삼에도 종류가 있으며 캔버스로 가공하는 법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굳이 캔버스를 흉내 낼 필요는 없었다.

한선의 돛을 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서양의 범선으로 위장할 일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문제는 아닙니다. 국기와 구라파의 돛, 전부 해결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세자는 반쯤 해체되어 단면도를 드러낸 산 펠리페를 가리켰다.

산 펠리페는 스페인의 선박인 만큼 국기야 당연히 있었고, 이를 복제하는 건 품만 들 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돛의 소재인 캔버스 또한 서양에서는 돛만 아니라 옷을 짓거나 침낭, 해먹으로 사용하는 등 용도가 많았으므로 선실 창고에 잔뜩 비축해두고 있었다. 그걸 가져가서 달기만 하면 되었다.

“세 분의 의향과 역할을 확인했으니, 나는 여기서 선 비이패의 서반아 국기와 범포帆布를 챙길까 합니다.”

이에 정충신이 물었다.

“위장이 갖춰지면 바로 출병하실 것입니까?”

“해풍과 풍랑이 적절한 길일을 가려 출항하겠지만, 예. 서반아령 복이모사에서도 낌새를 느낄 수 있으니 최대한 서두르고자 합니다.”

산 펠리페가 단독으로 출항하고도 제법 시일이 지났다. 조선의 역습을 확신하지는 않겠으나, 긴장만은 확실히 더해지지 않았을까.

굳이 그들에게 여유를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세 분께서도 모쪼록 준비를 서둘러주셨으면 합니다.”

“…예.”

“계획에 변동이 생긴다면 빠르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조판서 정충신과 도원수 이완 그리고 삼도수군통제가 구인후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모두 경력이 짧다고는 못 하겠으나, 눈을 감기에는 각기 이른 나이.

왕이 세자에게 대사를 맡기며 자신의 자리를 승계시킬 의사를 확실히 밝힌 만큼, 세 사람 모두 세자의 대사에 최대한 협조하는 게 이롭고 유익했다.

* * *

세자는 고대하던 길일에 이르렀다.

출정식은 그보다 며칠 빨랐다.

대신과 백성들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세자를 배웅했으나 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자는 개의치 않았다.

부월을 받고 물러날 때 인사는 충분했으며, 다시 부왕을 뵐 때는 오직 승전보와 함께라고 정해두었으니까.

금군禁軍들의 호위를 받아 도착한 군항에는 수천에 달하는 정예병과 부두 너머 수 척의 범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돛은 접어놓았으나 범포帆布의 밝은 색상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으며, 그보다도 돛 꼭대기에 매단 서반아의 국기는 더더욱 눈에 띄었다.

세자에게로 두 사람이 다가와 마중했다.

상륙군을 이끌 도원수 이완과, 상륙선을 호위할 수군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였다.

“저하.”

이완이 대표로서 인사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예.”

“그러면 곧바로 출발합시다. 지체자히 말고.”

“받들겠습니다.”

이완이 뒤편을 향해 손짓하자, 여러 깃발이 흔들리고 구령과 함께 군사들이 차곡차곡 범선으로 향했다.

세자와 이완, 구인후 세 사람 또한 군사들 사이로 나아가 범선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