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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32화 (332/380)

인조, 명군이 되다 332화

망망대해.

그저 출렁이기만 하는 바다 위에서, 쪽배 한 척이 태평하게 선단으로 다가왔다.

얼핏 고깃배와 다름없는 모습을 한 이 쪽배는 당당하게 선단의 기함에 이르렀고, 기함이 측면에 걸어놓은 그물을 타고 올라왔다.

불청객의 차림 역시 금방이라도 비린내를 풍길 법한 어부의 것이었다.

그러니 선단에는 영락없이 외부의 어부가 대뜸 찾아온 셈이었지만, 갑판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어부가 말했다.

“여기서 남서쪽으로 반 시진 거리에 복이모사가 있습니다.”

태연한 보고에 통제사 구인후가 물었다.

“복이모사의 방어 상태는?”

“최근까지 요새를 수비하고 있던 4개의 중대 중 3개가 비율빈 일대로 재배치되었습니다. 현재 요새를 수비하는 병력은 60명의 1개 중대와 30명 안팎의 현지인 용병들이 전부입니다.”

“…잠깐, 뭐라고?”

“말씀하십시오.”

“3개의 중대가 복이모사에서 이탈했다고?”

“그렇습니다.”

책을 읽는 듯 건조한 실방사 일원의 대답에 구인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반아는 아조를 침범하려던 선 비이패가 실종되고 여기에 동승한 총독 방지거 또한 사라진 상태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복이모사의 방위를 되려 약화시켰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구인후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물었다.

“……왜지?”

“공식적으로 전해진 이유는 없습니다. 복이모사의 총독부 관저에서도 다들 당황한 눈치입니다. 그곳 직원들의 예상으로는, 비율빈 총독부에서 방지거를 징계할 목적으로 병력을 재배치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대세입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데.”

“방지거가 아조를 위협하고자 임대한 선단은 본래 비율빈 총독의 것이었으며, 한시적으로 빌려준 것인데 호위함 중 하나가 크게 손상되고 기함은 단독으로 출항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비병을 빼냈다는 말인가?”

“비율빈 총독부에서 공식적으로 전한 입장은 없으나, 복이모사 총독부에서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구인후가 단언했다.

“외부 세력을 위협하고자 출항한 전력이다. 그 전력이 핵심 인사와 함께 실종되었는데, 보복을 우려해서 방위를 증강하긴커녕 도리어 병력을 빼냈다고?”

“어쩌면 비율빈 총독부에서는 복이모사의 상실을 예상하고 미리 병력을 재배치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구인후의 추궁과 같은 물음에도 어부는 담담하게 보고했다.

“실방사에서도 그 점을 우려하여 병력의 이동을 추적하였으나, 실제로 3개 중대 모두 비율빈 일대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교대일 뿐 아닌가?”

“새로운 병력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앞서 보고드린 대로, 실방사가 파악한 현재 복이모사의 서반아 측 병력은 1개 중대와 30명 내외의 현지인 용병뿐입니다.”

“허…… 허어!”

구인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탄식만 토해내고 말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며, 이는 구인후와 동승한 세자나 도원수 이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법.

이들은 알지 못하나, 다른 역사에서도 필리핀 총독 세바스티안은 당시 포르모사 총독부의 전력 증강 요청에도 되려 수비군 대부분을 빼갔다.

이 일이 단초가 되어 스페인령 포르모사는 네덜란드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고, 세바스티안 또한 포르모사의 상실로 문책을 당하게 되지만, 보통의 사람이 다른 역사에서 벌어진 자신의 운명을 알 수는 없는 노릇.

그저 세바스티안이 세바스티안 했을 따름이었다.

“……저하.”

구인후는 실방사 일원의 보고가 썩 신뢰하기 어려웠고, 판단을 세자에게 유보했다.

이번 원정의 최고 책임자는 세자.

그는, 자신이 이끄는 실방사의 정보를 믿었다. 부하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서반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지만, 실방사가 파악한 바가 그렇다면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저들 스스로가 방위를 약화했다면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지요.”

너무 좋은 일이었기에 몇몇 사람에게는 되레 근심이 일어났을 뿐이다.

“통제사.”

“예, 저하.”

“상륙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예. 저하.”

세자는 발끝을 돌려 이완에게로 향했다.

“도원수.”

“하명하시옵소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들을 모두 저하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이완이 절도 있게 끄덕였다.

세자 역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를 규합하는데, 이완과 구인후가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의아한 광경에 세자가 물었다.

“두 분은 내게 숨기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세자의 질문에도 두 사람은 잠시 눈치만 보다가, 도원수인 이완이 대표로서 답했다.

“저하께서는 여기 범선에 남아 적지까지 동행할 생각이시옵니까?”

“그렇습니다.”

병사들만 덜렁 사지로 보내놓고 뒤에서 안락만 추구하는 지휘관이 어디 있나. 혹 그런 자가 있다면, 애초에 지휘관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세자에게는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모르지 않아도 이완은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저하께서는 국본國本이시며 장차 이 나라의 주인 되실 분입니다. 자칫 말단과 함께 적지를 찾았다가 옥체에 흉이라도 진다면 소관들은 죽을 죄를 짓는 셈입니다.”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그대들에게 원한이라도 가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면, 전하께서 그대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 같습니까?”

“그 또한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나를 못 가게 말린다는 말입니까.”

세자가 따지듯이 묻자 이완이 단호하게 답했다.

“횡액橫厄이 벌어진다면 소관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하께서는 소관들을 믿고 호위함에 남아 계시옵소서.”

“…….”

세자는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완이 이토록 간청하고, 구인후 또한 마음을 함께 하고 있으니 세자라도 별수 없었다.

두 사람이 결례를 작정한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데 서로의 의義만 상하지 않겠는가?

세자는 탄식과 함께 한숨을 토해냈다.

온 갑판이 조용했다.

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두 분은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셔야 합니다.”

자신이 동행하지 않은 동안, 혹 귀한 병사들만 횡액을 맞는다면 세자 역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이에 이완이 무릎을 꿇었다.

“소관 이완, 반드시 저하께 승전을 바치겠습니다.”

이에 구인후 또한 무릎을 꿇었다.

“소관 구인후도 반드시 저하께 승전과 복이모사를 바치겠습니다.”

세자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의견이 모였으므로, 곧 지휘부가 동승한 범선의 곁으로 판옥선 한 척이 다가왔다.

판옥선은 구식 평저선으로 대양 항해에는 유리하지 않았으나 체급을 믿고 호위함으로 선단과 동행했다. 본디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의 군선이었다.

세자가 판옥선으로 거동하고, 우려를 덜게 된 이완과 구인후는 곧장 복이모사가 있을 수평선으로 선단을 재촉했다.

서반아측 선박으로 위장한 수 척 범선들이 호위선단을 떼어놓고 망망대해를 가로질렀다.

세자는 그들이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쉬운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부월을 받아 군대를 지휘하게 된 자신이 군사들만 보내놓고 뒤에서 결과만 기다리다니?

썩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한들, 이완과 구인후는 물론 이하의 무장들이 자신을 의식하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싸움에 자신의 존재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

세자는 자신을 납득시키고서 발을 돌렸다. 수평선을 계속 마주했다간 마음만 더 심란해질 것 같았다.

* * *

“저하께서 미련이 많아 보이셨습니다.”

구인후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상의한 대로 세자를 떼어놓고 오긴 했지만, 이 일로 세자는 상심하였을 터.

이에 이완이 답했다.

“저하께서는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요. 우리나 군사들과 함께 위험을 공유하지 않는 걸 부당하게 여겨서 동행하기를 바라셨던 것이지, 그게 전술적으로 도움되지 않음은 이해하고 계실 거요.”

“……끄응.”

구인후가 앓는 소리를 내자 이완이 실소했다.

“이제 와 후회하더라도 어쩔 수 있겠소이까? 혹 미운털 박힐 게 걱정이라도 된다면, 약조한 대로 승전과 복이모사를 바칩시다. 그래야 미운털이 덜 박힐 게 아니요?”

“도원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 군관이 다가와 보고했다.

“뭍이 보입니다.”

이에 이완과 구인후 모두 천리경을 펼쳐 정면의 수평선을 살폈다. 과연, 검은 뭍이 차차 드러나고 있었다.

“저기가 복이모사겠구려.”

이완의 말에 구인후가 첨언했다.

“정박한 배는 한 척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저게 화란과의 싸움으로 중파中破했다는 배겠구려.”

“우리가 돌파를 시도하면 정박한 상태로 응전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빠르게 확보하겠소.”

“늦어진다면 여기서 포격으로 침몰시키겠습니다.”

구인후의 말에 이완이 끄덕였다.

선단이 포르모사에 다가가자, 서반아의 거점인 산 살바도르에서도 쪽배를 보내왔다.

선단이 서양의 범선에 스페인 국기를 달고는 있으나, 다수의 선박으로 이루어져 무척 위협적이었다.

반대로 산 살바도르에서는 총독이 부재중이었고 병력도 대부분이 필리핀으로 차출되었으므로, 한층 경계심이 심해진 때였다.

그러니 선단의 신원을 파악하고자 쪽배를 보낸 것이었으나 구인후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돌파해라.”

선단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질주했다.

선단으로 다가오던 쪽배는 기세에 놀라 비켜셨지만, 범선이 가른 물을 맞고 뒤집어졌고 선원들은 환류에 휘말려 사라졌다.

그 광경을 산 살바도르에서도 본 걸까.

뭍이 금세 소란스러워졌고, 노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홍모이 병사들이 부두로 몰려나왔다.

항구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범선은 좌우로 상륙정을 내려놓으면서, 산살바도르의 부두를 향해 포구를 들었다.

“방포하라!”

명령과 함께 선측의 포구들이 불을 뿜었다.

포연과 함께 쇳덩어리가 쏘아졌고, 정신없이 노질하는 조선 원정군의 머리위로 날아가 항구에 작렬했다.

콰과과과광!

충돌음과 파열음이 사방에서 터지며 집이 무너지고 돌바닥이 깨져나갔다. 비명과 고함이 정신없이 울려댔고, 자욱한 흙먼지가 피범벅이 된 채 비틀거리는 스페인군을 뒤덮었다.

“아아아악!”

“도망쳐!”

혼란속에서 스페인 병사들과 원주민 용병들은 무기를 내던지며 달아났고, 거리의 주민들은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그런 와중에도 약삭빠른 선원과 도둑들은 쓰러진 사람들의 품을 뒤지고는 했다.

그러한 태평함은, 이내 부두로 상륙한 조선군을 마주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난…!”

한 도둑이 두 손을 번쩍 들었지만, 조선군은 스페인어를 알지 못했다.

총성과 함께 도둑이 쓰러졌고, 주변에서 어슬렁대던 군인과 선원들 역시 연이은 총성 앞에서 픽픽 쓰러졌다.

항구가 정신없이 확보되는 동안 부두에서는 더 많은 조선군이 진입해왔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수평선의 범선들이 쏜 포탄이 가로질러 뭍 안쪽의 요새를 두들겼다.

쇳덩어리들의 격돌과 함께 요새의 붉은 벽돌들은 터지고 깨져나갔으며, 성벽의 병사들은 이미 아래로 피신한 뒤였다.

운 좋게 철거를 면한 건물들의 창가와 입구마다 스페인인과 중국인, 일본인과 원주민들이 웅크린 채 항구에 차곡차곡 쌓이는 이국의 군대를 두려운 눈으로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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