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3화
본래 필리핀 총독부의 전함인 산 펠리페와 세 척의 호위함은 조선으로 향하던 중 네덜란드 선단의 습격을 받았다.
이 와중 호위함 산 후안은 침몰했고, 로자리오 호는 침수 상태가 되었다.
산 펠리페의 화력으로 네덜란드 선단은 쫓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멀쩡한 호위함은 하나만 남아버린 상황.
이때 결정권자인 포르모사 총독 겸 제독 프란시스코는 유일하게 남은 멀쩡한 호위함에 로자리오 호의 선도를 맡겼고, 단독으로 산 펠리페를 이끌고 조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꽤 시일이 지났다.
프란시스코와 산 펠리페는 끝내 귀환하지 않았다.
총독과 거함의 증발에 스페인령 포르모사의 직원과 주민들은 그들이 조선의 해군, 혹은 중국이나 일본의 해적들에게 당했다고 여겼다.
산 펠리페가 만만한 전선은 아니지만, 아무리 덩치 크고 위력 강한 전함일지라도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산 펠리페가 그 한계를 맞이한 게 아니라면, 배와 총독의 실종을 달리 해명할 여지도 없었다.
그조차 아니라면, 거함을 이끌고 네덜란드에 투항하여 신세를 고쳤을지도?
분명한 것 하나 없이 소문만이 무성할 따름이었다.
다만 총독과 산 펠리페가 다시 산 살바도르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데는 직원과 주민들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마닐라의 필리핀 총독부에서도 똑같이 생각했던 모양일까.
필리핀 총독 세바스티안은 포르모사를 수비하던 4개의 육군 중대 중 3개를 필리핀 쪽으로 재배치해버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멀쩡해 산 살바도르를 지키고 있던 한 척의 호위함마저 중파하여 수리 중인 로자리오를 내버려 두고 마닐라로 보내졌다.
상황이 급변하자 산 살바도르의 직원과 주민들은 이러다가 네덜란드, 혹은 중국이나 일본의 해적들이 쳐들어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몇몇 불안이 심했던 사람은 필리핀이나 마카오로 피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각자의 재산이 있는 포르모사와 산 살바도르를 떠나지 않았다.
그저 비보와 변화들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건 산 살바도르에 남겨진 유일한 육군 중대의 일원, 프랑코 또한 마찬가지였다.
“괜히 불안하네…….”
낡은 노란색 상하의에 딱 달라붙는 붉은색 장화, 낡은 흉갑.
프랑코는 중대에서 근접전투를 담당하고 있었다. 무장 또한 장창과 허리춤에 찬 세검이었다. 전열에 창을 세워놓고서 적의 접근을 막다가, 여차하면 검을 빼드는 식이다.
프랑코는 이러한 자신의 역할을 좋아하지 않았다.
포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처럼 앞에서 적과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좋게 해석해서 보호이지 노골적으로 평가하면 총알받이에 불과했으니까.
자신의 역할을 혐오하는 창병이 프랑코만은 아니었다.
다른 창병들 역시, 여차하면 창을 내려놓고 총을 들기를 원했으며 원주민과의 몇몇 전투에서 창병들은 쓰러진 포수에게서 총을 빼앗아 쓰기도 했다.
일단 총만 들게 되면, 흉갑을 입고 있으니 포수의 완전한 상위호환이 된다.
창병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프랑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해적이라도 쳐들어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겠지…….’
산 살바도르를 방위하던 4개 육군 중대 중 3개 중대가 차출됐다.
이곳에 프랑코 자신과 남게 된 불운한 중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여타 중대장들과 함께 명령의 연유를 물어보았으나 상부는 단지 필리핀 총독부의 지시라고만 밝혔을 뿐 별다른 이유는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중대장들의 추측으로는 필리핀 전선의 전황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혹은 공세를 앞두고 병력을 증강하기 위함이다, 하는 추측도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닐라에서 온 선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필리핀에는 전황의 특별한 변화도, 대대적인 공세도 없었다고 했으니까.
‘남게 된 사람만 이상해졌다는 거잖아.’
그러한 의심과 불안에 결정타를 먹인 건, 필리핀 총독부에서 산 살바도르를 지키던 유일한 전함마저 빼간 사건이었다.
원래 필리핀 총독부의 배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수리 중인 로자리오 호도 있었다.
그리고 로자리오 호 또한, 수리를 마치는 대로 마닐라로 복귀할 것을 지시받은 상태였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그러던 참이었다.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웠고, 골목에 기대 볕을 피하고 있던 프랑코는 슬쩍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도둑? 싸움?’
어느 쪽이건 거친 선원들과 원주민들이 어우러진 산 살바도르에서는 일상 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수평선에서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일시에 나타나는 건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
함선들은 돛의 끝자락에 스페인의 국기를 달고 있었다.
때마침 프랑코의 곁으로 옷을 잘 빼입은 총독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떠들었다.
“마닐라에서 보낸 함대인가?”
“선박 양식은 저지대 해적들 같은데?!”
과연 프랑코가 수평선 너머 드러나는 선체를 보니, 돛 끝자락에서 휘날리는 국기와는 이질적으로 네덜란드의 함종인 플류트가 생각났다.
가능성은 둘 중에 하나였다.
총독부 직원들의 말처럼 본국이나 필리핀에서 보낸 우군이거나, 혹은 그렇게 위장한 네덜란드군의 침공이거나.
포르모사 남단에 네덜란드 해적놈들이 제법 큰 규모로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때마침 병력까지 빠졌으니 더더욱.
진실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아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확인해보는 것.
총독부 직원들이 때마침 주변을 서성이던 선원들을 향해 일렀다.
“어이! 거기 너! 당장 배를 타고 가서 함선들의 소속을 확인해라!”
대뜸 지목당한 선원이 당혹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자신을 가리키자, 직원이 외쳤다.
“그래, 너! 이 멍청아!”
“…저 혼자서는.”
“아무나 데리고 가, 제기랄!”
그 말에 프랑코는 다시 골목의 그늘로 바짝 숨었다.
직원들에게 지목당한 선원은 물귀신처럼 주변의 다른 선원 둘을 더 데려다가 쪽배에 올랐고, 그제야 프랑코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선단은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싸한데.’
프랑코는 척추를 타고 뱀이 지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기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항구에서 도망치는 대신, 선단을 향해 나아가는 쪽배를 주시했다.
아직 선단이 적대적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다고 무작정 근무지를 이탈했다간 탈영을 이유로 처형당할 수 있었다.
쪽배가 마침내 선단에 다다랐다.
선단은 항구의 지척에 이르러, 돛을 접고 쪽배의 방문을 받아들일 법 하였으나 벌어진 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선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질주했으며, 쪽배는 마주오는 배를 피하려다 파도를 맞고 뒤집어졌다.
그 광경에 총독부의 직원들은 일순 얼어붙었다가 경악했다.
“적이다! 경보를 울려라! 적이야!”
고함과 함께 구경 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흩어졌고, 첨탑에서는 마구잡이로 종을 흔들어 귀 따가운 경보음을 냈다.
“병사들! 집결해! 적을 막아야 한다!”
직원들이 적에게 등을 보인 채로 외쳤다.
몇몇 병사들은 다급히 뛰쳐나왔다가 멍청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중 하나가 도망가는 직원에게 외쳤다.
“우리만 싸우라고?!”
그러자 직원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인 채로 외쳤다.
“탈영이라도 할 생각이냐! 알아서 해!”
“너희는 어디 가는데!”
“……마, 마닐라에 지원을 요청하겠다!”
“뭐?!”
병사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분개하며 칼을 쥐었지만, 그가 칼을 허리춤에서 빼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기도 전에 포성이 울렸으니까.
쿠궁…!
꾸구궁…!
프랑코가 포탄이 작렬한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발을 떼기도 전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콰광!
콰과광!
지축이 흔들리며 시야가 뒤섞였다.
프랑코는 문득 옛날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삼촌은 화가였다. 그는 기름에 물감을 뿌려서 그림을 그렸는데, 언젠가 프랑코는 기름 위의 그림을 마구잡이로 휘저어버렸다.
그게 오늘날 프랑코의 시야에서 벌어졌다.
‘……!’
그 시야 위로 모래먼지가 번졌다. 중력이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잡아당겼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프랑코는 땅을 짚은 채로 매캐한 목에서 기침을 토해냈다.
“케헥! 켁! 끄윽!”
갈색의 무두질된 가죽 장갑 위로 끈적한 모래침이 흘러내렸다.
프랑코는 따가운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골목을 보았다.
흙가루와 모래먼지가 바람을 타고 대지를 스산하게 스쳐가는 동안, 무너지고 갈라진 항구와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도망치는 직원을 노려보며 칼을 쥐었던 한 중대원은, 뽑은 칼을 늘어뜨린 채 누워 있었다. 미동은 없었다.
사방에 처절한 비명이 가득했고…….
지평선에서는 적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프랑코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골목의 갈라진 벽을 짚으며 겨우 일어나, 주춤거리고 비틀거리면서 안쪽으로 도망쳤다.
* * *
“항구를 확보했습니다.”
원색의 갑주를 걸친 조선의 군관이 보고했다.
포르모사의 스페인령 정착지, 산 살바도르는 부두부터 안쪽의 골목까지 발을 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조선의 군사들로 가득했다.
선단에 군사를 가득 채워 온 조선군이었다.
적의 수가 기백에 불과하다는 건 인지했으나, 포르모사는 대양 너머의 전장.
소수의 병력만을 가져오느니 넉넉하게 대동하는 게 맞았고, 산 살바도르가 철저하게 장악당한 이유였다.
도원수 이완이 주변을 돌아보고서 물었다.
“아성은?”
산 살바도르는 포구외 외곽을 둘러싼 요새 외에도, 내부에 총독부 관저와 군사기지를 보호하는 작은 아성이 존재했다.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군관이 보고했다. 아성은 수군의 포격으로 성벽이 반파한 채였으나, 아직 백기를 내걸지는 않고 있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전의를 다지는 건 아니겠지?”
이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자문했다.
그것이 군관에게는 자신을 향한 질문처럼 들렸는지, 결의를 다진 얼굴로 답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즉시 돌입하겠습니다.”
이완은 결의에 답해주는 대신, 거리 너머의 아성을 바라봤다.
내부의 아성은 수군의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내구성이었다.
하기야, 외침의 대비는 외성이 맡았어야 할 역할이다.
아성은 내부의 소요를 대비하는 정로도 족했겠지.
그러한 아성의 한계는 반파한 성벽 너머에 숨은 서반아인들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이완은 관대함을 발휘하기로 했다.
“우리와 동행한 실방사의 일원은 어디 있나?”
어부로 위장하여 선단을 복이모사로 안내한 자가 있었다.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는 걸까.
“부르셨습니까.”
이완이 찾던 이가 째깍 나타났다.
“….”
주변에 보이지 않아 찾은 인물이, 찾기 무섭게 등장하다니.
이완은 조금 꺼림칙하였으나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실방사의 일원을 찾은 이유를 말했다.
“자네라면 서반아인들의 말을 할 줄 알겠지?”
“물론입니다.”
이완이 끄덕였다. 서반아의 거점에 잠복해 있던 이라면 서반아의 말 또한 할 수 있을 터.
“우리 중에는 서반아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그대가 대신 아성의 사람들에게 항복을 제안해주게.”
이완의 부탁에, 실방사의 일원은 고민 끝에 답했다.
“받들겠습니다.”
첩보조직인 실방사의 일원에 있어 신분을 드러내는 건 자멸과 마찬가지.
품계만 따지자면 하늘과 같은 도원수의 명령일지라도 실방사 외부의 인물이니, 명령을 듣지 않았겠지만 지금 이완은 세자의 대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는 실방사의 주인이었다.
이러한 계산을 마친 실방사의 일원은 이완에게 예를 표하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아성이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이완과 뭇 군관은 의아해하였으나 붙잡거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무너진 골목을 돌아 사라진 실방사의 일원은 반 각쯤 지나 다시 등장했다.
그는 남루했던 어부의 행색은 온데간데 없이, 여느 조선의 양반들처럼 말끔하게 갓과 도포를 차려입은 채였다.
“…….”
의복이 어디서 나서 순식간에 갈아입은 걸까.
이완과 군관들이 의아해하는 동안, 잘 차려입은 실방사의 일원은 담담하게 아성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들이 실방사라면 학을 떼는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한 군관이 중얼거리자 주변 사람들이 끄덕였다.
실방사가 삼사와 감찰의 권한을 두고 다툰 적이 있다는 건, 다르게 말해 실방사가 국내에도 퍼져있다는 뜻.
그들이 저러한 은밀함으로 각처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기분 좋을 이는 없었다.
이완이 말했다.
“…다 나라를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이야. 자네들과도 다를 것 없네.”
덕분에 서반아의 거점을 쉽사리 점령하지 않았나.
망망대해에서 해메지 않고 이곳을 똑바로 찾아올 수 있었던 점 또한 실방사의 도움 덕이었다.
궁극적으로 그 덕에 아낀 인명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꼭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건 칼과 총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완은 그런 새삼스러운 깨달음보다도 항복 제안의 경과가 더 궁금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전해지기를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