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4화
프랑코가 도망쳐 들어간 곳은 산 살바도르의 아성이었다.
포르모사 총독부 관저와 병영을 에워싼 아성은, 본래 외침을 방비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동양인 적들이 정착지를 모조리 점령해버렸으니 프랑코에게 이곳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아예 산 살바도르 밖으로 도망칠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잠깐은 들었지만, 산 살바도르 바깥은 완전히 밀림이었다.
숲은 빼곡하여 대낮에도 사위는 어둡고, 공기는 습하다 못해 퀴퀴하다. 그런 환경에서 호전적인 원주민과 사나운 해충들이 들끓었다.
위험성만 따지자면 적에게 포위당한 아성 못지않았다.
나머지 여건은 그보다도 못했고.
프랑코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그는 정체불명의 동양인 침략자들이 관대하기를 바랐다.
어떤 야만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프랑코는 그런 문명을 남미에서 마주했던 스페인의 국민이었다.
‘난 여기 돈 벌려고 왔지, 야만인들의 한 끼 식사가 되려고 온 게 아니라고!’
프랑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고 두 손을 맞댄 채 신에게 자비를 기원했다.
부디, 자비로운 신께서 자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이었다.
아성의 무너져내린 성벽을 밟고 서는 이가 있었다.
아성 내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복장마저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머리에는 납작한 챙이 달린 모자를 썼고, 그 아래로는 단벌의 의복이 발목까지 흘러내렸으니까.
프랑코가 접한 중국인이나 일본인 중, 어느 쪽도 저러한 차림새를 하지는 않았다. 필리핀의 복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구야?”
아성 마당의 누군가 물었으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제3의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모두가 극도로 생소해하는데, 무너진 성벽을 밟고 선 이는 능숙한 스페인어로 말했다.
“나는 조선국의 원정군 사령관, 완을 대신하여 그대들에게 항복을 제안하고자 왔소!”
그 쩌렁쩌렁한 목청에 프랑코와 아성의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과연, 저 제안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기고만장한 총독부의 직원들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이제 와 항복을 거부한다고 함락을 앞둔 아성과 한 줌뿐인 사람으로 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항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는 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한 사람이 두 손을 들면서 외쳤다.
“항복! 나는 항복하겠다!”
그가 일어서며 엄폐물에서 빠져나오자, 관저 직원이 분명한 누군가가 외쳤다.
“배신자! 제국과 신앙을 배신할 생각이냐!”
그러자 항복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서 외쳤다.
“죽고 싶으면 너나 죽어!”
일갈한 사내는 두 손을 든 그대로 ‘조선인’을 향해 나아갔다.
“항복은 이렇게 하면 되나?”
조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했는데도 붙잡아놓고서 고문하거나, 잡아먹지는 않겠지?”
조선인은 그런 질문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반응이 여러 사람을 안심시켰을까.
마당에서 눈치를 보던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고서 슬금슬금 빠져나왔다.
그럴 때마다 안쪽에서는 관저의 자존심 강한 직원들이 언성을 높여댔지만, 결국 그들 사이에서도 하나둘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대세가 정해지자 격렬했던 반발과 비난의 목소리는 언제 있었냐는 듯 모두가 무장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두 손을 들고 있으니, 조선인은 아성 너머를 향해서 손짓했고 이내 무수한 발소리가 아성으로 다가왔다.
무너진 성벽 너머 최초로 드러난 것은 깃발이었다.
붉은색 창대의 끄트머리마다 원색의 휘황찬란한 군기가 나부꼈다. 그 아래로 마찬가지로 원색인 갑주를 걸친 자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보통, 동양인들의 신장과 체구는 스페인인들과 비교해 많이 작았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대표적으로 그러했으며 포르모사의 원주민이나 필리핀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저들을 ‘조선’이라 소개한 자들은 신장과 체구가 컸으며 피부마저 희었다.
프랑코는 속으로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스터 존의 나라?’
동방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 속의 국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설보다는 망상 속의 국가로 여겨지는 존재.
하지만, 정녕 프레스터 존의 나라는 존재했다는 말인가?
그런 환상에 불을 붙인 것이 조선인의 능숙한 스페인어였다.
만약 프레스터 존이 스페인이며, 지구의 절반을 가로질러 동방의 끄트머리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면 그들의 능숙한 언어와 여태 발견되지 않은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진정 이들이 프레스터 존에게서 복음과 문명을 배웠다면 포로가 된 신세일지라도 그나마 안도는 할 수 있었다. 개화되지 않은 동양인들의 야만성과 미개함은 덜 걱정해도 될 테니까.
하지만, 프랑코와 스페인인들의 망상은 이완의 발언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자들이 전부인가?”
도저히 스페인어라고는 할 수 없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언어.
그 자체만으로 프레스터 존이 지구 반대편에 신앙과 문화를 전수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었다.
“관저나 병영에 몇 놈쯤 더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군. 수색해라. 저항하면 없애도 좋다.”
이완은 휘하의 군관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점차 죽상이 되어가는 포로들을 돌아보았다.
“이것들은 단체로 심병이라도 걸렸나? 조금 전에는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이제는 다 죽어가는군.”
“이상한 놈들이로군요. 전염병이라도 달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유럽인들에게는 상식처럼 알려진 프레스터 존의 전설 따위, 동양에서는 금시초문에 불과했다.
실방사의 일원도 굳이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이완과 그의 부하들은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홍모이들에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목표인 복이모사는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이완은 관저와 병영이 마저 정리되는 동안, 후방으로 인편을 보내 승리한 소식을 구인후에게 알리기로 했다.
* * *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는 승전한 소식을 접했으나 곧장 복이모사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완에게서 온 인편을 그대로 돌려보내며 항구 주변을 깔끔하게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좋은 소식을 혼자서 독점할 수는 없는 법. 구인후는 망망대해에 세자와 자신의 병력인 호위함대를 두고 왔다. 구인후는 그쪽에도 소식을 보내고, 함께 복이모사에 정박하여 휴식할 생각이었다.
그런 구인후의 배려로 세자는 포르모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포르모사는 덥고 습한 섬이었다.
대양을 가로질러 다다랐을 때부터 그러한 기후로 변해왔지만, 세자는 망가진 부두로 내려오면서 변화를 체감했다.
팔도八道보다 짙은 녹음이 곳곳에 삐져나왔고, 정착지 너머로 비치는 고지대에는 숲이 빼곡했다.
“흥미롭습니다.”
세자가 평했다.
“사시사철 여름이 이어질 것만 같은 곳이군요.”
기실 포르모사의 독특한 기후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자로만 접해온 것과 몸소 느끼는 건 천지天地 차이. 과연 그 말 대로였으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었다.
정착지의 구조물 양식들은 팔도와 기후 이상으로 달랐다.
성벽과 몇몇 커다란 건물은 벽면부터 뾰족한 지붕까지 모두 붉은색이었는데, 벽은 구워낸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 외에 잡다한 건물들은 나무로만 지어졌으며, 지붕에는 기와를 올리지 않았다.
정착지의 구성원들 또한 명확하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전형적인 홍모이들로, 햇볕에 그을려 털만 아니라 얼굴까지 붉게 변해 있었다.
이들은 원색으로 염색된 원단에 단추 등의 장식을 달아 만든 화려한 옷을 입었으며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나 신발, 저고리 따위를 걸쳤다.
다른 쪽은 팔도八道의 농부들 이상으로 짙은 피부색을 가진 족속이었다.
포르모사의 원주민임이 분명한 이들은, 홍모이들과 달리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천 하나로 몸을 두르거나, 혹은 사타구니를 가렸으며 목에는 투박한 장신구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몇 개씩 걸고서 양 팔목에는 고리들을 차고 있었다.
“……특이하군요. 이곳에 사는 족속들조차 말입니다.”
세자의 감상에, 동행한 구인후가 답했다.
“개의치 마시옵소서. 전부 미개한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구인후의 미간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전투와 덥고 습한 환경, 미약한 저항과 곳곳에 숨어 눈치보며 떠는 정착민들은 구인후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은 주지 못했다.
이곳 복이모사는 지리적 특성상 수군의 요충지로 개발될 게 확정되어 있었다.
구인후는 자신의 수하들이 고국과는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 덥고 습한 별세계에서 생긴 것도, 습속도 다른 오랑캐들과 어우러져 근무할 고생을 의식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당연했다.
반대로, 육전을 지휘하며 수월하게 적진을 점령하고 잔당의 항복까지 받아낸 이완은 얼굴이 밝았다.
그는 반파한 요새에서 병사들과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저하.”
이완은 세자와 가깝지 않은 곳에서 하마下馬했고, 공손한 걸음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세자는 무릎 꿇은 이완의 정수리 너머로 들뜬 병사들과 두려워하는 포로들을 마주했다.
장차 자신의 신민이 될 자들과 장차 자신의 적의 될 자들의 말단이었다.
이 전투는 그저 승패만이 의미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는 세자가 장차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의 작은 단면이기도 했다.
유능한 수장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성과와 영광을 안겨주지만, 유능하지 못한 수장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시체나 포로로 만들 따름이었다.
근 수십 년간 격변을 맞았던 삼한의 땅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만들어졌던가.
그 시체가 무고한 백성들의 것이 될지, 혹은 무고한 백성들을 위협한 적의 것이 될지는 오롯이 군주에게 달려 있었다.
이것이, 부왕께서 세자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세자는 감상을 갈무리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이완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도원수.”
“저하.”
세자는 이완과 구인후,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군관과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믿음직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부왕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왔으나, 막상 힘내고 싸운 이들은 그대들입니다.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만 바쳐져야 할 승리가 아니라, 그대들에게 바쳐져야 할 승리입니다.”
세자는 무장들과 군사들의 공로부터 치하하고는, 안색을 밝히고서 외쳤다.
“조선 천세!”
그러자, 세자의 말에 잔뜩 상기되어 있던 무장과 군사들이 얼굴을 붉히면서 따라 외쳤다.
“조선 천세!”
“조선 천세!”
“조선 천세!”
군사들이 저마다 주먹과 팔을 치켜들고서 외쳐대니, 덥고 습한 섬 북쪽 끝자락의 정착지 전체에 조선 전체라는 구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항구에 모인 세자와 군사들 너머로, 그리고 무너진 아성의 성벽 너머로 스페인의 총독부 관저 지붕이 문득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 꼭대기에 달려 있던 붉고 노란 깃발 또한 자욱한 먼지 사이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