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5화
쿠르르르……
묵직한 소음과 함께 포르모사 총독부의 지붕이 흘러내렸다.
조선 수군의 포격은 아성의 성벽만 두드리지는 않았다.
총독부 관저의 벽면은 작렬한 포탄들에 뻥뻥 뚫리고 쓰러지고 무너진 채였다. 그렇게 기울어진 벽이 안쪽으로 함몰되면서 지붕의 일각이 흘러내린 것이다.
수년간 쌓은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관저 꼭대기에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진 깃대와 붉고 노란 스페인의 국기는, 그렇게 흘러내리는 지붕과 함께 자욱한 먼지 사이로 추락했다.
포르모사 총독부의 함락이었다.
그 광경을 항구에서 지켜보던 스페인인들이 탄식을 흘렸다.
“아…….”
마치 그들의 믿는 신이 지상의 신민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려주는 듯했으니까.
물론, 그 광경을 스페인인들만 본 건 아니었다.
“복이모사가 함락된 걸 하늘도 아는 모양입니다.”
도원수 이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구인후와 주변의 군관들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기에, 세자는 미소만 머금었다.
내심 우려가 들었으니까.
‘……관저 안에는 중요한 자료들이 많았을 텐데.’
저런 붕괴로 자료들이 소실되면, 이국에 이역만리인 복이모사를 다스리는 데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관저 직원을 다수 사로잡았다는 것.
이들을 심문한다면 소실된 자료나, 현지에 대한 부족한 이해도를 상당 부분 충족할 수 있으리라.
‘본국에서 귀화한 홍모이를 데려와 채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구나.’
본국에는 홍모이 중 최초로 귀화한 기념비적인 3인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내수사 소속의 선단장, 실방사 소속의 간부, 그리고 조정에서 전함사典艦司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일하고 있었다.
출신들을 생각해본다면 다들 놀라운 출세다.
그러나, 그만큼 공로도 많이 쌓았으며 조정에서도 신뢰하고 있었다.
믿을만하다면 남은 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때마침 해운판관을 지내는 박연朴燕, 옛 이름 벨테브레이는 복이모사의 수령으로 적절한 인재였다.
그간 마포나루와 경기 일대의 무역항을 관리해오면서 수운과 항구를 다루는 데 전문가가 되었으며, 현재 그가 맡은 자리를 대체해줄 후임들 또한 다수 양성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이전에는 해적선의 병기사관으로 복무하며 유사시 복이모사에서 발생할 전투 상황에서도 대응능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부분은 그의 출신.
홍모이인 동족이 부임한다면 이곳 홍모이들의 반발을 크게 줄일 수 있을 터였다.
‘수령으론 박 판관을 추천해야겠다. 그 이상의 적임자는 떠올리지 못하겠어.’
세자가 고뇌하자 옆에서 이완이 물었다.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십니까?”
“아.”
세자는 저도 모르게 매만지고 있던 턱에서 손을 떼며 답했다.
“우리가 이곳을 점령했으니,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적절할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떠오른 후보라도 있으신지요?”
“전함사 판관 박연朴燕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자의 거론에 이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라면 복이모사를 맡을 인재로는 적절하겠습니다. 이런 곳을 다스린 경험도 많고 출신도 이들과 같으니 말이지요.”
세자는 이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이유를 대자 미소를 지었다. 도원수의 판단 또한 자신과 같다면, 인선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단, 전하께서 윤허해주셔야겠지만 말입니다.”
세자가 멋쩍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새로 부임할 수령이 누구건, 누군가는 복이모사에 남아 인편과 교대를 기다려야 합니다. 도원수와 통제사가 사람들을 좋은 말로 설득해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이완이 가볍게 웃엇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소관의 군사들은 누가 강제로 시켜 원정에 자원한 게 아닙니다.”
이완이 수하들을 소개하듯 돌아보며 말하자 뒤편의 군관과 군사들이 모두 상기한 낯으로 끄덕였다.
복이모사가 덥고 습하여 절대 편한 근무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경력을 쌓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때마침 조선은 최근 국경과 영토를 확장하여 지켜야 할 거점도 요충지도 늘어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자리들을 차지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로와 경력을 쌓는 것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는, 반대로 이곳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서반아의 정착지는 바다를 두고 육상에서 움푹 파인 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수상水上이 육상의 돌출지로 고립된 이곳은 지형상 수군에 유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만의 출입구 너머는 망망대해였고 여러 세력의 영역이 교차해 극도로 위험했다.
여기에, 수군으로서 평소에도 사시사철 덥고 습한 환경을 물 위에서까지 겪을 것을 생각해 보면…….
구인후는 자신이 더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곳이기에 남고자 하는 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위험과 불편을 수반하는 만큼 보상도 따르기 마련이니까.
지난 십수 년간 늘어난 건 육상의 진보鎭堡만은 아니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도 이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세자도 만족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럼, 그 부분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세자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락했다.
‘수령으로서 추천할 적절한 인물도 골라두었고, 현지에 잔류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도 일임해놓았다. 내가 더 해결해두어야 할 문제가 있나?’
때마침 세자의 눈에 관저 직원들이 들어왔다.
포로로 잡힌 그들은, 저들로서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세자 자신과 주변인들을 보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그들을 위한 안배도 필요했다.
“내게 저들의 쓸모를 다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세자가 예의바르게 제안하자 이완과 구인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하께서는 이 군대의 지휘자이십니다. 포로의 결정권은 저하께 있습니다.”
“그러하옵니다. 소관들의 의견을 일일이 물어보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하하…….”
세자가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은 군문에 오랫동안 몸을 담아, 수직적인 명령과 이해의 관계가 익숙해서일까.
시키면 그저 따를 뿐인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세자는 아니었다.
“아니에요. 두 분께서는 들어봐주시고, 혹시 다른 생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세자가 의견을 물어볼 의사를 다시금 확인하자 이완과 구인후도 더 사양하지는 못했다.
“말씀하시옵소서.”
“포로 중 관저에서 일하던 자들은 본국으로 호송하여 개선식에 대동할 전리품으로 삼을 수도 있겠으나, 이건 그들의 진정한 효용을 다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오시면……?”
“이곳 복이모사에 남겨, 이전처럼 홍모이와 원주민들을 다스리는 데 이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들 포로들은 말 그대로, 총독부 관저 직원들이었다. 우군이 진주하기 직전까지도 섬의 행정과 사무를 처리하고 있었으리라.
그런 그들을 가장 활용할 수 있는 장소와 역할은 바로 이곳, 복이모사였고 이곳의 실무직이었다.
이에도원수 이완이 당혹한 낯으로 말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만약 저들이 아조에 충성하지 않고 반란을 모의한다면 섬의 질서가 위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완의 말에 구인후도 찬동했다.
“그러합니다. 저들이 가장 쓸모를 다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라는 데는 소관 또한 이견이 없으나, 이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간 자칫 화근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세자가 처음 제안할 때는 의견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 했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발언의 기회를 주자 우려를 드러내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세자로서는 조금 멋쩍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우려한 부분은 세자 역시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두 분 의견대로 홍모이가 자칫 화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나 또한 우려한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 잔류할 군사를 선발하기로 했으며, 군사들 외에도 저들을 감시할 다른 사람들 또한 있습니다.”
세자가 거론한 군사 외의 다른 사람들이란, 당연히 실방사를 이르는 것이었다.
이완과 구인후는 물론, 세자조차 실방사가 이곳 복이모사에 어떻게,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실방사의 일원 대부분이 마찬가지이리라.
보안을 유지하는 데 있어 정보의 제한적인 공유는 매우 유리하니까.
조선 측조차 사정이 이러하니 포로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세자의 계획과 실방사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조선을 기만하다 역으로 당해버린 복이모사 총독부다.
과연 이곳의 직원들이 다시금 만용을 부리고자 할까.
설령 체감이 부족하여 한두 번 정도는 사고를 칠 수도 있겠지만, 적발되는 순간 실방사에서 그 부족한 체감이라는 것을 확실히 채워줄 터.
“흐음…….”
이완이 침음했다. 세자의 말대로라면 후환을 걱정할 염려는 크게 덜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이 개운해지지는 않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애초에 화근이 될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세자에게 이미 두 말을 하였으니, 해법을 제안받고도 거듭 반대한다면 그것도 모양은 이상했다.
“과연 군사들 외에도 포로들을 감시할 자들이 있는데, 소관이 잠시 간과하였습니다. 그들이 섬의 안정에 기여한다면 후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저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도원수인 이완이 세자의 뜻에 부합하기로 했으니, 구인후는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소관 또한 의견은 같습니다. 저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세자는 짧게 답하고는 군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대화를 들었으므로, 포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조치가 과하지 않을 터.
군관들 또한 세자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 고개를 숙였다.
“남은 건 말씀드린 방식으로는 활용하기 어려운 포로들의 처결이군요.”
총독부의 직원이 아닌 자들.
여기에는 섬을 지키던 서반아의 병사들 외에도, 이곳 정착지에 거주하던 홍모이들과 원주민들 역시 해당되었다.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냐.
혹은 잠재적인 후환이 되기 쉬운 군사들만 데리고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냐.
나아가 건장한 장정들이라면 예외 없이 구속하여 끌고가느냐.
그것을 세자가 고민한다는 걸 아는지, 세자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포로들은 고개를 돌리며 움츠러들었다.
* * *
침략자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들이 서로 한참 상의를 나눴다.
복이모사에 유일하게 남았던 중대의 일원, 프랑코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과 깊게 연관이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것 외에는 딱히 저들이 고민할 것도 없을 테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건 자칫 침략자들에게 도발적으로 보일 수 있었으므로 프랑코는 눈만 질끈 감은 채 어딘가에 계실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부디 침략자들의 점심밥이 되는 등의 끔찍한 죽음만은 예외로 해달라고 말이다.
프랑코가 기도를 올리는 사이 침략자들은 어느샌가 상의를 마치고 조용해졌다.
비단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옷을 걸친 젊은 사내는 밝은 낯으로 물러났고, 그의 바로 아래에서 명령을 따르는 듯한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알아듣지 못할 몇 마디 지시가 있었다.
그 말에 침략자들은 우악스럽게 팔을 내질러 포로들 사이를 갈랐다. 프랑코는 어쩌면 이게 죽을 자와 살 자를 가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만 동그래진 채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이게 뭐냐?”
중대원 중 하나가 소란 속에서 물었다.
그러자 다른 중대원이 답했다.
“관저 직원들이랑 우리랑 나누는 거 같은데?”
“뭐?!”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중대원들은 역시 기겁하면서 침략자들의 팔짓에 저항했다.
그래 봐야 두 팔이 다 구속되어 두 발로 버티고 어깨로 팔짓에 맞서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중대원들은 필사적이었다.
관저 직원들과 병사인 저들을 분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중대원들이 직감적으로 떠올린 해답은, ‘쓸만한 관저 직원들만 남겨놓고 화근이 될 수 있는 병사들은 처리해 버리기 위해서’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