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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36화 (336/380)

인조, 명군이 되다 336화

관저 직원들도 생각하는 건 같았는지, 그들은 침략자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팔짓에 밀쳐지면서도 면면에는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은 살 것 같다는 거다.

그런 직원들의 느긋한 반응이 중대원들을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잠깐! 잠깐만!”

“왜 이러는데!”

“말로 하라고!”

중대원들은 저마다 호소하면서 두 발로 버티고 섰지만, 두 팔이 구속된 상태로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그러다가 곧바로 붙잡히기도 했다. 프랑코는 후자에 속했다. 혼란을 틈타 곧바로 몸을 돌렸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지고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거칠게 호흡하면서 목구멍과 폐가 따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울어진 프랑코의 시야에서 중대원들이 울부짖고 쓰러지며 무릎을 꿇고서 저항하는 게 보였다.

지옥의 광경이 꼭 이렇지 않을까.

몇몇 사람이 더 도망치다가 붙잡혔고 쓰러졌다.

멀리서는 관저의 직원들이 저마다 놀란 얼굴로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프랑코는 후회했다.

“이런 씨바. 아빠 말대로 공부나 할걸!”

그래서 글줄이나 똑바로 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우악스럽게 땅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저들처럼 태평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였다.

한, 20년 정도.

중대원들과 몇 명의 원주민 용병들이 공터에 따로 격리됐다.

주변에는 온통 조선군뿐이었으며, 그들과는 말조차 통하지 않았지만, 면면에서는 한심해하면서도 은근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공터에 몰린 채 서 있고, 앉아 있고, 쓰러진 중대원과 병사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집단 처형을 앞둔 신세였다.

누군가가 울먹이면서 주기도문을 외웠다. 거기에 또 누군가가 동참하여 생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완전히 난장판이로군!”

중대원들에게는 익숙한 스페인어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공터 내부가 아닌 외곽에서 났다.

“집중하도록!”

그는 박수와 함께 중대원과 용병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성에서 보았던 자였다. 그는 여전히 이국적이면서도 멋들어진 의복을 걸친 채였다.

그는 자신에게 향한 무수한 이목을 마주하고서 말했다.

“우리, 그러니까 대조선에서는 너희들에게 관대한 제안 하나를 하고자 한다.”

그 제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프랑코는 당장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중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누구도 섣부른 대답으로 관대한 제안자의 심기를 거스르려 들지는 않았다.

조선인이 말했다.

“조선에 충성할 것이냐? 아니면 스페인을 향한 충심을 지키고 노예가 될 것이냐. 혹, 깔끔하게 죽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받아주겠다.”

프랑코에게는 고민이 필요 없는 제안이었다.

“충성하겠습니다!”

다른 중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충성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중대원들이 애처롭게 애원했다.

조선에 충성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떨지 중대원들은 알지 못했으나,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목숨을 연명할 방법이 주어졌으며, 스페인은 당장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계산도 결정도 쉬워지는 것이다.

중대원들에게는 너무 쉬운 결정이었지만, 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까.

조선인 제안자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프랑코와 중대원들을 마주했다.

그러나 프랑코와 중대원들에게 대안은 없었다.

노예와 시체가 선택지가 될 수는 없으니까.

“충성할 테니,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알려주시오!”

익숙한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중대원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중대장이었다.

마닐라의 필리핀 총독부는 그와 그의 중대만을 포르모사에 남겨둔 채 다른 병력과 전선을 모두 필리핀으로 빼갔다. 그 여파로 산 살바도르가 이렇게 허무하게 함락해버린 시점이다. 중대장에겐 본국과의 의리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원들의 의견도 나와 같소!”

중대장이 뒤편에 옹기종기 뭉친 수하들을 향해 팔을 펼쳤다.

프랑코와 그의 동료들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적극적인 반응이 마음에 들었을까.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던 조선인 제안자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프랑코와 동료들은 목숨이 걸린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는 속으로 안도했다.

조선인 제안자가 느긋하게 답했다.

“……좋다.”

꿀꺽.

여러 사람의 목에서 울대가 오르내렸다.

조선인이 덧붙였다.

“그대들은 조선의 군사로서 본토에 분산 배치될 것이다. 지금 보인 모습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겠다.”

제안자의 결론에 프랑코는 안심하면서도 막막해졌다. 군사로 지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동안 군사로 지내왔으니까. 달라질 것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조선의 본토로 보내진다는 점이었다.

문화도, 문명도, 언어도 다 다를 야만의 세계에 강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다른 선택지랍시고 주어진 여타 결말이 노예와 시체였다는 점에서 이게 어디냐 싶기도 했지만, 역시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프랑코의 주변에서는 기도도 어느새 그쳤고, 집단 처형을 걱정했던 중대원들은 안도와 함께 픽픽 쓰러져 주저앉았다.

바로 옆 공터에서는 관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비슷한 제안을 받은 듯했다. 프랑코는 생각했다.

부러운 놈들이라고.

적어도 그들에겐 창을 내지르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이상의 쓸모가 있었다.

머리가 좋으니 언어를 익히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나도 공부나 할까.’

관저 직원들 쪽도 쉽게 결론을 냈고, 주변을 에워쌌던 조선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물러났다.

그리고 스페인어가 유창한 조선인 사내가 포로 모두의 앞에서 말했다.

“너희들은 문화도 언어도 다른 곳에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며 운명을 저주하고 있겠지만, 틀렸다.”

단호한 목소리.

“조선은 위대한 나라이고 능력만 있다면 야만인이라도 기용한다. 오래전 너희들 세상의 로마 제국처럼 말이지. 실제로 이 땅에 표류했던 세 명의 해적선 선원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중 한 사람은 제독이 되었으니 신세는 제대로 고친 셈이지.”

그의 말에 여러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선인 사내에게는 만족스러운 광경이었을까. 그가 여유로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니 좋게 생각해라. 기회의 땅인 조선에서는 너희들조차 귀족이 될 수 있다. 그럴 의향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노력만 충분히 한다면 말이지. 강요하지는 않겠다. 조선어를 배우고 싶은 자가 있다면 자원해라. 가르쳐 주겠다.”

프랑코가 곧바로 손을 들었지만, 그의 손은 중대장과 다른 중대원들의 손에 파묻혔다.

* * *

“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 오랑캐들이 단숨에 고분고분해진단 말입니까?”

삼도수군통제사 구인후가 놀라서 물었다.

“……뭐, 나라고 알겠소이까? 저놈들의 말은 나도 모르는데.”

도원수 이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어쨌거나, 포로들이 고분고분해진 건 무척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포로들에게서 자발적으로 협조를 끌어내는 것만큼 이상적인 상황은 없으니까.

보통은 정반대인 법이고, 포로들은 화근으로 남는다.

세자에게 앞서 한 말이 있음에도 낯부끄럽게 두 말이 나온 이유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세자의 제안에 못내 수긍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이완 본인만 더 낯부끄러워진 셈이었다.

“아무튼 잘 되었다는 점만 생각합시다. 나머지 부분은 저들에게 맡기도록 하고.”

이완의 시선이 언제 어디서부터 합류했는지도 모를 조선인들에게로 향했다. 실방사의 일원들이었다.

“뭐어…….”

구인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세자와 그들 두 사람이 할 일은 끝났다. 전투는 승전으로 종결되었으며, 점령지와 포로의 처우 모두 결정됐다. 상세한 부분은 논의와 수립이 필요하겠지만, 당장 두 사람이 나설 부분은 없었다.

“좀 쉽시다.”

“예.”

이완은 휘하 군관의 안내를 받아 임시 지휘소로 선정된 건물로 향했다. 우연히 포격을 피해 형체가 멀쩡하게 남은 홍모이식 건축물이었다.

이완은 함께 휴식할 것을 구인후에게 권하였으나, 구인후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선상으로 향했다. 부하들이 모두 물 위에 있는데 지휘관인 자신만 뭍에서 편하게 휴식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육군과 수군의 지휘관인 두 사람이 물러난 뒤로 복이모사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곳저곳에 틈틈이 숨어 있었던 거주자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왔고, 번을 서는 이국 군사들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상인 몇 명과 성직자는 이국 군사의 지휘관이 머무른다는 처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들로서는 둘도 없을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상인과 성직자들은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터덜터덜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최초의 도전일지언정 최후의 도전은 아니었다.

곧, 해가 저물고 복이모사에 어둠과 고요가 번져왔다.

* * *

새로운 해가 뜨면서 한양의 궁궐에는 소식 하나가 닿았다.

“전하.”

“승전색承傳色?”

“그러하옵니다.”

승전색이 이르게 마주한 왕의 상태는, 공손하게 말하고자 해도 절대 좋다고는 하기 힘들었다.

분명 막 기침하였다는 상관의 전언을 받고 방문하였음에도 왕은 안색이 사흘 쯤 침식寢食을 거른 듯했으니까.

이유는 하나였다.

“세자의 소식입니까?”

왕이 실낱같은 기대감을 품고서 물었다.

과연 그가 여태 기다렸던 건 세자의 소식이었다.

세자가 서반아 함선으로 위장한 내수사 범선들 및 이를 호위하기 위한 판옥선 함대를 이끌고 남해南海로 향한 지 꼬박 달포가 지났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원정임을 생각해 본다면 절대 길다고도 못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왕은 세자를 보낸 날부터 끙끙 앓았으며, 달포가 지난 지금까지도 끙끙 앓고 있었다. 침식을 거르지 않았는데도 환자처럼 변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백관百官 모두에게 당황스러우면서도 불안하게 다가왔다. 국본國本이 부재하고 차기 후계자는 외부를 떠도는 지금, 옥체에 누라도 생겼다간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사람이 죽어갈 일인가, 싶으면서도 최악의 경우 벌어질 상황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승전색이 밝은 얼굴로 응했다.

“그러하옵나이다, 전하.”

“……!”

승전색이 세자의 출항 이래 최초로 왕의 물음에 긍정적으로 응했고, 왕은 눈이 화등잔처럼 커져서는 재촉했다.

“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빨리 소식을 알려주세요!”

“낭보朗報이니 심려를 품지 마시옵소서. 세자가 복이모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채 해남의 전라우수영에 입항했다는 소식이옵니다.”

“오, 오오……?!”

승전색의 전언에 왕은 언어를 잃은 듯, 뻥 뚫린 구중口中에서 감탄만 나오더니 다 죽어가던 용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해다.

그 광경을 정면에서 보던 승전색은 이 놀라운 광경을 자신만 보고 있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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