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7화
“네가 누구 자식인데? 걱정 따위 하나도 안 했다!”
왕의 호언豪言에 중궁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은 정면의 세자를 똑바로 보는 중이라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반대로 부왕과 함께 어머니도 마주한 세자는 그 광경이 톡톡히 보였다.
‘아바마마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구나.’
세자는 그간 왕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막 한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서궐로 귀환하기 전, 부왕과 어머니께 안부 인사차 경운궁에 방문한 참이었다.
그러니 중전과 궁인, 백관에게 최근 용안의 변화는 상전벽해와 같았음은 알 수가 없었다.
과거 용안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시체가 소생하는 과정으로 착각할 정도.
그러니 지금은 많이 호전된 셈인데도 세자는 용안에서 초췌하고 피로한 기색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심려를 끼쳤습니다.’
세자가 손을 모으고서 공손히 사죄하니, 왕은 두말하지 않고 '흠' 헛기침 소리만 냈다.
자신이 할 말은 이미 했다는 거다.
걱정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되려 자식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의도의, 너무나 뻔한 거짓말이었다.
세자는 멋쩍은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아바마마.”
샐쭉하여 허공만 주시하던 왕이 눈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복이모사를 평정한 건 오롯이 너의 승전이다.”
“아바마마께서 부족한 소자를 신임하셔서 대사를 일임해 주셨는데, 어찌 승전이 소자의 공이겠사옵니까.”
“그 외에는 내가 해준 것이 하나 없거늘 침소봉대를 하는구나. 공치사는 그만두어라. 이 아비에게는 낯부끄러운 금칠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부왕이 하례를 극구 사양하니 세자는 죄송스러우면서도 감사했다.
복이모사의 평정을 다른 신하가 아닌 세자 자신에게 맡긴 건, 미리 업적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에 공로 하나 없는 왕은 신하들에게 존중받기 힘드니까.
왕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았던 시절은 지났다.
현 왕에 의해서였다.
부왕은 선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나라를 좀먹는 군주는 존중해줄 수 없다고. 후대의 왕으로서 천명闡明한 것이다.
그 새로운 기준에 부왕의 후계자인 세자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나를 금쪽같이 아끼시니까.’
미리 방패를 들려주려는 것이다.
‘……그럼 아바마마께서는 복이모사가 평정될 것을 확신하셨구나.’
복이모사에 고작 200명 정도의 수비군만 있으며, 그에 반하여 원정군의 편성은 소 잡는 칼이었다.
그러니 승전을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부왕은 세자 자신을 금지옥엽 아꼈고 변수는 심하게 걱정했다.
원정군의 과도한 규모는 압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변수를 차단하고 세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터.
그럼에도 부왕은 근심이 많았다.
‘아바마마께서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승전 자체는 의심하지 않으셨구나.’
세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복이모사에서 수비군이 갑자기 빠져나갈 것도 알고 계셨을까?’
여느 범부들 상대로는 이런 의심 따위는 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세자는 알고 있었다. 부왕의 통찰력은 날카롭다 못해 술법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마치 선왕조에 도통道通을 깨우쳐 통견원문通見遠聞의 술법을 펼쳤다는 백우자百愚子 이혜손李惠孫처럼 말이다.
공자께서는 괴력과 난신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으셨다지만…….
자식으로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고 있기에 세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부왕께서는 범부들은 가지지 못한 하늘의 재주天才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이 진짜 하늘이 내려준 재주이건, 혹은 그에 비견되는 신기묘산神機妙算이건…….
세자는 의심하였으나, 차마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기이했다.
질문에 딱히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님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세자는 이내 자문에 자답했다.
‘어떤 대답을 들을지 몰라 두려운 것이구나…….’
마치 볕 들지 않는 깊은 동굴은 선뜻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세자는 혀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였으나 곧 입에 고인 침과 함께 넘겨버렸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부왕이 이르자 세자는 아차, 하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송구하옵니다. 문득 흉중에 두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
“복이모사의…….”
세자는 저도 모르게 말을 돌렸다가, 이내 엎질러진 물임을 깨닫고서 덧붙였다.
“복이모사의 수령으로 홍모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아바마마께서 가납해 주실지 몰라 고민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고민까지 하느냐?”
“…….”
“더욱이, 이 나라에 홍모이가 한둘인 것도 아니잖느냐.”
왕의 자상한 물음에 세자는 아닌 척 답했다.
“소자는 박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사옵니다.”
“아, 박연.”
왕은 세자가 내심 숨기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답했다.
“박연은 화란 출신으로 서반아와 다르긴 하지만, 그들은 원래 한 나라였으니 소통이 불가하진 않겠지. 생긴 것도 비슷하니 내지의 조선인들보다는 경계를 덜 살 테고.”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뱃사람 출신에, 그동안 항구들을 담당해왔으니 적성도 맞겠구나. 괜찮은 인선이다. 세자가 고민을 많이 했구나.”
“아, 아니옵니다…….”
세자가 얼굴을 붉히면서 답했다.
그리 대단한 고민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부왕을 기만했다는 생각에 내심 부끄럽게 여기던 세자다.
그러한 감정이 빠르게 불어나서, 세자는 염치불고할 각오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음?”
“한 가지만 여쭈어 보아도 되겠사옵니까?”
“말해보아라.”
왕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실소했다.
“얼마나 대단한 질문을 하려고 내게 허락까지 받느냐.”
개의치 말라는 그 말에 세자는 꿀꺽, 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혹 복이모사에서 수비군이 물러날 줄 알고 계셨사옵니까?”
세자 본인조차 복이모사에 다다라서야 접한 정보였다.
만약 이를 부왕께서 먼저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온 근심 중 하나가 어떻게든 매듭지어지리라.
작은 매듭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왕이 웃었다.
“복이모사에서 수비군이 물러난 것? 몰랐구나. 그들의 방비가 취약할 거라는 건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 하지만, 세자가 말한 부분은 이 아비도 상세한 장계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세자의 본심은 질문 자체가 아니었기에, 세자에게는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그걸 왜 물어보느냐?"
반대로, 왕은 세자가 질문한 저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자신으로서는 장계를 받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굳이 확인하여서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그러한 부왕의 기색을 세자 또한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세자는 새삼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끓어올랐다. 세자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이었다.
“전하.”
중전이었다.
부자간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그녀다. 반 발자국 떨어져 두 사람의 대화를 온전히 듣고만 있었기에, 세자가 이상하게 질문한 연유를 짚고 있었다.
기실, 중전 역시 오래전부터 지아비에게 의문을 품었다.
반정 이전 그녀의 부군은 뻔뻔하면서도 고지식했고, 그러면서도 이기적이었다. 부부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엄청 좋지도 않았다.
왕족이라는 특별한 지위만 제외한다면 이 시대에서는 제법 흔해 빠진 부부 중 하나였으리라.
하지만 반정이 있은 뒤로 그녀의 부군은 달라졌다.
급격하게, 라는 표현조차 그 변화의 빠르기를 다 드러낼 수 없었다.
마치 벼락이 단숨에 내리치고 사라지듯 그녀의 부군은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강한 의문이 들었으나 이를 해결할 기회는 없었다.
한동안 왕이 그녀를 피해 다닌 탓이다.
접점이 없으니 의문을 해소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사람이 변했다고만 인지할 뿐.
그러다 사이가 다시 가까워졌을 즈음에는, 중전도 이러한 변화가 나쁘지 않으며 새삼스럽게 의문을 드러내기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간 뒤였다. 굳이 들춰볼 이유도 필요도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세자에게는 아니었던 걸까.
중전과 세자가 각기 가진 의문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중전이 가진 의문이 왕의 급작스러운 변화라면, 세자가 가진 의문은 왕이 가진 비상한 능력이었으니까.
그러나 두 가지 의문 모두 같은 시점에서 시작했으니, 서로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말씀하세요.”
왕이 중전의 개입에 놀란 얼굴로 답했고, 중전은 오랫동안 미뤄온 의문을 꺼냈다.
“세자는 전하께서 가진 능력에 관해 묻는 듯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
“전하께서는 나라에 위중한 변고가 있을 때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다는 듯이 능숙하게 대처하셨지요?”
“…….”
“복이모사가 수월하게 평정된 게 섬의 수비군이 갑자기 사라진 덕인 듯한데, 세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하께서 이 역시 알고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소식을 접한 시기가 궁금한 게 아니라요.”
“음.”
중전의 연이은 질문에 왕이 쓰게 침음했다. 그러면서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금시초문은 아니라는 듯이.
그것이 세자에게는 분명하게 다가왔다. 부왕에게는 정녕 신기묘산이 있으신 걸까.
왕은 당혹스러웠다.
중전의 질문이 날카롭기도 했거니와, 세자 또한 그러한 의문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냈으니까.
그들이 내심 의심하고 있을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짐작해왔다.
제삼자도 아닌 가장이 하루아침에 타인으로 바뀌었는데, 설마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단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놓고서 외면해왔을 뿐이다.
계속 다들 외면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징조도 없이 의문이 덮쳐왔다.
이실직고하기 어려운 의문이었다.
이제 와 자신의 내력을 밝힌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믿지 않는다면 그것대로도 별 의미가 없는 셈이었지만, 혹 믿기라도 한다면 더 문제였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는데 나만 과거 가족이 알던 그 아버지,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만 밝혀지는 셈이니까.
그렇다고 뻔뻔스럽게 아닌 척, 모르는 척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럴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중전과 세자에게 있어 자신은 그들이 알던 그 가장이 아닐지라도, 왕 본인에게는 중전과 세자가 곧 자신의 가족이었으니까.
차마 속일 수가 없었다.
그러한 유약함이 여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중전과 세자가 눈을 반짝였다.
“……끄응.”
왕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팔짱을 끼고서 앓는 소리를 토해냈다.
반정 이래 무수한 고난을 맞이했고, 그런 고난들을 타개해왔다만 오늘날 같은 고난이 있었던가.
중전이 말했다.
“세자에게도 밝히기 어려운 것입니까?”
“…….”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궁인들을 이끌고 물러나겠습니다.”
왕은 이마를 짚은 채 중전을 바라보았다.
중전은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자신에게 숨기고자 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사정이 무엇이 됐건 자식이자 후계자인 세자에게는 알려줄법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
왕은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