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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38화 (338/380)

인조, 명군이 되다 338화

“아닙니다.”

왕은 묵은 숨을 토해내며 답했다.

문득,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봉림대군이 백두산 수행을 중도에 마치고 한양으로 귀환해 안부 인사를 올리던 중이었다.

왕은 둘째의 의문에 어떻게든 답을 해주어야만 했다.

봉림대군이 가진 의문은 부왕의 이상한 편애였다.

분명, 왕은 자식들을 차별 없이 다 사랑했다. 거기에 한계가 있으리라곤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둘째 자신만을 향한 애정만은 기이하고 도드라졌다.

예로부터 종친은 한성에만 머무르게 하여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혹, 외부의 실력자가 종친을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봉림대군 자신은 후계 순위에서 두 번째에 달했다.

세자만 사라지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

그런데도, 부왕은 둘째 자신에게 무기한의 외유를 허락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도 전례 없을 특혜였다.

그것을 봉림대군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체감했다. 그도 이제는 성인이었으니까.

이건, 진짜로 유별난 특혜였다.

부왕에게 안부차 방문하였던 봉림대군이었으나, 막상 부왕을 뵙게 되자 의문을 더 견디지 못했다.

지금 해소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까?

그 기회를 영원히 얻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다 잊고 편안해질 수 있을까.

봉림대군은 그러한 자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부왕에게 정면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자신이 받는 특혜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도, 왕은 차마 이실직고하지 못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왕은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여기에는 무척 특이한 사정이 있고, 나는 둘째가 즐겁기만을 바란다고 했지.’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건 왕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봉림대군은 자신이 거리낌 없이 즐거워질 수 있도록 과업課業을 요청했고, 왕은 들어줘야만 했다.

봉림대군만이 들어줄 수 있는 과업을 내려줌으로써 말이다.

거기에 봉림대군은 그런대로, 만족한 듯이 보였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나?’

왕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

중전의 진지한 얼굴. 세자의 기대로 가득한 눈빛.

동시에 두 사람은 은근히 조심스러운 기색도 있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고, 본심이 있기 때문인지 섣불리 말을 주워 담지는 않았다.

왕은, 역사를 참고하여 난관을 극복해 왔다.

반정과 반란. 금나라의 발호와 명나라의 몰락.

그는 원래 역사에서 조선의 앞날을 흔들고 방해해 온 무수한 문제들을 알았다.

그 원인과 흐름, 결과마저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는 답안을 들고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왕은 누군가 과거로 날아가 다른 사람을 대체해버린 사례는 알지 못했다.

중대한 난관 앞에서는 항상 답지와 함께 해왔던 그다.

그래서 더더욱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흘러가는가. 무엇이 정답이고 최선인가.

“…….”

왕은 크게 숨을 들이켰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묵직하게 날숨을 토해낸 왕은 달라진 눈빛으로 가족을 마주했다.

장차 자신의 뒤를 아들. 지아비의 변화에도 내색하지 않고 곁을 지켜준 중전.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진심을 알고 싶겠지. 그리고 그게 두 사람의 진심일 거고.’

왕은 깨우쳤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진실을 말할 용기가 아니었다.

가족의 진솔한 의문에는 어떤 식으로 답하든 후회할 일이 생길 터다.

뻔뻔하게 거짓을 둘러댄다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끝까지 모른 척 함구한다면 가족들은 언제까지고 의문을 품으며 속으로 앓을 것이다.

십수 년 묵혀온 천기누설을 토해낸다면 아들과 부인은 어떻게 자신을 대할까?

그러니 왕 자신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용기가 아닌, 예고된 후회를 마주할 각오였다.

이것은 십수 년 미뤄온 진실에 대한 부채였다.

그리고 빚은 청산해야 하는 법.

“내가 두 사람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전과 세자가 모두 작게 끄덕였다.

왕은 쓰게 웃었다.

“그 전에, 부인.”

“예.”

“주변의 귀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알겠사옵니다.”

중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으로 향했다.

방에 울린 건 비단 쓸리는 은은한 마찰음뿐인데도, 중전이 문간으로 나아가자 방문이 좌우로 열렸다.

왕가를 능숙하게 보필하고자 눈과 귀를 밝혀온 궁인들이다.

‘그들도 진실에 대한 호기심은 있겠지만…….’

가족 앞에서도 오랫동안 묵혀온 진실을, 모두에게 무작정 밝힐 순 없다.

혹 가족이 진실을 듣고 난 뒤에 허락한다면 모를까.

‘미안하게 되었구나.’

중전이 방을 나서고도 궁인들이 물러나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전이 나의 의사를 무시하지는 않았을 거다. 다들 은밀하게 단련한 걸음으로 물러났겠지.

잠시 후 중전이 다시 돌아와, 직접 방문을 닫았다.

직접 방문을 닫는 건 중전으로서는 생애 처음이 아닐까? 그것이 곧 궁인들이 다 물러났다는 증거였다.

“전하.”

중전은 곁으로 돌아와 짧게 부르는 것으로 확인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세자야.”

“……예. 아바마마.”

“가까이 오거라.”

서안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은 세자다.

이런 거리에서는,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나는 친히 서안을 옆으로 밀어냈고, 세자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서안이 있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음.”

각오를 마쳤는데도 막상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헛웃음이 나왔다.

절로 지어진 미소에 세자의 얼굴의 의문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외지를 평정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순진함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세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내게 세자는 아들이다. 달라지지 않을 분명한 사실. 진리.

“……그래.”

나는 세자의 뺨을 쓸어내리고서 답했다.

“내가 그간 보인 모습이 평범한 사람들 같지 않았을 테지.”

나는 중전을 돌아보았다.

“중전께서도 가까이 오세요.”

중전이 다시금 자리를 고쳐 앉으며, 세월이 스쳐 간 손끝을 다소곳하게 모았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의 흔적이다.

“반정이 벌어졌던 날. 내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전이 작게 탄식한다. 중전도 그날로부터 내가 바뀌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나는 원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시선들이 나와 허공을 교차한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중전에게 말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나는 본래, 이 시대로부터 400년은 지난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

“내가 살고 있었던 세상에서 조선은 이미 패망해 사라진 뒤였습니다.”

흐름으로는 세자와 중전이 혹, 이 시기에 조선이 멸망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법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도 꼬박 300년은 더 이어졌으니, 착각인 셈이나 완전히 어긋난 생각은 아니리라.

병자호란은 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으니까.

왕이 적에게 사로잡혀 구차하게 항복하는 사태는 임란 때에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다.

이 일로 고지식하고 오만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좌절한 조선은 격변하는 시대에 체질을 바꾸어 적응하기보단 그들만의 세계관에 매몰되기로 했다.

멸망해버린 명나라를 대신해 오직 조선만이 세계 유일의 문명이며 치욕을 안겨준 외부의 오랑캐들과는 소통을 최소화함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조선의 식자들은 정신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승리로는 격변하는 세계를 이겨낼 수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 장장 300년의 세월이 주어졌지만, 조선은 끝끝내 생존과 적응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는 이뤄내지 못했다.

병자호란의 여파가 국가의 골수까지 스며든 결과였다.

“400년 뒤 미래에서 나는 조선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망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무수한 미래의 사람들이, 조선이 역사의 전환기에 보여준 모습에 실망했다.

그리고 당시의 군주가, 위정자들이 더욱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지를 상상했다.

“안타까움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에 가정을 거듭하더라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정해진 역사를 변혁할 수는 없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상식이다.

조선으로 보내지기 전까지는.

“문득 의식을 깨우치고 나니 나는 이 시대에, 이 몸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왕은 곧장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겠군요.”

어쩌면 인조가 미래인의 기억과 의식을 전달받은 걸 수도 있으니까.

왕은 미래의, 원래 역사의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정녕 나의 의식이 이식된 것인지.

혹은 복제된 것인지.

역사가 달라져 버린 현재, 왕으로서는 400년을 더 살더라도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한 건, 원래 이 몸의 의식은 어딘가로 침잠하거나 증발해버렸으며 기이하게도 400년 동안의 역사를 기억하는 제삼자의 의식만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천기누설을 마치고 두 사람을 쳐다보니, 중전과 세자는 과연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기 자신의 귀와 나의 상태 둘 중에 무엇이 이상한 건지 의심하는 듯했다.

재미있는 반응이다.

왕은 생각했다. 나라도 저러지 않았겠느냐고.

“중전과 세자가 모두 긴가민가해 하니, 궁금한 게 있다면 내게 물어보아도 좋습니다.”

이에 세자가 곧바로 물었다.

“아바마마…… 께서 오지 않으신 조선은 어떻게 사라졌습니까?”

“말왕末王이 왜국에 국체를 헌납하면서 멸망했다.”

“……!”

세자의 면면에 순진한 놀라움이 번져갔다.

임란 이전 같았다면 조선이 왜에 의해 멸망한다는 소리 따위, 한갓 미치광이의 망언으로 치부되었겠으나 임란을 겪어본 이제는 아니었다.

임진왜란기는 진정 나라가 망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이 시기 조선은 왜국과 여진이 세력을 통일한 뒤 급속도로 성장하고, 그 너머의 오랑캐들도 강성해지는 것을 포착했지만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

“……어째서이옵니까?”

“왕이 한갓 오랑캐 추장에 불과한 홍태주에게 삼궤고구두를 올려야 했고, 그 뒤로는 명나라마저 멸망해버렸으니, 꺾인 채로 의지할 데조차 없어진 조선은 안으로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후금에 패배했다는 말이옵니까.”

세자가 당혹스러운 투로 물었다.

후금이 초창기 대단한 예기銳氣를 보여주었다고는 하나, 금왕今王의 신묘한 비책에 거듭 휘말려 끝내는 아조의 번견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런 번견이 되려 주인을 무릎꿇렸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이 답했다.

“선왕과 폐주가 전쟁으로 손상된 국가를 적기에 회복시키지 않고, 하찮은 정쟁과 태만만을 일삼았으니 임란이 벌어지고 고작 20년 만에 벌어진 호란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

“……아바마마께서 정예한 군사를 조련하여 미리 북방에 보내놓으신 것이…….”

“오롯이 그 때문이었다.”

왕이 단호한 대답에, 세자는 시선을 거두어 허공에 두고는 고개를 내렸다.

더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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